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안녕하세요, 지금부터 여러분의 음악공부를 시작하겠어요.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음악이란 무엇인가 한 마디로 설명을 해보겠어요. 음악이란 사람의 감정과 사상을 나타내는 시간적 예술이라고 하죠. 즉 아무리 아름다운 음악이라도 시간만 지나면 다시 들을 수 없는 것이란 뜻이겠죠. 여러분은 들어서 잊지 말고 영영 머리 속에 기억해야겠죠?”


루소의 <언어의 기원에 관한 시론>을 읽으면서 머리 속을 내내 맴돌았던 이 구절은, 내가 정말 좋아하는 음반인 디제이 소울스케이프의 첫 앨범 첫 트랙에 샘플링된 음원에서 나오는 강연이다.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정의이겠지만, 생뚱맞게 언어의 기원에 관해 다루면서 음악 이야기가 생각이 났는가 하면, 언어의 기원에 관한 루소의 관점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이 가진 신체적 조건을 이용해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의 정념(감정)을 표현하려 애쓴다. 이것이야말로 진짜 언어의 기원, 루소의 표현을 빌면 보편언어의 기원이다. 이 보편언어는 시각언어인 몸짓과 청각언어인 (목)소리로 나눠지는데, 이 둘의 대립은 현대인이 사용하는 언어의 핵심적 특성을 파악하는데 매우 유용한 구도(라고 루소는 생각하는 것 같)다.


사람들은 이 둘 중에 청각언어가 정념을 전달하는 데 더 적합하다고 생각해 이를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채택한다. 이 단계에서 소통이란 곧 정념의 전달과 이해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몸짓은 단번에 전체적으로 파악이 가능하고, 정적이다. 반면 목소리는 차분히 계속 듣고있어야 하는 유동적 매체이기에 반복을 통한 점진적 증폭과 고양 즉 정념(의 폭발)에 잘 대응한다.


인간은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모든 신체적 수단을 동원해 (목)소리라는 물리적 동요를 만들어낸다. 여기에는 자음간, 모음간의 차이 뿐만 아니라 억양, 성조, 성문, 음량 등 소리와 관련해 인간에게 주어진 모든 가능성이 포함된다. 이 측면에서 루소는 최초의 인간언어에 “운문과 노래와 말은 구별되지 않았다”고 자신있게 말한다. 그리고 나도 여기에 동의한다.


그에게 노래와 말(현대적 언어)의 분리는 필연적 퇴보의 과정이다. 말이 노래로부터 떨어지면서, 정념을 전달한다는 (목)소리의 본래적 기능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또는 사람들이 모여 살고 사회가 점점 더 복잡해지면서 정념을 전달하는 (목)소리의 기능이 점점 그 설 자리가 축소되면서 말이 노래로부터 떨어져나온 과정이기도 하다. 이 둘은 서로를 반복하며 상호간의 분리를 심화시킨다. 이 과정이 완성되는 현대에 이르러 언어는 밋밋하고 평평하고 지루하고 퉁명스러워졌으며, 기껏해야 형식적 추론의 도구로 전락해버렸을 뿐이다.


내게 이런 분석은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지금은 약간 시들하지만, 한때 정말 몰두해서 생각했던 주제인 ‘랩이라는 형식의 참신함과 문학적 의미’에 대한 논리를 한 가지 제공해주었기 때문이다. 글로 쓰여진 말에 대한 루소의 무자비한 비난과 마찬가지로, 랩 또한 그걸 문자화했을 때는 별 감흥이 없다. 이런 가사를 갖고 어떻게 라임을 쓰느니 내지는 이런저런 모음들을 조합해놓았으니 개쪄는 라임이라느나 하는 쓸데없는 분란만 생길 뿐이다. 한국에 힙합이 제일 처음 들어올 때의 풍경이기도 했고… 어쨌든, 모든 노래가사가 그렇긴 하지만, 특히 랩은 입말로 올리지 않았을 경우와 실제로 소리낸 경우 사이의 간극이 꽤나 크다. 이걸 아주 절묘하게 잘 하는 사람이 랩을 잘 하는 사람이기도 하고. 이 관심사가 제일 앞에 소울스케이프의 첫 트랙을 인용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18세기의, 그것도 모든 분야의 비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아니려나?) 철학자의 (뇌내망상 모음집애 가까운) 책이기에 갖는 한계들이 있을 것이다. 물론 나도 비전문가라서 사실과 다르거나 이후의 연구에 의해서 거짓으로 판명난 편견들을 하나하나 집어낼 순 없지만… 왠지 여기에 쓰인 내용들이 거의 모두 사실이 아닐 것이라는 느낌적인 느낌이 있다. 무근거의 그럴듯한 썰을 잘 푸는 학자라는 인상도 갖고 있어서 더더욱 그렇다. 그래서, 새롭고 신기하고 그럴싸한데다가 여기저기 써먹기 좋은 어떤 관점을 제시한 부분에선 (적어도 내겐) 성공적이었지만, 실제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또 다른 좋은 책이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자연적 진보를 통해 모든 문자언어는 명료성을 획득함으로서 성격의 변화를 겪게 되고 힘을 잃게 된다. - P57

분절과 목소리만 있는 언어는 반 정도만 풍성하다. - P98

폭식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만을 지배하는 악덕일 뿐이다. - P117

그리스에 소피스트들과 철학자들이 득실댈 때부터, 유명한 시인과 음악가들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 P139

어떤 국민이 자유롭게 살 수 없도록 하려면, 노예의 언어를 말하게 하라. - P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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