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드는 맛
존 릴런드 지음, 최인하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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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릴런드의 『나이 드는 맛』을 읽었다. 60대에 접어들어 80대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미국의 저널리스트가 80대 후반에서 90세를 넘긴 노인 6명을 1년 동안 취재한 뒤 쓴 기사를 엮은 책이다. 취재원들은 퇴행성(노인성?) 질환을 몇 개씩 안고 있고, 건망증과 치매의 경계를 오가는 지적인 상태를 보이기도 한다. 취재가 끝난 직후 두 사람은 실제로 죽기도 했다. 그만큼 이 책에 등장하는 노인들은 말 그대로 죽음을 눈앞에 둔, 내일 죽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사람들이다. 영어로는 oldest old라고 한다는데, 나이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나이많은 사람들이라니 재미있는 표현이다.


그런데 작가는 이들을 취재하면서 행복에 관해 알아보고자 한다. 이상한 조합이다. 인간에게 최고의 불행이라 여겨지는 죽음, 그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을 취재하면서 그 속에서 행복의 조건을 찾아가겠다고 하니까. 더군다나 노인으로 분류되긴 하지만 아직까지 사회적 지위가 있고 활동하는 것에 전혀 무리가 없는 사람들, 정정한 6~70대들을 대상으로 “젊게 살 수 있어요!” 따위의 말을 들으려는 것이 아니기에 더더욱 그렇다. 젊게 살기엔 너무나 나이들어버린 사람들, 우리가 일상이라고 부르는 최소한의 활동조차 버거운 사람들이기에, 이 둘을 한꺼번에 연상하기 쉽지 않다.


이런 상식적인 태도에 대해서 작가는 단호하게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고, 오히려 자신이 취재한 초고령층 노인들이 보여주는 삶의 방식을 배워야 진짜 행복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책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오늘에 충실하려고 한다. 가족들을 만나고, 다시 사랑에 빠지고, 지나간 날을 추억하고, 해왔던 일을 계속 한다. 반대로 이들에게 미래에 대한 계획은 보이지 않는다. 내일 죽어도 이상하지 않으니, 앞으로 무언가를 해야한다고 구상하는 것은 이들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여러 거창한 계획을 세웠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실천할만한 신체적 능력이 없기도 하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이들이 현재에 충실한 방식이란, 내가 좋아하는 것들 중 할 수 있는 것을 얼른 찾아서 지금 당장 실행에 옮기는 것이다.


작가에 따르면, 미래에 기대를 투영하고 그걸 이뤄냈는지에 따라서 기뻐하거나 실망하는 것은 젊은 사람에게 주어진 특권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동시에 모든 불만족과 불행의 원천이 된다. 자신이 “지금” 진짜로 하고 싶은 것, 진짜로 해야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지 못하게 만들고,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함으로써 “미래에는” 그 비교대상들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한다. 이런 태도는 번영이나 부를 가져다줄 순 있겠지만, 행복을 가져다줄 순 없다. 이렇게 우리는 노인으로부터 행복을 배울 수 있다.


노인이 행복을 잘 성취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원천은 경험이다. 크나큰 불행이 닥쳤을 때 그것을 마냥 외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현실적으로 그 일을 잘 처리하고 감정적으로 감내하는 자세도 필요하다. 이런 부분에서 노인은 분명 강하다. 한 사람의 긴 삶에는 다양한 굴곡이 있고, 현명하게 역경을 대처하는 방법을 익힐 기회 또한 젊은 사람들에 비해서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책에서 나온 말마따나, “대공황을 겪은 사람들에게 서브프라임 금융위기는 그럭저럭 견딜만한 사건이었다.” 더군다나, 친구와 가족을 죽음으로 잃어버리고 남은 사람들에게, 그 어떤 사건이 더한 충격으로 다가올 수 있을까.


