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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고와 아름다움의 이념의 기원에 대한 철학적 탐구
에드먼드 버크 지음, 김동훈 옮김 / 마티 / 2006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어떤 것이 아름답다면, 이유는 무엇일까? 버크는 여기에 대해서 시원한 답변을 주지 않는 것 같다. 길게 무언가를 써놓았지만, 그의 결론을 한 줄로 압축하자면 “원래 그래”다. 버크가 직접 애써 설명하듯, “저것은 왜 아름다운가?” 라는 질문은 “소금은 왜 짠가?”라는 질문과 똑같다. 철학사적 맥락을 끼워넣자면, 갈릴레이와 로크로부터 시작된 제1성질과 제2성질의 구별, 즉 물리적 성질과 인간의 정신과 상호작용을 일으켰을 때에만 발생하는 특성의 차이에 관한 설명이 개입해야 하는 부분이다. 소금의 분자구조를 분석한다고 쓰다는 특성이 나오지 않듯, 아름다운 대상들을 물리학적으로 분석한다고 아름답다는 특성이 나오지 않는다. 버크는 이 논리적(인간적?) 한계를 쿨하게 인정하고 “원래 그런 것들”에 대한 가능한 한도 내에서의 일반화를 시도하는 대안을 택한다.
그의 답변은 이렇다. 숭고함을 자아내는 대상은 거대하고, 반복적이고, 불투명하고, 강력하고, 난해하다. 이런 대상들을 대면하는 인간은 생명의 위협에 직면하지만, 그런 대상들이 실제로 피해를 입히지 않을 경우(예를 들어 호랑이는 거대하고 강력하고 피해를 주지만 거대한 회랑 건축물은 거대하고 반복적이지만 피해를 주지 않는다) 독특한 안도감을 느낀다. 이 공포와 안도감을 오가는 상태가 숭고다. 반면 아름다운 대상은 작고, 완만하고, 부드럽고, 파악가능하며, 연약하다. 그는 수학적 비례에서 아름다움을 찾거나 아름다움은 완전성의 일부라고 주장하는 다른 학자들의 입장을 비판하며 이런 특성들을 찾아낸다. 인간은 이런 특징을 지닌 대상들을 만났을 때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그리고 이 사랑의 대상은 그 대상이 품고 있는 이런 사랑스런 특성들이다.
어찌보면 다소 싱겁고 뻔한 답변들이다. 아름다움에 관한 논의가 이렇게 간단하게 끝나고 되나? 뭔가 더 심오한 것은 없는 것일까? 게다가 아직 지금만큼 과학이 발달하지 않은 시기라 사실관계에서도 이상한 설명이 많다. 설탕 알갱이는 구형이라 달다든가 하는 이상한 발상들 같은 것 말이다. 받아들이는 게 맞을까? 잘은 모르겠다. 그럼에도 나는 꽤 괜찮은 태도라고 생각하는데, 겸손하고 솔직하기 때문이다. 괜히 어려운 개념이나 불투명한 용어들을 사용하면서 젠체하는 것보다는 낫다. 문제는 그 개념과 용어를 사용해서 젠체해온 것이 플라톤 이래로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답변하려 애써온 철학자들 모두의 노력인지라, 버크식 접근법은 그 전통 전부에 대한 완전한 부정이나 폐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겠지만.
그럼에도 그 과정에서 버크가 내놓은 몇몇 아이디어들은 신선했다. 무엇보다도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발상은, 모든 감각이 서로에서 어느 정도씩은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 아이디어를 감각들 사이의 유비논증을 사용해 입증하려고 하거나, 당연한 사실로 간주하고 활용한다. 가령, 이런 특성 때문에 우리는 “스윗하다”는 표현을 음식에도 쓸 수 있지만 사람의 특성이나 행동의 특성에도 쓰고 좋은 노래에도 쓸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가끔 “우리가 오감이라고 하지만, 이들이 정말로 어떤 분리된 감각들일까?”라는 헛된 생각을 하곤 하는데, 이런 발상을 있어보이게 표현할 좋은 참고서적을 얻은 셈이다.
