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의 변명 정암학당 플라톤 전집 18
플라톤 지음, 강철웅 옮김 / 이제이북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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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소크라테스는 재판정에 들어서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소크라테스의 변론』의 내용을 봤을 때, 그는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배심원과 대중에게 그대로 털어놓았을 때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고 예상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그는 거짓말로 죽음을 피하려들지 않았고, 자기 생각을 숨김없이 털어놓음으로써 자발적으로 사람들의 분노를 샀다. 죽음에 대해 의연한 모습을 보이지만, 그렇게 의연한 모습을 보이기에 2500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 그 기록이 남아 우리에게 읽히고 있지만, 그에게도 여러 갈등의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다른 사람과는 다르게 그는 자신의 삶 전체와 일관된 선택을 내렸고 이를 수행하는 데 충실했다. 사소하지 않은, 아주 중대한 차이인 것 같다.


그러나 이 죽음이 함축하는 의미에 관해 생각하다보면, 생각이 복잡해진다. 우리는 아테네를 현대 민주주의의 원형으로 배운다. 책에서도 나오듯, 이곳은 심지어 재판마저도 사람들의 의견에 따라 결정하는 곳이다. 몇몇 역사적 사건을 통해서 이 체제가 나쁘게 흘러갈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배우긴 하지만, 어쨌든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민주주의는 인류가 고안해낸 가장 진보적인 정치체제라는 점은 상식이다. 그리고 민주주의의 근본적 전제는 진리에 대해 아무도 알지 못하고,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소크라테스는 바로 이 지점을 정면으로 찌른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정책을 설계하고 집행하고 재판을 하는 것이 민주주의라면, 그 공동체는 우리가 소속감을 가질만한 자격을 갖춘 곳인가? 모른다는 것은 사실과 진리를 모른다는 것인데, 그것은 과연 우리가 원하는 결과와 소득을 가져다줄 수 있는가? 설령 우연히 우리가 원하는 효과가 발생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어쩌다 그렇게 된 것일 뿐이지 않겠는가. 이를 용인하는 것이 인간으로서,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올바른 태도일까. 소크라테스는 단연코 아니라고 답한다.


그래서 변론 속에는 어쩌면 영원히 화해할 수 없을지도 모를, 하지만 인간의 근본적 조건으로서 항상 이고 살아야하는 대립이 표현돼있다. 장르로 따지면 철학과 정치의 대립이고, 입장으로 따지면 진리와 민주주의의 대립이다. 아테네는 정치와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철학과 정치의 아이콘을 단죄한 것인데, 이것을 그르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소크라테스는 단순히 배심원들을 도발해 기분을 나쁘게 만드는 차원을 뛰어넘었다. 그렇다고 진리를 독점한 자들이 독재를 해야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소문으로든 변론으로든 그의 입장을 충분히 알고 있던 아테네 시민들도, 그래서 유/무죄 평결에서 소크라테스의 손을 꽤 많이 들어준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변론』을 읽고 철학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은 진리의 편을 들어주려는 경향이 있을 것이다. 철학이라는 활동 자체가 진리를 탐구하는 소크라테스적 방법에서 시작되었으니 말이다. 이 글을 쓰는 나도, 민주주의 사회의 시민이지만 동시에 철학에 관심이 많은 사람으로서 진리의 유혹에 시달린다(?). 어떻게 이 두 가지 소중한 가치를 소크라테스처럼 잘 조화롭게 세워놓느냐가, 좋은 시민이 되기 위한 관건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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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길그레이트북스 81
한나 아렌트 지음, 김선욱 옮김 / 한길사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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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름도 유명한 책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읽었다. 꼬박 1주일이 걸렸다. 두툼한 책, 빽빽한 글자에 정보량도 엄청나게 많은 책이라 펼치기만 하면 자꾸 졸음이 몰려왔다. 그래서 하루에 100페이지씩은 읽어야겠다고 마음먹고 실제로는 5~60페이지씩만 읽어가면서 어떻게 어떻게 끝맺기는 했다. 이렇게 도전적으로 책을 읽는 게 드문 일은 아니지만, 유독 이 책은 더 심하게 오래 걸렸다.


그렇게 열심히 읽은 결과는, 한 편으로는 생각보다 싱겁다. 이 책은 정말 그야말로 보고서이고, 기사다. 누가 어디서 무얼 했고 그는 누구와 관계가 있으며 이런저런 정책의 실무진으로 활동을 했는데 그 정책은 누구의 아이디어에서 비롯되었고 그 아이디어가 나오기까지는 책임자 선에서의 권력암투가 있었는데 그 둘의 다툼은 누구누구와 연결돼있고… 하는 이야기의 끊임없는 나열이다.