이 책을 읽으며 자연스레 내가 보았던 초고령층 노인의 기억을 떠올려보았다. 중학교 다닐 때 80대 중반의 나이로 돌아가신 친할머니와, 현재 80대 중반으로 하루에 한 번씩 노인정을 가신다는 외할머니다. 대체로 할머니들과 별로 친한 편이 아니라서, 이 책에서 나오는 질문들을 던질 기회도 없고 자신도 없다. 그럼에도, 내가 보았던 친할머니의 마지막 몇 년은 그다지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사람들과 상태는 비슷한 것 같지만(약간 더 심각했나?), 처지는 훨씬 더 열악했다. 거동이 불편한 몇 년간 친할머니는 내 가족들에게 부담이었다. 열 걸음 남짓 떨어져있는 화장실까지 가는 데 보행기의 도움을 받아도 10분은 족히 걸렸다. 부모님은 맞벌이에 나는 낮 시간엔 학교에 있다가 저녁 늦게나 집에 들어가니 거의 항상 혼자 남겨져있었다. 할머니는 할머니대로 우리의 대우에 불만이 많았(던 것 같)다. 무언가를 요구할 땐 항상 소리를 질렀고, 나는 짜증을 냈다. 이 책에 나온 “노인의 행복비법” 같은 것은, 최소한 그 당시엔 내 집엔 없었다. 반면 외할머니는 다소 힘들어하시긴 하지만 버스로 서울-부산을 분기에 한 번씩은 왕복하기도 하고, 시간이 나면 아파트 노인정에서 새로 사귄 친구들과 지낸다고도 하시니 다행이라면 다행이겠다.


이 책에 나온 노인에 관한 이야기를 보면서, 마지막으로 들었던 생각은 이렇다. 세계가 변하는 속도는 점점 더 빨라져서, 노인의 지혜 같은 것을 말할 수 있는 영역은 정말 많이 줄어들었다. 그럼에도 그들이 여전히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의미있는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면, 그건 그 사회가 노인들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주기 때문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취재원 6명 모두는 양로원과 집을 왔다갔다 하고, 필요할 때에 간병인을 부를 수 있고, 일정한 범위 안에서 무상으로 의료비용과 생활비를 지원받는다. 이런 공적 지원은 한 사회의 구성원인 ‘인간으로서’ 노인의 사회적 삶을 늘린다. 반면 내가 주변에서 보아온 대한민국의 노인의 삶에 이런 토대가 있는가, 묻는다면 고개를 저을 수 밖에 없다. 부양의 책임은 온전히 가족에게 돌아가고, 모시지 않는 가족에게 불효의 딱지를 붙여 함께 사는 가족에게 스트레스만 쌓이게 만든다. 돌봄에 참여하는 사람이 대부분 여성이라는 점에서, 성평등의 문제와도 얽혀있고, 실제로는 모두가 일하느라 다들 바쁜 상황에서 노인은 집에 홀로 남겨지기에 사회로부터 사실상 고립된다. 이런 식으로 생명만 어찌어찌 연장하는 것이 과연 행복일까, 라는 생각을 나는 내 친할머니를 보면서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책의 요점만은 간단하다. 현재를 살아라, 할 수 있는 것을 찾아라, 능력 밖의 사건들과 통제할 수 없는 흐름에 동요하지 말아라. 미래가 없는 상태에 다다라야만 이런 깨달음을 얻어 진짜 행복을 찾게 되는데 그 행복을 만끽할 시간이 너무나도 짧다는 것, 아마 이것 자체가 어쩌면 인간이 짊어져야 할 가장 무거운 짐이 아닐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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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균 쇠 (양장) - 무기.병균.금속은 인류의 운명을 어떻게 바꿨는가, 개정증보판
제레드 다이아몬드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사상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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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동안 마음의 짐으로 붙잡고 있던 과제를 끝냈다. 그 이름의 유명세만큼 두께도 어마어마한 제러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를 드디어 완독한 것이다! 양장의 압박, 자비없는 줄간격, 끊임없이 쏟아지는 정보에, 열 페이지 스무 페이지씩 읽은 뒤 덮어놓고는 한창 딴짓을 하다가 다시 펼쳐들기를 반복한지 벌써 한 달이나 지났다. 대여기간 연장까지 해놓았던 도서관에 이 책을 반납하려 하니, 카운터에 앉아있던 직원은 “연체하셔서 3일 뒤인 7월 7일부터 도서 대출 가능합니다.”라고 사무적으로 말했다.


