꿀벌의 우화 - 개인의 악덕, 사회의 이익
버나드 맨더빌 지음, 최윤재 옮김 / 문예출판사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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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드빌의 말은 어떤 부분에선 현실에 대한 설명으로 받아들일만 하지만, 다른 부분에선 잘못된 정책에 대한 제언으로서 받아들이기 어렵고, 또 다른 부분에선 이 설명을 그대로 받아들여도 괜찮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맨드빌의 세계에는 착한 사람이 없다. 모든 사람은 자기애의 원리에 따라 마음을 먹고, 행동한다. 도덕적으로 지탄받는 행위를 하는 데 있어서도 거리낌이 없는데, 그 행동을 하는 것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기보단 들키는 것이 더 문제라고 생각한다. 들키면 자기애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 명예를 잃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들 하는 거짓말은 오히려 우리에게 풍요를 가져다 준 동력이 되기 때문에, 이 국면에선 도덕적 고결함보다는 우리가 현재 영위하는 삶의 상태가 훨씬 더 중요한 문제로 부각된다.


이런 삶의 모습이 형성되는 더 근본적인 동기는, 자기애가 이해타산이 아니라 감정이기 때문이라는 게 맨드빌의 생각인 것 같다. 심지어 이것은 물욕마저도 초월하는데, 자기애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때로 인간은 어떠한 종류의 막대한 지출도 감수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통해서 사람들의 칭찬을 받을 수 있다면, 그 칭찬이 영원히 이어질 것이라는 점을 보장받을 수만 있다면 사람들은 죽어서도 칭찬받길 원한다. 그래서 맨드빌의 세계는 물질과 이익의 세계가 아니라 감정경제의 세계인 것 같다.


하지만 몇 가지 잘못된 전제와 더불어, 국가 운영의 관점에서 정책을 제시할 때는 자주 오류를 범하기도 한다. 시대적 한계 때문에 경제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는 점은 책의 각주에서도 자주 언급되는 내용인데다가, 결정적으로는 감정경제의 팽창을 위해서 필수적이어야 할 수요를 창출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계층인 하층계급(일하는 사람들)의 수요를 일정한 수준에서 묶어놔야 한다는 견해를 냄으로써 자기가 했던 말과 스스로 충돌하고 마는 것이다. 자선사업에 대한 비판은 현재 (이른바) 우파들이 동원하는 복지축소 논리의 원형을 보여주고 있다. 원형인 만큼, 그 견해는 훨씬 날것이며 공격적이다. 생산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사람이 아니라 거의 기계처럼 보는 것 같은 느낌적 느낌. 물론, 그가 설명하는 세계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와 그렇게 많이 다른지는, 잘 모르겠다. 실제로도 그러하고, 비슷한 의견이 마치 인간을 통찰하는 진리인 양 아직도 떠돌아다니고 있으니까.


그래서 궁극적으로, 나는 자기애를 사회 구성의 중심원리로 삼는 맨드빌의 견해에 의문을 갖게 된다. 정말로 번영하는 사회는 맨드빌의 의견처럼 자기애를 중심으로 구성되는가? 지금까지 그런 사회가 번영했다고 해서, 앞으로도 그래야 하는가?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살 수 있다면, 조금 덜 풍요로워도 되지 않을까?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이 정말로 그의 말처럼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는 것일까? 나는 아직 이런 질문들에 답을 내리지 못했다. 이럴 때는 확고한 의견을 가진, 특히나 이 책처럼 그 주장의 원형을 날 것으로 그대로 보여주는 책을 읽는 것도 좋은 경험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기와 사치와 오만은 그 이득을 우리가 누리는 한 남아있을 것이다. - P119

실제로 눈 앞에서 벌어지는 일처럼 마음에 그려볼 수 있을만큼 상상력이 강하고 생생한 사람은 동정심을 닮은 감정 속으로 빠져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기술로 그리되는 것이며 때로는 애를 좀 써야 하는 것으로, 연민을 그저 흉내 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 - P187

노예가 허용되지 않는 자유로운 나라에서, 가장 확실한 부는 부지런한 가난뱅이가 많다는 데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 P200