이 책에서 나온 개념으로 유명해진 이른바 악의 평범성에 관해서도, 이게 무슨 뜻인지 갈피를 잡기가 쉽지 않다. 15장까지 사건을 보고하는 내용을 죽 보여준 뒤에, “이게 악의 평범성이다”라는 문장으로 글이 끝나버리기 때문이다. 에필로그에 악의 평범성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 추적할만한 단서가 제공되긴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다. 시중에 돌아다니는 악의 평범성에 대한 설명이란 이 책에 등장하는 몇몇 폼나는 단어들을 몇 개 이어붙여서 만든 가짜설명이라는 게 오히려 이 책을 읽고 나서 더 확실해졌다.


읽으면서 내가 흥미를 느꼈던 부분은 따로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 당시 유럽 전체가 얼마나 반유대주의에 물들어있었는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중간 부분에서 아렌트는 독일 본토 및 독일의 영향권 아래 놓여있던 지역에서 유대인을 어떤 식으로 처리했는지 국가별로 매우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요약하자면, 독일이 저지른 것마냥 반드시 유대인을 이 지구에서 축출해버려야겠다는 정도의 태도는 아니었지만, 상당수의 독일 주변국들은 각자의 경제/정치/사회적 이유에 따라서 유대인을 2등 시민으로 대우했다. 그 국가들 중 몇몇은 독일이 “최종해결책”을 선포했을 때 매우 협조적이기까지 했다. 이러한 차별정책에 명백하게 반대의견을 표하고 그에 따른 정치적 행동에 나섰던 국가는, 이 책에 따르면 덴마크가 거의 유일하다.


그 와중에 1등 시민 대우를 받았던 부유한 유대인들과 유대인 공동체의 지도자들 중 일부는 나치에 협력했다는 점도 빼놓을 수는 없겠다. 물론 여기에는 고려해볼만한, 약간의 맥락이 있긴 하다. 반유대주의의 거울쌍으로 탄생한 시온주의의 영향 덕분에, 어떤 유대인들은 실제로 독일(과 유럽)을 떠나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고 싶어했고, 이들은 유대인을 지배지역 밖으로 이송하고자 했던 독일의 초기 유대인 정책에 실제로 “협조”했다. 추방당하는 유대인들은 거의 전재산을 몰수당하는 처지에 놓일 수 밖에 없었음에도 그랬다. 아마 이들 중 일부는 독일의 유대인 정책이 “최종해결책”으로 변화한 것을 제대로 감지하지 못하고, “이송” 과정에 협조했을 지도 모른다.


또 하나 주목했던 부분은, 일종의 총체적 엉망진창이라고 부를 수 있을만한 어떤 사회적 분위기였다. 무엇보다도 재판을 받고 있는 아이히만의 정신과 기억이 뒤죽박죽이어서, 이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고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인지 그 내용을 파악하기가 정말 힘들다. 행정기록과 다른 증인에 의해 확정된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도 곳곳에서 드러나고, 자신의 권한을 부풀려서 말했다가도 그 점이 불리하게 작용할 때는 자신이 한 일이 아니었다고 발뺌하기도 한다.


책 안에서 복원된 독일의 분위기도 혼돈의 도가니다. 유대인에 대한 첫번째 공개적 차별정책인 소개령 자체도 “이게 말이 되는 정책인가?”라는 의구심을 자아내지만, 그에 협조하는 유대인도 있고, 이때다 싶어 신나서 날뛰며 소개령을 거부하는 유대인을 죽이러 다니는 독일인도 있고, 뒷돈을 받고 유대인의 책무(?)를 면제해주는 증명서를 발급해주거나 이송목록에서 제외시키는 관리도 있다. 뒷돈 액수도 지역에 따라 천차만별이라, 적게는 인당 50마르크에서 많게는 1만 마르크까지 치솟는다. 아이히만을 둘러싼 명령체계도 일관성있게 잡혀있지 않으며, 정부의 각 부처들은 힘겨루기에 골몰하고, 무엇보다도 최고통수권자였던 히틀러의 명령도 손바닥 뒤집히듯 뒤집히는데, 당연히 근거가 전혀 없다. 그 속에서 아이히만은 혼란한 정부의 상태를 탓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다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이런 나라가 어떻게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벌일 수 있었던 것이지? 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통해 아렌트가 하고 싶었던 말에 대해서 다른 시각을 갖게 됐다. 도덕적 악은 이렇게 정돈되지 않은 집단, 좋은 사회에 대한 지향점이 확실하지 않은 공동체에서 발생한다. 이런 집단은 개인에게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할 수 있는 잣대를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개인이 혼자 수양과 반성을 통해 도덕적 기준을 발견할 수 있다면 이런 상황이 큰 문제가 되지 않겠으나, 안타깝게도 인간은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며 구성원들과 함께 하는 삶 속에서만 그 기준을 얻을 수 있다. 도덕적 지향이 없는 집단 속에서 지내다보면, 그 안에서 높은 지위를 얻기 위해 나의 일상을 열심히 꾸려가는 사람은 그 어떤 자각도 없이 악을 저지를 수 있다. 그래서 악은 때로는 평범의 옷을 입고 자행되고, 이것은 개인이 어떻게 용을 쓴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다.