두께나 정보량에 비해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 내용은 몇 문장으로 줄일 수 있다. 국가나 민족 간에 생겨나있는 현재의 차이는 생각보다 아주 오랜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는 것, 농사를 빨리 짓고 가축을 빨리 키우기 시작하면 식량생산성이 비약적으로 올라가 대규모의 인구부양이 가능해진다는 것, 그러면 식량 생산을 하지 않고 다른 일에만 종사할 수 있는 사람들이 생겨난다는것, 이들이 전문가 집단이 되어 “쓸데없는” 것들에 몰두하면서 문자와 기술과 정치가 고도화된다는 것, 이렇게 발달된 문명과 대규모 인구가 상호 상승작용을 일으킨다는 것, 그 과정에서 동물에 있었던 각종 질병이 사람에게 옮겨가면서 새로운 방비/면역체계가 만들어진다는 것, 마지막으로 이 과정을 이미 거친 사회와 그렇지 않은 사회가 만났을 때, 전자가 항상 후자를 대체한다는(정복이든 융합이든) 것이다.


그런데 농경과 가축을 시작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은, 다른 어떤 것도 아닌 처음 자리잡은 지역의 기후다. 먹을만한 식물과 동물이 이미 있고 인간의 노력으로 적당히 개량할 수 있으면 된다. 쌀과 밀과 보리와 소와 돼지는 그렇게 먼 옛날에 인간에게 선택되었다. 아무리 개인이나 집단이 머리가 좋아도, 누군가의 아이디어로 시대를 뛰어넘는 엄청난 기술이 나와도, 농경과 가축의 벽을 넘지는 못한다. 또한 대부분의 기술은, 그 기술을 받쳐줄 다른 기술이 개발되어있지 않으면 놀이문화나 신기한 도구 정도로 간주되다 곧 잊혀지고 만다. 그래서 지역 또한 문화와 기술의 수준을 순차적으로 반영한다. 문제는, 안타깝게도 이 세상에 지금까지 태어났던 그 어떤 사람도, 그리고 앞으로 태어날 모든 사람도 자기가 태어날 곳을 골라서 태어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취향에만 맞는다면, 이 책의 내용을 아주 재미있게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다. 바로 게임 <문명>을 하는 것이다. 문명은 국가경영 시뮬레이션 게임이다. 기원전 4000년에서 시작해 기원후 2050년에 끝나는데, 그 동안 플레이어는 지도 위에 도시를 건설하고 기술을 개발하고 인구를 부양하고 군대를 양성해 세력을 확장하거나 생존해야 한다. 이들 중 하나라도 빼먹고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발전이 지체된 상태로 엔딩을 맞이하거나 아니면 전쟁을 선포해오는 다른 세력에게 멸망당하고 만다. 반대로 승리 조건도 다양하다. 문화적으로 번성한 국가가 돼서 다른 세력의 도시를 빼앗아올 수도 있고, 2050년이 되기 전에 모든 경쟁자들을 멸망시켜서 승리할 수도 있으며, 처음으로 우주선을 만들어 쏘아올려 승리할 수도 있고, 마지막 턴이 끝난 뒤에 가장 인구가 많거나 번성한 도시가 많아도 승리한다.


그런데 잘 성장하는 세력이 되기 위해 제일 중요한 것은 최초의 입지다. 쌀, 밀, 소, 돼지, 양 등 식량에 보탬이 되는 특수자원과 가까운 적당한 언덕, 적당한 평지에 먼저 자리를 잡으면, 경쟁자들보다 더 빨리 성장할 수 있다. 반면 사막에 떨어지면 식량이 없어서 성장할 수가 없다. 정글 한 가운데 떨어지면 주변을 개발하기 위해 나무를 벨 수가 없어서, 철기 기술을 발명할 때까지 기다릴 수 밖에 없다. 섬에 자리잡으면 내가 사는 땅에는 자원이 얼마 없고, 배를 만들어 주변으로 진출할 때까지 발전을 기다려야만 한다.