관습은 힘으로 자연을 비틀기도 하면서 자연을 흉내내기도 한다. - P218

대화를 나누는 모든 모임에서 다들 제 생각을 가장 많이 한다는 가장 뚜렷한 증거는, 말싸움하기보다는 맞장구나 쳐주는 무관심한 사람, 쏘아대지도 않고 남이 뭐래도 기분 상하지 않는 성격 좋은 사람, 논쟁을 싫어하여 말로 이기려 들지 않는 속 편하고 게으른 사람, 이런 사람들이 어느 모임에서나 인기 있다는 것이다. - P232

배고픔과 목마름과 헐벗음은 우리를 움직이게 만드는 첫째가는 폭군이며, 그 뒤를 이어, 자존심, 게으름, 관능, 변덕스러움 같은 것들이 모든 예술, 과학, 상거래, 공예, 직업을 북돋는 위대한 후원자가 된다. - P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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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안녕하세요, 지금부터 여러분의 음악공부를 시작하겠어요.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음악이란 무엇인가 한 마디로 설명을 해보겠어요. 음악이란 사람의 감정과 사상을 나타내는 시간적 예술이라고 하죠. 즉 아무리 아름다운 음악이라도 시간만 지나면 다시 들을 수 없는 것이란 뜻이겠죠. 여러분은 들어서 잊지 말고 영영 머리 속에 기억해야겠죠?”


루소의 <언어의 기원에 관한 시론>을 읽으면서 머리 속을 내내 맴돌았던 이 구절은, 내가 정말 좋아하는 음반인 디제이 소울스케이프의 첫 앨범 첫 트랙에 샘플링된 음원에서 나오는 강연이다.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정의이겠지만, 생뚱맞게 언어의 기원에 관해 다루면서 음악 이야기가 생각이 났는가 하면, 언어의 기원에 관한 루소의 관점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이 가진 신체적 조건을 이용해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의 정념(감정)을 표현하려 애쓴다. 이것이야말로 진짜 언어의 기원, 루소의 표현을 빌면 보편언어의 기원이다. 이 보편언어는 시각언어인 몸짓과 청각언어인 (목)소리로 나눠지는데, 이 둘의 대립은 현대인이 사용하는 언어의 핵심적 특성을 파악하는데 매우 유용한 구도(라고 루소는 생각하는 것 같)다.


사람들은 이 둘 중에 청각언어가 정념을 전달하는 데 더 적합하다고 생각해 이를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채택한다. 이 단계에서 소통이란 곧 정념의 전달과 이해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몸짓은 단번에 전체적으로 파악이 가능하고, 정적이다. 반면 목소리는 차분히 계속 듣고있어야 하는 유동적 매체이기에 반복을 통한 점진적 증폭과 고양 즉 정념(의 폭발)에 잘 대응한다.


인간은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모든 신체적 수단을 동원해 (목)소리라는 물리적 동요를 만들어낸다. 여기에는 자음간, 모음간의 차이 뿐만 아니라 억양, 성조, 성문, 음량 등 소리와 관련해 인간에게 주어진 모든 가능성이 포함된다. 이 측면에서 루소는 최초의 인간언어에 “운문과 노래와 말은 구별되지 않았다”고 자신있게 말한다. 그리고 나도 여기에 동의한다.


그에게 노래와 말(현대적 언어)의 분리는 필연적 퇴보의 과정이다. 말이 노래로부터 떨어지면서, 정념을 전달한다는 (목)소리의 본래적 기능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또는 사람들이 모여 살고 사회가 점점 더 복잡해지면서 정념을 전달하는 (목)소리의 기능이 점점 그 설 자리가 축소되면서 말이 노래로부터 떨어져나온 과정이기도 하다. 이 둘은 서로를 반복하며 상호간의 분리를 심화시킨다. 이 과정이 완성되는 현대에 이르러 언어는 밋밋하고 평평하고 지루하고 퉁명스러워졌으며, 기껏해야 형식적 추론의 도구로 전락해버렸을 뿐이다.


