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개봉한 어벤저스 엔드게임을 보기 위해 마블 영화를 정주행하고 있었다. 아마도 시빌워였던 것 같은데, 캡틴 아메리카가 방패를 들고서 창문을 깨며 바깥으로 튀어나가는 장면 바로 다음에 땅으로 착지하는 장면이 나왔다. 그 장면을 보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캡틴이 10층에서 창문을 깨고 밖으로 나와 1층까지 뛰어내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난 캡틴이 10층에서 1층까지 내려오는 장면을 고스란히 본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랬다. 이것을 영화의 문법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야 하는지, 아니면 영화의 문법이 내게 그렇게 생각하게끔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해야할지.
영화에 익숙하지 않은 어떤 사람들과 세대들이라면 그런 고민을 할만하지 않았을까? 이른바 컷과 컷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는 미학적 탐구를 시작한 사람들은 매우 많았지만, 그 중에서도 아주 선언적이고 미래적이었던 발터 벤야민의 책은 이제 고전의 반열에 올랐다. 별다른 논증이 없다는 점만 빼놓으면, 그는 이미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선취했던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재미있는 발상과 표현이 많다. 대량복제가 지각체계 자체를 바꿔놓는다든가, 진본성의 요소인 아우라가 탈락한다는 이 책에서 가장 유명한 주장이라든가, 당대의 비평가들이 저지르고 있는 시대착오적 실수와 예술가들이 벌이는 미래의 강제적 도래에 대한 이해라든가, 기계가 깊게 침투할수록 지각에서 기계가 사라지고 현실성이 창조된다는 이야기라든가, 누구나 영화배우가 되는 시대에 사람들은 스타에 더욱 열광한다는 역설적인 상황에 대한 예언(또는 분석?)이라든가 하는 것들이 그렇다.
벤야민의 말처럼, 벤야민의 언어로는 당연하지 않았던 것들(그래서 도통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가 너무나 어려운 말들)은 우리 시대의 일상이 되었다. 어쩌면 벤야민도 자기가 표현하는 다다이스트들과 같이, 미래에는 너무 당연하서 질문조차 제기되지 않을 일들을 현재로 끌어오느라 애를 쓰다 어떤 한계에 부딪힌 것 같다. 그래서 그의 말투는 선언적이고 예언적이며 잠언적이고, 어떤 때에는 무슨 소린지 잘 모를 정도로 신비주의적인 향취까지 지니고 있다. 그 때의 언어로 쓰였으니, 이게 일상이 된 우리가 읽기에도 그 의미를 이해하기 힘든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가 싶고.
글을 읽다보면 부지불식간에 예술 개념과 매체의 변화는 정치와 연결된다. 예술의 사회적 중요성이 덜할수록 감상과 비평이 분리되는 반면, 우리 시대는 예술의 사회적 중요성이 넘치도록 강조된다. 그 강조점은 한 편으로는 예술이 자본에 종속되었기 때문이고, 다른 한 편으로는 기술의 발달로 인해 예술 자체의 의미가 정치적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내가 해석한) 벤야민의 주장인 것 같다. 그래서 자본에 종속된 예술의 종착점은 전쟁이고, 예술의 의미에 대한 정치투쟁의 종착점은 공산주의가 되는 것이다. 참으로 알듯말듯한 말이지만, 실제로 전쟁에 동원된 “예술적” 도구들에 대해 생각해보자면 벤야민의 예언이 헛소리는 아닌 셈이다. 그래서 나는, 현대 영화산업 자본의 총아인 마블 영화에 등장하는 캡틴 아메리카를 보면서 정신이 멍해졌다가도, 그가 체화하는 가치에 공감하면서 캡틴 아메리카를 해석하려는 정치투쟁을 하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공교롭게도, 벤야민과 캡틴 모두 파시즘을 자신의 적으로 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