문제는, 내가 부모를 골라서 태어나는 게 아니듯, 내가 어느 곳에 자리를 잡을지 초기에 선택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지도의 특성과 자원분포를 평준화시킨 뒤에 시작하거나, 저장된 데이터를 편집하는 등의 방법이 있긴 하지만, 공정하지도 않고 우리의 삶과 비슷하지도 않으므로 제쳐둔다). 그렇다고 원하는 곳을 오랜 시간 찾아 헤메다보면 동물에게 잡아먹히는 일도 생기고, 최초의 도시를 너무 늦게 세우게 되면 경쟁자들에 비해 시작시점이 뒤쳐지니 그걸 따라잡는 노력도 만만치 않다. 특히 게임 플레이 초기의 기술격차는 곧바로 군대의 격차로 이어지기 때문에, 빨리 자리를 잡지 못하면 초기에 컴퓨터 경쟁자에게 정복당해 게임오버당하기가 너무 쉽다. 운나쁜 곳에 자리잡고 열심히 해봤자, 나는 이제 막 중세시대 왕정에 들어서서 말 탄 기사를 겨우 만들기 시작할 때 저 멀리서 미국 해병대와 탱크가 공격해오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총, 균, 쇠』는 이렇게 게임에서나 나올법한 ‘문명 사이의 충돌’이 벌어졌던, 또는 벌어졌던 것으로 추정되는 역사적 사건들을 계속 보여준다. 농경을 시작한 남중국 지역의 사람들이 필리핀과 인도네시아를 거쳐 태평양의 섬 전역으로 퍼진 과정, 농경과 문자와 관료제를 가장 처음 만든 서남아시아 사람들이 주변으로 기술과 정치제도를 전파하는 과정, 그리고 이런 사건의 정점에 있는 유럽인의 아메리카 정복 과정까지. 제일 마지막 사건을 제외한 나머지는 역사 시대 이전에 벌어진 사건이기 때문에, 그 과정을 합리적으로 추정하기 위해 고고학/지리학/생물학/언어학 등 다양한 연구 성과를 동원했다. 책을 쓴 다이아몬드는 이것을 “역사의 과학적 연구”라고 부르고 있었다.


아주 재미있게도, 우리는 그 “과학적 역사연구”를 현대과학기술이 집약된 컴퓨터를 통해 게임으로 접할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게임 속 장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대체로 내가 패배하던 순간의 화 나는 장면이긴 했지만. 그렇다면, 역사에 관한 과학적 연구성과를 알기 위해서 우리에게 놓인 선택지는 두 가지인 것 같다. 하나는 700페이지에 달하는 책을 한 달 동안 붙들고 있는 것. 다른 하나는 스팀에서 문명을 다운받고 한 달 동안 “문명하시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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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크 2022-07-31 0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리하시는 글솜씨와 해박함이 놀라워요. 혹시 왓챠피디아나 인스타그램 등으로 독서록 남기시는 계정이 있다면 알고 싶습니다.

박효진 2022-08-02 21:38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이 블로그가 제 독서록을 만드는 계정이고, 다른 곳은 이용하고 있지 않습니다.
 
[eBook] 사랑의 이유
해리 G. 프랭크퍼트 지음, 박찬영 옮김 / CIR(씨아이알)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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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은 평생에 걸쳐서 가족, 동반자, 반려동물, 친구들, 그 밖에도 다양한 것들을 사랑한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우리는 그 사랑의 대상과 함께 있고 싶고, 좋은 것을 주고 싶고, 나쁜 일은 겪지 않았으면 하고 바란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왜 이런 마음을 갖고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일까. 또 누군가를 더 잘 사랑하는 법, 올바르게 사랑하는 법은 무엇일까. 해리 프랭크퍼트는 '사랑' 개념에 관한 철학적 분석을 통해 이 문제에 대해 답변하려 한다.


사랑이란 무엇일까? 이 질문에 올바르게 대답하고 난 뒤에야 우리는 사랑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프랭크퍼트의 답변은 '사랑의 정의는 불가능하다'다. 사랑은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가장 근본적인 상태이기 때문에, 다른 개념을 통해서 사랑을 정의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사랑은 개념을 통해 정의되지 않고, 세계의 사태를 직접 지시하는 방식으로 정의된다. 그 사태란, 어떤 개별적인 대상에 우리가 마음과 신경을 쓰는 상태다.