내게 이런 분석은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지금은 약간 시들하지만, 한때 정말 몰두해서 생각했던 주제인 ‘랩이라는 형식의 참신함과 문학적 의미’에 대한 논리를 한 가지 제공해주었기 때문이다. 글로 쓰여진 말에 대한 루소의 무자비한 비난과 마찬가지로, 랩 또한 그걸 문자화했을 때는 별 감흥이 없다. 이런 가사를 갖고 어떻게 라임을 쓰느니 내지는 이런저런 모음들을 조합해놓았으니 개쪄는 라임이라느나 하는 쓸데없는 분란만 생길 뿐이다. 한국에 힙합이 제일 처음 들어올 때의 풍경이기도 했고… 어쨌든, 모든 노래가사가 그렇긴 하지만, 특히 랩은 입말로 올리지 않았을 경우와 실제로 소리낸 경우 사이의 간극이 꽤나 크다. 이걸 아주 절묘하게 잘 하는 사람이 랩을 잘 하는 사람이기도 하고. 이 관심사가 제일 앞에 소울스케이프의 첫 트랙을 인용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18세기의, 그것도 모든 분야의 비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아니려나?) 철학자의 (뇌내망상 모음집애 가까운) 책이기에 갖는 한계들이 있을 것이다. 물론 나도 비전문가라서 사실과 다르거나 이후의 연구에 의해서 거짓으로 판명난 편견들을 하나하나 집어낼 순 없지만… 왠지 여기에 쓰인 내용들이 거의 모두 사실이 아닐 것이라는 느낌적인 느낌이 있다. 무근거의 그럴듯한 썰을 잘 푸는 학자라는 인상도 갖고 있어서 더더욱 그렇다. 그래서, 새롭고 신기하고 그럴싸한데다가 여기저기 써먹기 좋은 어떤 관점을 제시한 부분에선 (적어도 내겐) 성공적이었지만, 실제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또 다른 좋은 책이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자연적 진보를 통해 모든 문자언어는 명료성을 획득함으로서 성격의 변화를 겪게 되고 힘을 잃게 된다. - P57

분절과 목소리만 있는 언어는 반 정도만 풍성하다. - P98

폭식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만을 지배하는 악덕일 뿐이다. - P117

그리스에 소피스트들과 철학자들이 득실댈 때부터, 유명한 시인과 음악가들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 P139

어떤 국민이 자유롭게 살 수 없도록 하려면, 노예의 언어를 말하게 하라. - P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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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 열린책들 세계문학 161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한애경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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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에서 진짜인 것은 이야기뿐, 등장하는 모든 것은 가짜다.


개츠비를 읽는 내내 등장하는 거의 모든 인물들과 동화되지 못하고, 계속해서 책의 겉만 맴도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일차적으로는 등장하는 인물들이 왜 저렇게 행동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고, 이 몰이해의 조금 더 근본적인 이유는 이 당시의 분위기와 내 시대의 분위기가 너무나도 많이 떨어져있기 때문이었다. 혼자 사는 저택이 그렇게 클 이유도 모르겠고 알아보지도 못할 사람들이 매일 와서 파티를 하는 까닭도 알쏭달쏭하고 줄곧 무의미한 말만 허공에 흩뿌려지다 사랑은 사랑대로 깨지고 사람은 사람대로 죽었고 아무도 이 큰 사건에 주목하지 않는다. 이런 이상한 상황에서 느껴지는 익숙한 위화감 같은 것이 내 생각 속을 들락날락거렸다.


모든 것이 그토록 쉬운 게 도시의 특징인걸까? 이것이 이 이야기에서 창작자가 말하고 싶은 것이었다면, 나는 그것을 제대로 느낀 셈이다. 그냥 그렇다고 치고 싶다. 사람을 만나는 것도, 인사를 나누는 것도, 사랑을 나누는 것도, 돈을 버는 것도, 사람을 죽이는 것도, 아무도 여기에 주목하지 않고 그 죽음을 둘러싼 모든 사실이 증발해버리는 것도 너무 아무렇지 않게 진행되어서 놀랍지도 않을 지경이다. 소설에 나오듯 이 구조를 견디지 못하고, 도시가 아닌 곳에서 건너온 사람들만이 각자의 사연을 안은 채 도시를 떠나 다른 곳으로 향한다. 그들에게 그 쉬움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는 듯 말이다.