아름다움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예술작품 - 넓은 의미에서의 인공물 - 이야기 만큼이나(어쩌면 그보다 훨씬 더) 자연물 이야기를 하는 것도 한번쯤은 곱씹어볼만하다. 아름답다는 것이 가치있는 다른 특성들(도덕적으로 착하다, 유용하다, 진실되다 등)과 분리되는지 그렇지 않은지도 철학적 논의거리이지만, 그만큼 인공물에서의 아름다움 또는 더 좁은 의미에서 예술작품에 고유한 아름다움이 있는지 묻는 문제 또한 미학의 핵심적 주제 중 하나일 것이다. 이 부분에서 버크의 입장은 단호하다. 인공물에서 사람들이 아름다움을 왜 느끼는지 탐구하기 위해선 자연물에 대한 인간의 반응을 반드시 탐구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대체로 사람들에게 널리 퍼져있는 아름다움의 “자연적” 과정을 알 수 있고, 인공물의 아름다움은 그 과정의 반복일 것이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한다. 정말 그럴까? 맞는 말인 것도 같다. 아름다운 사람을 보는 느낌과 아름다운 사람을 본뜬 조각을 보는 느낌은 크게 다를까? 설사 다르다고 하더라도 후자는 부차적이고 부가적인 요소를 갖고 있다고 버크는 볼 것이다.
또 내가 이 책에서 주목한 논의는 5장, 시적 언어에 관한 부분이다. 그는 의사소통으로서의 언어가 아니라 시적 용법으로서의 언어가 오히려 언어에 더 본질적이라고 주장한다. 의사소통을 위해선 의미가 언어 사용의 중심에 있어야 한다. 이 생각은 상식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버크는 반대로 우리의 일상적 언어사용조차 시적인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언어를 사용해서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전달하기 때문이란다. 다른 사람의 말을 통해서 우리가 듣는 단어들에 해당하는 표상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검토하기에 우리의 대화의 속도는 너무나 빠르다. 그가 보기에 실제로 그렇게 반복적으로 표상을 떠올리며 의미를 하나하나 찾아가면서 언어생활을 하는 사람이 오히려 드물다. 이것이 예술로서의 언어, 시적 용법으로서의 언어가 가능한 근거라고 버크는 주장한다. 만약 이것이 불가능하다면, 또는 사람들이 언어를 의미로서만 사용하려 들었다면, 비트겐슈타인의 말마따나 모든 시들은 “무의미한 말들”, 가치없는 낭비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름다움과 숭고는 사랑과 공포 즉 감정의 문제이기에, 우리는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모든 표현에서 독특한 미학적 경험을 갖게 되는 것이다.
여튼, 그래서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온다. 대체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버크가 내놓지 못한 답변을 나라고 명쾌하게 내놓을 재주는 없다. 더군다나 앞에서 쓴 것처럼, 버크 자신도 이것이 답변불가능한 질문이라는 점을 재빠르게 인정하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버크는 이 질문이 사람들의 흥미를 끄는 질문이라는 점 만큼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왜냐면 “명확한 관념이라는 말은 보잘것없는 관념이라는 말과 동의어이기 때문이다.”
PS. 예전에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을 읽다가 포기한 적이 있어서, 어렵지 않을까 읽기 전에 많이 걱정했다. 다행히도 술술 읽힐 수 있도록 많이 배려된 번역이었다. 버크의 원문을 살린 것인지는 대조하면서 읽어봐야 알겠지만, 내겐 그럴 능력이 없다 ㅠ.ㅜ
어떤 사물을 선명하게 본다는 것은 그 경계를 인식한다는 것과 같다. 따라서 명확한 관념이라는 말은 보잘것없는 관념이라는 말과 동의어다. - P112
소유하고 있을 때는 우리에게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지만 없을 때는 강하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습관을 통해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사물들의 특징이다. - P157
우리의 감각들 사이에는 어떤 연결고리가 존재한다. 우리의 감각들은 다양한 대상들에 의해 영향을 받도록 되어 있는 감정의 여러 가지 종류에 불과하며, 외부 사물의 영향을 받을 때는 동일한 방식으로 영향을 받도록 되어있다. - P179
모든 해악의 최선의 치유책은 운동을 하거나 노동을 하는 것이다. - P194
하지만 - 이상하게 들릴지는 몰라도 - 우리도 종종 자신이 어떤 관념을 가지고 있는지 혹은 어떤 주제에 대해 도대체 관념 자체를 가지고 있기나 한지조차 모를 때가 있다. - P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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