이 설명을 통해 그는 사랑에 관해 중요한 점 두 가지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첫째는 사랑하는 마음이 가치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어떤 대상의 가치를 알아보고 그걸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만, 프랭크퍼트가 보기에 이런 인지적 활동은 사랑이 아니다. 오히려 무언가에 마음과 신경을 쓰는 순간 그 대상의 가치가 가시적인 것으로 드러난다. 둘째, 사랑은 도덕보다 인생에서 더 중요한 요소다. 흔히 도덕적 판단이 한 쪽으로 쏠리지 않고 공평하게 판단할 것을 요구하고, 이런 의미에서 사랑에 반대된다. 이는 사랑을 편파적 태도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랭크퍼트가 보기에 이런 접근은 잘못된 태도다. 인간의 일상적 경험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지도 않을 뿐더러, 사랑이 대상의 가치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도덕적 판단을 아예 할 수 없는 상태에 놓이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왜 사랑에 빠지는가? 그 대답은 아무도 모른다. 최소한 이 질문에 대해서 철학적 답변은 불가능하다. 우리의 의지나 인지적 활동은 무엇과 사랑에 빠질지 결정하지 않는다. 서울에 사는 내가 캘리포니아에 사는 제인을 사랑하려고 의도할 수는 있지만, 제인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면 그 의도는 결코 실현되지 않을 것이다. 즉, 사랑의 대상을 결정하는 것은 상황과 환경과 여건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 대상과 반드시 사랑에 빠져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프랭크퍼트는 이것을 사랑의 우연적 필연성이라고 부른다.


사랑하는 대상을 어떻게 대하는가? 프랭크퍼트는 이 질문을 사랑하는 대상이 갖는 가치의 종류에 관한 질문, 즉 철학에서 전통적인 구별법인 수단으로서의 가치와 목적으로서의 가치에 관한 질문으로 바꾼다. 사랑은 수단인가, 목적인가. 만약 사랑을 통해서 더 좋은 무언가를 성취하고자 한다면, 사랑을 수단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좋은 일이 더 많이 생기길 바라는 것은 다른 목적의 수단이 아니고, 그 자체로서 궁극적인 목적이다.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하는 것으로 목적이 정해지면, 이 목적을 기준으로 행동의 전반적인 성향과 개별적 행동이 조직된다. 프랭크퍼트는 이런 방식으로 사랑이 우리를 불확실성으로부터 해방시킨다고 주장한다.


모든 사랑은 다 좋은 사랑인가? 이것이 프랭크퍼트의 마지막 질문이다. 대체로 사랑은 다 좋은 것처럼 보이지만, 자기를 사랑하는 것, 즉 자기애 또는 이기심은 대체로 비난의 대상이다. 이기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 자신의 욕구에 따라서만 움직인다. 때로는 자기파괴적이고, 또 다른 면에서는 겉으로 보기엔 이타적인 행위를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칭찬받고 싶고 보상받고 싶은 이기적인 마음이 있을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인간은 스스로에 대해 잘 모른다. 내가 이기적인 사람인지, 이타적인 사람인지, 그 행동을 했을 때 왜 그렇게 행동했던 것인지. 후회와 반성이란 바로 이런 종류의 무지의 징표다. 욕심과 자기기만과 무지, 이런 것들이 자기애의 이미지다.


그러나 프랭크퍼트는 이런 이기심은 진정한 자기애가 아니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자기애에 대한 나쁜 이미지를 버릴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만약 자기애가 나쁜 것이었다면, 성경에서 “자기를 사랑하듯 남을 사랑하라”라고 이야기하지 않고 “자기를 사랑하는 대신 남을 사랑하라”라고 이야기했을 거라고 썰렁한 농담을 던진다. 진정한 자기애란, 앞에서 이야기한 수단과 목적에 관한 구별을 다시 끌어들이면, 나 스스로를 목적으로 대하는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욕구나 이익에 휘둘리지 않는다. 사랑은 내 욕구나 이익을 충족시키는 수단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로지 사랑하는 대상이 잘 되길 바랄 뿐이다. 이것이 사랑하는 대상을 목적으로 대한다는 말의 의미다.


프랭크퍼트는 진정한 자기애를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에 비유한다. 부모는 아이들의 관심사를 모두 알지는 못하지만, 무엇에 관심을 가지는지 알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한다. 또 아이들이 진정으로 가치있는 것에 관심을 두기를 바라고, 그런 가치있는 것에 속하는 대상들을 끊임없이 제공한다. 진정한 자기애도 마찬가지다. 내가 실제로 어떤 대상에 관심이 있는지 생각해보는 것, 그저 예전부터 하던 행동만 습관적으로 반복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끊임없이 반성하는 것, 이전보다 더 나은 가치를 추구하게끔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려고 노력하는 것, 이런 것이야말로 진정한 자기애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에 관한 논의를 진행하면서 프랭크퍼트가 내놓는 사랑의 조건은 다음의 네 가지다. 첫째, 사랑하는 대상이 잘되는 것을 목적으로 둘 것. 둘째, 다른 대상에게 쏟는 관심과는 다른 종류의 관심을 가질 것. 셋째, 사랑하는 대상과 자신을 동일시해서 대상이 잘되는 것을 곧 내가 잘되는 것으로 생각할 것. 넷째, 사랑과 무관한 다른 동기나 의지를 제한하고 사랑과 관련된 의지에 따라서만 행동할 것.