그 가운데 사랑을 쫓아서 그 곳까지 흘러든 것 같은 개츠비만이 홀로 빛나는 것도 같지만, 역시나 미심쩍기는 마찬가지다. 이 글 안에 담긴 모든 가짜와 의심스러운 것들의 중심에 바로 그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도 그가 어떻게 그 많은 돈을 벌었는지 모르겠다. 기껏 추측할 수 있는 건 위험부담이 높은 불법적인 일에 종사했다는 것 뿐인데, 그조차도 증언에 의해 밝혀진 것인데다 설령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사회에 존재하지 않아야 할 것들을 취급한 셈이니 역시 가짜이며 의심스러운 것들과 얽혀있는 셈이다. 그 활동을 하면서 그는 거의 모든 것을 속였다. 심지어 이름까지도! 그 덕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둥둥 떠다닌 관계들도 장례식장의 썰렁함으로 드러났고. 파티에 왔던 사람들은 사실 개츠비의 정체 뿐만 아니라 서로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허무하다. 화려함만 잔뜩 보여준 채 무엇 하나 제대로 맺어진 것 없이 사건은 갑작스럽게 끝나버렸다. 이 이야기 속의 시간을 파티에 비유하자면, 그렇게 할 수도 있겠다. 파티란, 감각적인 모든 것에 역량을 집중해 그 순간에만 화려하게 불꽃을 확 태워버린 다음엔 재와 흔적만 남는, 그런 시간들이니까. 무엇 하나 안타까운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무엇 하나 확실한 것도 없는, 그런 시간이니까. 어쩌면 도시의 인간들이 보내는 시간이란 그런 시간들로 가득할지도 모르고, 어쩌면 그런 화려함조차 껴안아보지 못한 사람들이 그런 시간을 꿈꾸는 시간으로 가득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환상은 현실이란 것이 얼마나 비현실적일 수 있는지 만족스럽게 보여주는 증거였고, 세상이라는 반석이 요정의 날개 위에 안전하게 잘 놓여 있다고 보증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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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고와 아름다움의 이념의 기원에 대한 철학적 탐구
에드먼드 버크 지음, 김동훈 옮김 / 마티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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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것이 아름답다면, 이유는 무엇일까? 버크는 여기에 대해서 시원한 답변을 주지 않는 것 같다. 길게 무언가를 써놓았지만, 그의 결론을 한 줄로 압축하자면 “원래 그래”다. 버크가 직접 애써 설명하듯, “저것은 왜 아름다운가?” 라는 질문은 “소금은 왜 짠가?”라는 질문과 똑같다. 철학사적 맥락을 끼워넣자면, 갈릴레이와 로크로부터 시작된 제1성질과 제2성질의 구별, 즉 물리적 성질과 인간의 정신과 상호작용을 일으켰을 때에만 발생하는 특성의 차이에 관한 설명이 개입해야 하는 부분이다. 소금의 분자구조를 분석한다고 쓰다는 특성이 나오지 않듯, 아름다운 대상들을 물리학적으로 분석한다고 아름답다는 특성이 나오지 않는다. 버크는 이 논리적(인간적?) 한계를 쿨하게 인정하고 “원래 그런 것들”에 대한 가능한 한도 내에서의 일반화를 시도하는 대안을 택한다.


그의 답변은 이렇다. 숭고함을 자아내는 대상은 거대하고, 반복적이고, 불투명하고, 강력하고, 난해하다. 이런 대상들을 대면하는 인간은 생명의 위협에 직면하지만, 그런 대상들이 실제로 피해를 입히지 않을 경우(예를 들어 호랑이는 거대하고 강력하고 피해를 주지만 거대한 회랑 건축물은 거대하고 반복적이지만 피해를 주지 않는다) 독특한 안도감을 느낀다. 이 공포와 안도감을 오가는 상태가 숭고다. 반면 아름다운 대상은 작고, 완만하고, 부드럽고, 파악가능하며, 연약하다. 그는 수학적 비례에서 아름다움을 찾거나 아름다움은 완전성의 일부라고 주장하는 다른 학자들의 입장을 비판하며 이런 특성들을 찾아낸다. 인간은 이런 특징을 지닌 대상들을 만났을 때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그리고 이 사랑의 대상은 그 대상이 품고 있는 이런 사랑스런 특성들이다.


어찌보면 다소 싱겁고 뻔한 답변들이다. 아름다움에 관한 논의가 이렇게 간단하게 끝나고 되나? 뭔가 더 심오한 것은 없는 것일까? 게다가 아직 지금만큼 과학이 발달하지 않은 시기라 사실관계에서도 이상한 설명이 많다. 설탕 알갱이는 구형이라 달다든가 하는 이상한 발상들 같은 것 말이다. 받아들이는 게 맞을까? 잘은 모르겠다. 그럼에도 나는 꽤 괜찮은 태도라고 생각하는데, 겸손하고 솔직하기 때문이다. 괜히 어려운 개념이나 불투명한 용어들을 사용하면서 젠체하는 것보다는 낫다. 문제는 그 개념과 용어를 사용해서 젠체해온 것이 플라톤 이래로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답변하려 애써온 철학자들 모두의 노력인지라, 버크식 접근법은 그 전통 전부에 대한 완전한 부정이나 폐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겠지만.


그럼에도 그 과정에서 버크가 내놓은 몇몇 아이디어들은 신선했다. 무엇보다도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발상은, 모든 감각이 서로에서 어느 정도씩은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 아이디어를 감각들 사이의 유비논증을 사용해 입증하려고 하거나, 당연한 사실로 간주하고 활용한다. 가령, 이런 특성 때문에 우리는 “스윗하다”는 표현을 음식에도 쓸 수 있지만 사람의 특성이나 행동의 특성에도 쓰고 좋은 노래에도 쓸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가끔 “우리가 오감이라고 하지만, 이들이 정말로 어떤 분리된 감각들일까?”라는 헛된 생각을 하곤 하는데, 이런 발상을 있어보이게 표현할 좋은 참고서적을 얻은 셈이다.


아름다움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예술작품 - 넓은 의미에서의 인공물 - 이야기 만큼이나(어쩌면 그보다 훨씬 더) 자연물 이야기를 하는 것도 한번쯤은 곱씹어볼만하다. 아름답다는 것이 가치있는 다른 특성들(도덕적으로 착하다, 유용하다, 진실되다 등)과 분리되는지 그렇지 않은지도 철학적 논의거리이지만, 그만큼 인공물에서의 아름다움 또는 더 좁은 의미에서 예술작품에 고유한 아름다움이 있는지 묻는 문제 또한 미학의 핵심적 주제 중 하나일 것이다. 이 부분에서 버크의 입장은 단호하다. 인공물에서 사람들이 아름다움을 왜 느끼는지 탐구하기 위해선 자연물에 대한 인간의 반응을 반드시 탐구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대체로 사람들에게 널리 퍼져있는 아름다움의 “자연적” 과정을 알 수 있고, 인공물의 아름다움은 그 과정의 반복일 것이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한다. 정말 그럴까? 맞는 말인 것도 같다. 아름다운 사람을 보는 느낌과 아름다운 사람을 본뜬 조각을 보는 느낌은 크게 다를까? 설사 다르다고 하더라도 후자는 부차적이고 부가적인 요소를 갖고 있다고 버크는 볼 것이다.


또 내가 이 책에서 주목한 논의는 5장, 시적 언어에 관한 부분이다. 그는 의사소통으로서의 언어가 아니라 시적 용법으로서의 언어가 오히려 언어에 더 본질적이라고 주장한다. 의사소통을 위해선 의미가 언어 사용의 중심에 있어야 한다. 이 생각은 상식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버크는 반대로 우리의 일상적 언어사용조차 시적인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언어를 사용해서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전달하기 때문이란다. 다른 사람의 말을 통해서 우리가 듣는 단어들에 해당하는 표상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검토하기에 우리의 대화의 속도는 너무나 빠르다. 그가 보기에 실제로 그렇게 반복적으로 표상을 떠올리며 의미를 하나하나 찾아가면서 언어생활을 하는 사람이 오히려 드물다. 이것이 예술로서의 언어, 시적 용법으로서의 언어가 가능한 근거라고 버크는 주장한다. 만약 이것이 불가능하다면, 또는 사람들이 언어를 의미로서만 사용하려 들었다면, 비트겐슈타인의 말마따나 모든 시들은 “무의미한 말들”, 가치없는 낭비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름다움과 숭고는 사랑과 공포 즉 감정의 문제이기에, 우리는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모든 표현에서 독특한 미학적 경험을 갖게 되는 것이다.