프랭크퍼트에 따르면, 스스로를 이런 방식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몇 가지 특징이 나타난다. 목적이 분명하기 때문에 변화에 흔들리지 않고, 그 목적을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달성하기 위해 항상 고민하며, 모든 행동은 고민의 결과이기 때문에 그 이유를 항상 분명하게 설명한다. 즉, 진정한 자기애는, 내면의 갈등을 겪지 않는, 말 그대로의 통일된 인격체를 만들어준다. 그는 이렇게 자신의 내면이 단단한 사람만이 다른 사람도 진짜로 사랑할 수 있다는 설명도 덧붙인다.


『사랑의 이유』는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시작해서 인격을 완성하는 방법으로 끝나는 철학적 분석이다. 그래서 제목이 주는 기대감과는 다르게 실제로는 아주 밀도있는 논의가 포함된 윤리학 책이다. 사랑이라는 범위에 한정되지 않고, 우리의 행동과 관련된 다양한 요소와 원칙들을 논리적으로 검토한 결과를 담고 있다는 의미다.

의식의 완전한 동질화는 의식적인 경험의 중단과 전적으로 동등하다. 달리 말하면, 지루할 때 우리는 잠드는 경향을 갖는다. - P88

자기-사랑의 가치와 중요성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은 최소의 올바름조차 보증하지 않는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의 인생은 그 성실성 때문에 부러워할만하지만, 전혀 훌륭하지는 않을 수 있다. 사랑의 기능은 사람들을 좋게 만드는 일은 아니다. 사랑의 기능은 바로 사람들의 인생을 유의미하게 만드는 일이며, 그럼으로써 그러한 방식으로 인생을 살아가기 좋게 만드는 일이다. - P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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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개봉한 어벤저스 엔드게임을 보기 위해 마블 영화를 정주행하고 있었다. 아마도 시빌워였던 것 같은데, 캡틴 아메리카가 방패를 들고서 창문을 깨며 바깥으로 튀어나가는 장면 바로 다음에 땅으로 착지하는 장면이 나왔다. 그 장면을 보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캡틴이 10층에서 창문을 깨고 밖으로 나와 1층까지 뛰어내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난 캡틴이 10층에서 1층까지 내려오는 장면을 고스란히 본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랬다. 이것을 영화의 문법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야 하는지, 아니면 영화의 문법이 내게 그렇게 생각하게끔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해야할지.


영화에 익숙하지 않은 어떤 사람들과 세대들이라면 그런 고민을 할만하지 않았을까? 이른바 컷과 컷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는 미학적 탐구를 시작한 사람들은 매우 많았지만, 그 중에서도 아주 선언적이고 미래적이었던 발터 벤야민의 책은 이제 고전의 반열에 올랐다. 별다른 논증이 없다는 점만 빼놓으면, 그는 이미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선취했던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재미있는 발상과 표현이 많다. 대량복제가 지각체계 자체를 바꿔놓는다든가, 진본성의 요소인 아우라가 탈락한다는 이 책에서 가장 유명한 주장이라든가, 당대의 비평가들이 저지르고 있는 시대착오적 실수와 예술가들이 벌이는 미래의 강제적 도래에 대한 이해라든가, 기계가 깊게 침투할수록 지각에서 기계가 사라지고 현실성이 창조된다는 이야기라든가, 누구나 영화배우가 되는 시대에 사람들은 스타에 더욱 열광한다는 역설적인 상황에 대한 예언(또는 분석?)이라든가 하는 것들이 그렇다.


벤야민의 말처럼, 벤야민의 언어로는 당연하지 않았던 것들(그래서 도통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가 너무나 어려운 말들)은 우리 시대의 일상이 되었다. 어쩌면 벤야민도 자기가 표현하는 다다이스트들과 같이, 미래에는 너무 당연하서 질문조차 제기되지 않을 일들을 현재로 끌어오느라 애를 쓰다 어떤 한계에 부딪힌 것 같다. 그래서 그의 말투는 선언적이고 예언적이며 잠언적이고, 어떤 때에는 무슨 소린지 잘 모를 정도로 신비주의적인 향취까지 지니고 있다. 그 때의 언어로 쓰였으니, 이게 일상이 된 우리가 읽기에도 그 의미를 이해하기 힘든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가 싶고.