여튼, 그래서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온다. 대체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버크가 내놓지 못한 답변을 나라고 명쾌하게 내놓을 재주는 없다. 더군다나 앞에서 쓴 것처럼, 버크 자신도 이것이 답변불가능한 질문이라는 점을 재빠르게 인정하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버크는 이 질문이 사람들의 흥미를 끄는 질문이라는 점 만큼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왜냐면 “명확한 관념이라는 말은 보잘것없는 관념이라는 말과 동의어이기 때문이다.”


PS. 예전에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을 읽다가 포기한 적이 있어서, 어렵지 않을까 읽기 전에 많이 걱정했다. 다행히도 술술 읽힐 수 있도록 많이 배려된 번역이었다. 버크의 원문을 살린 것인지는 대조하면서 읽어봐야 알겠지만, 내겐 그럴 능력이 없다 ㅠ.ㅜ

어떤 사물을 선명하게 본다는 것은 그 경계를 인식한다는 것과 같다. 따라서 명확한 관념이라는 말은 보잘것없는 관념이라는 말과 동의어다. - P112

소유하고 있을 때는 우리에게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지만 없을 때는 강하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습관을 통해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사물들의 특징이다. - P157

우리의 감각들 사이에는 어떤 연결고리가 존재한다. 우리의 감각들은 다양한 대상들에 의해 영향을 받도록 되어 있는 감정의 여러 가지 종류에 불과하며, 외부 사물의 영향을 받을 때는 동일한 방식으로 영향을 받도록 되어있다. - P179

모든 해악의 최선의 치유책은 운동을 하거나 노동을 하는 것이다. - P194

하지만 - 이상하게 들릴지는 몰라도 - 우리도 종종 자신이 어떤 관념을 가지고 있는지 혹은 어떤 주제에 대해 도대체 관념 자체를 가지고 있기나 한지조차 모를 때가 있다. - P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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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와인에 빠져들다
로저 스크루턴 지음, 류점석 옮김 / 아우라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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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집어든 단 하나의 이유는, 철학자가 와인에 관해서 썼기 때문이었다. 와인은 먹는 것이다. 먹는 것은 비평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 대체로 그런 것 같다. 어느 미디어를 둘러봐도 이른바 ‘먹방’은 가장 흔한 컨텐츠가 되었다. 먹방에선 품평이 빠지지 않는다(대체로 좋게 포장하는 쪽으로 거짓말을 하는 경향이 문제일 뿐이다). 이른바 음식에 대해 평가한다는 사람들은 넘쳐나고, 이들 중 몇몇은 전국적 유명인사가 되기도 했다. 모든 사람들이 맛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면, 사람들은 분명히 먹는 것을 비평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이런 비평들이 과연 철학적 정당성을 얻을 수 있을까? 맛에 관한 철학적 담론은 가능한 것일까? 이는 당연히 제기되는 질문이다. 좋은 그림에 대한 철학적 기준은 대체로 어느 정도 표준이 잡혀있다. 이 표준들, 또는 이런 표준에 대한 연구를 우리는 대체로 미학이라고 부른다. 미학에 관한 철학자들의 글은 넘쳐난다. 그림에 비해 적은 편이긴 하지만 좋은 음악의 기준에 대한 철학적 연구도 그럭저럭 찾아볼 수 있다. 나는 한때 아도르노라는 철학자를 좋아했는데, 그는 근대성의 파괴와 합리성의 전복 그리고 상품화할 수 없는 난해함을 표현하는 노래가 최고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재즈를 매우 싫어했다, 같은 입장들. 하지만 맛에 관한 철학책은 정말 찾기 어렵다. 심지어 맛이라는 영어단어(taste)조차도 미학적 태도 전체를 아우르는 ‘취향(taste)’이라는 의미로 쓰이면서, 맛의 철학은 그 자리를 잃어간 것만 같다.


스크루턴의 글에서 나는 이 잃어버린 ‘맛의 철학’을 어렴풋하게 넘볼 수 있었다. 맛은 와인이라는 대상의 파생물이 아니라 맛 자체가 독립된 대상이다. 하지만 맛은 그 자체로 드러나는 것이 아닌, 다른 관념들과의(특히 다른 맛들과의) 연관성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다른 미학적 대상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취급되어야 한다.


그래서 직접 철학적인 개념들을 동원하는 부분보다는 오히려 각 지역의 와인에 관해 짤막하게 설명하는 2장의 내용이 무척 흥미롭다. ‘맛’을 다루는 철학적 방식의 한 사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가 직접 쓴 단어는 아니지만) 와인을 철학적으로 다루는 방식은 ‘총체성’이라는 개념으로 집약될 수 있을 것 같다. 그 독특한(즉 고유한) 맛을 만들어내는 데 동원되는 자원은 객관적 방식으로 계측이 불가능한 요소들로 가득하다. 토질이 그렇고, 포도의 품종이 그렇고, 그 포도가 그곳에 흘러들어오기까지의 역사가 그렇고, 와인을 만들어내는 방식 - 오크통 나무의 재질이라든가, 숙성의 기간이라든가, 대충 넘어가는 화학적 변화라든가 등등 - 이 그렇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능숙하게 지적으로 다룰 줄 아는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이야말로 와인의 총체성을 제대로 ‘느낄’ 줄 아는, 이 세계 속에서 매우 독특한 지위를 지닌 개체들이다.


그럼에도 총체성이라는 말처럼 애매한 말이 또 없다. 이 글 전체에서 ‘와인’이라는 자리에 다른 것을 넣는다면, 예를 들어 탁주(혹은 청주나 소주)라든가, 맥주라든가, 위스키라든가, 코냑이라든가, 하는 대체어를 넣는다면 와인과 완전히 다른 담론이 탄생할 수 있을까? 설사 달라진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총체성에서 다른 것이 아니라 제작과정이라든가 탄생설화와 같은 부분적인 어떤 것에서 달라질 뿐일 것만 같은 불안함이 엄습한다. 결국 그래서 ‘그건 맛있어요?’라는 질문에 ‘네, 맛있어요’라거나 ‘아몬드 향에 태운 오크 통의 향이 살짝 덧입혀져서 구수한 부르고뉴 와이너리의 전통이 영국 신사의 깔끔함과 섞인 절묘한 블렌딩이로군요!’ 따위의 알듯말듯한 말들만 늘어놓게 되지 않을까. 스크루턴 또한 이것을 알고 있는 것인지 ‘경계의 존재론’ 같은 표현을 사용하다가도, 짐짓 모르는 척 허세가 섞인 (것 같아 보이는) 말들을 풀어놓곤 한다.


여전히 맛의 철학이 흥미로운 이유는, 미지의 영역인데다가 어디에선가 표준적인 모형을 배울 방법도 경로도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이 책조차도, 뭔가 본격적인 것 같지만 예비적 시도 이상으로 더 나아가지 않는다. 이 책에 인용된, 같은 주제를 다룬 다른 책들이 무척 보고싶어졌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분명히 있다. 이 책의 저자인 스크루턴이 다른 술에 대해서 얕잡아볼 정도로 와인을 무척이나 사랑한다는 사실 하나가 있다. 맥주가 취향인 나로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언사들을 마구 남발하는데, 예를 들어 쇼펜하우어가 이상한 저서를 쓴 이유가 와인이 아닌 맥주를 좋아했기 때문이라든가 하는 것들. 또 다른 분명한 사실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멋드러진 묘사 속에서 살아숨쉬는 와인들을 한 번쯤은 맛보고 싶어졌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 소개된 와인들 대부분은 한 병 가격이 10만원을 넘어가는 비싼 물건들이라 나는 그저 침만 흘릴 뿐이다…)

와인은 위스키의 해독제다. - 토머스 제퍼슨 - 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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