글을 읽다보면 부지불식간에 예술 개념과 매체의 변화는 정치와 연결된다. 예술의 사회적 중요성이 덜할수록 감상과 비평이 분리되는 반면, 우리 시대는 예술의 사회적 중요성이 넘치도록 강조된다. 그 강조점은 한 편으로는 예술이 자본에 종속되었기 때문이고, 다른 한 편으로는 기술의 발달로 인해 예술 자체의 의미가 정치적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내가 해석한) 벤야민의 주장인 것 같다. 그래서 자본에 종속된 예술의 종착점은 전쟁이고, 예술의 의미에 대한 정치투쟁의 종착점은 공산주의가 되는 것이다. 참으로 알듯말듯한 말이지만, 실제로 전쟁에 동원된 “예술적” 도구들에 대해 생각해보자면 벤야민의 예언이 헛소리는 아닌 셈이다. 그래서 나는, 현대 영화산업 자본의 총아인 마블 영화에 등장하는 캡틴 아메리카를 보면서 정신이 멍해졌다가도, 그가 체화하는 가치에 공감하면서 캡틴 아메리카를 해석하려는 정치투쟁을 하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공교롭게도, 벤야민과 캡틴 모두 파시즘을 자신의 적으로 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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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정의 사랑 아름다움 - 종교, 철학, 사랑, 예술에 관한 낭시의 쉽고 친절한 네 개의 강의 카이로스총서 23
장 뤽 낭시 지음, 이영선 옮김 / 갈무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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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면적으로 낭시는 이 책에서 신, 정의, 사랑, 아름다움이라는 서로 다른 주제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내가 생각했을 때(그리고 낭시도 의도한 것 같긴 한데) 이 네 가지 주제를 관통하는 더 큰 두 가지 테마가 있다. 열려있음과 관계라는 개념이 바로 그것이다. 네 개념 모두 단수성(고유성)으로서의 나와 타자가 관계를 맺는 방식에 관한 문제로 설명된다. 세계와의 관계(신), 올바른 관계(정의), 절대적인 관계(사랑), 규정할 수 없는 관계(아름다움) 정도로 정리할 수 있을까? 낭시에게 이 모든 관계는 “열려있는” 관계로 설정된다. 즉, 이 관계들에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관계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타자에 대한 절대적인 인정(또는 타자의 절대적인 존재에 대한 인정) 뿐이다. 사실 이게 제일 어려운 숙제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 인정에 기반해 우리는 고정된 관계가 아니라 다양한 소통의 창구를 통해 시간 속에서 그 관계를 지속적으로 만들어나간다. 이런 창조가 가능한 이유가 바로 낭시가 말하는 ‘열려있음’, 즉 규정되지 않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 정도가 책의 내용에 대한 전체적인 조망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추상적인 설명을 논외로 하면 이 책의 깨알포인트는 전혀 다른 곳에 있다. 바로 낭시의 짤막한 강연 이후에 이어지는 아이들의 질문 타임이다. 아이들의 질문이라고 하기엔 꽤 수준이 높아보이는 것도 있고, 정말 아이같은 질문도 있다. 그런데 이 질문들의 공통점은 그야말로 무시무시하다는 것이다. 역사상 존재했던 철학자들이 평생을 놓고 씨름한 질문들을, 정말 모르기 때문에, 그리고 답을 알고 싶기 때문에, 천진난만하게 던진다. 이 질문들 앞에 놓인 낭시는 (실제로 강연장에선 어땠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글로만 봤을 땐) 얘들한테 이걸 어떻게 대답해줘야할지 몰라서 진땀을 흘리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때로는 엉뚱한 (것처럼 보이는) 답변을 내놓기도 하고, 상당수의 답변에서는 아이들의 질문을 통해 강연에선 보여주지 않은 진지한 사색의 길을 걷기도 한다. 내가 그 현장에 직접 있었다면 정말 재미있게 웃으면서 지켜보며, 나 스스로도 아이들의 질문에 대해 깊게 고민해보았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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