그러나 아렌트는 분명하게 덧붙인다. 자각이 없어도 악행을 저지르는 것은 악이다. 자각이 없었다는 것이 악행을 저지른 것에 대한 이유가 될 수 없다. 하지만 그런 개인이 악을 저질렀다고 선언하는 것은, 개인에게 책임을 묻는 작업일 뿐만 아니라 공동체에 책임을 묻는 작업이다. 그래서 아렌트 또한 아이히만은 예루살렘이 아니라 UN 사법재판소, 즉 “인류의 법정”에 갔어야 한다는 데 동의하는 것이다. 그가 인류의 법정의 시선을 가졌더라면, 인간성에 대한 깊은 고려가 동반되었더라면, 공동체를 향해서 모든 인간을 인간으로서 배려하라고 요구했더라면, 아우슈비츠와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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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종교사 논형 일본학 18
스에키 후미히코 지음, 백승연 옮김 / 논형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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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다른듯 하면서도 우리나라와 닮은 구석이 참 많은 것 같다. 일본의 종교의 역사를 아주 간략하게 다룬 이 책을 읽고 난 첫 느낌도 그렇다. 종교 부분에서도, 이 사람들은 우리와 유사한 어떤 길을 밟아왔구나. 혹은 그런 과정을 거쳐서 형성된 이른바 ‘고층’이라는 관점이 식민지 시기 동안 우리나라를 바라보는 시각에 알게 모르게 적용된 것을 내가 어디에선가 배웠을지도 모를 일이다. 정말 유사한 것인지, 아니면 관점에 의해 유사성이 발견되는 것인지 가리는 건 내 능력 밖의 일인 것 같다.


신불습합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면서부터 어디선가 많이 본 것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독자성, 고유성, 정체성이라는 한 묶음과 보편성 사이의 대립. 국사 시간에 마르고 닳도록 들었던 유불도(선)의 통합 어쩌고, 중국의 사상적 전통과 구별되는 한국 고유의 사상을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이 저쩌고 같은 말들이 생각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 기시감 속에서도 흥미로웠던 것은, 독자성, 고유성, 정체성이라는 범주 아래 놓인 것들이 실제로는 불교의 영향이 없이는 성립조차 될 수 없었다는 것, 고유성이라 불리는 것 속에 이미 불교적 색채가 진하게 녹아있어 우리의 시점에서 그 둘을 떨어뜨리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저자의 견해였다. 두 범주 사이의 대립은 그래서 정치적인 것이지 역사적인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함축되어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런 의미에서 글쓴이가 마루야마 마사오의 표현을 빌렸다는 ‘고층’이라는 비유가 정말 적절하다. 땅의 각 층은 분명히 경계를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땅 전체의 관점에서 봤을 때는 각 층이 서로가 서로의 성분을 일정 정도 공유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하나의 층도 단일한 물질로 이뤄져있지 않고 여러 흙의 혼합으로 형성돼있다. 사상사가는 마치 지질학자나 고고학자처럼, 그 땅을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탐사하면서 땅 전체의 모습을 그려내는데, 그 모습이 무엇이냐에 따라 우리가 딛고 서있는 땅의 모습과 성격이 달라지는 것이다. 불분명하지만 우리의 사고방식의 기반이기에 탐구하지 않을 수 없는 그 무엇, 그 탐구의 결과에 따라 우리의 방향이 정해지는 그 무엇, 그것을 ‘고층’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약간씩 다른 경로를 걷긴 했더라도, 불교의 수입, 중국에서 송나라 이후에 발전한 신유학의 유입, 15세기 이후 기독교의 전파, 18세기 이후 다양한 사상사조의 침공(?)에 대응하는 모습에서도 공통점을 더 많이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어떻게든 지배이념에 복무시키고자 하는 권력층의 행동도 그렇고, 기존의 신념체계에 타자를 유연하게(때로는 격렬하게) 받아들이는 이른바 민중들의 분위기도 그렇다. 이런 점은 사상사가 아니라 종교사이기 때문에 고찰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닐까 생각한다. 사상사라면 입장들의 논리적 정합성과 이론적 논쟁의 승패만을 가리면 되지만, 종교사이기 때문에 그 입장들이 사람들의 삶과 얼마나 호응했는지 고려하지 않고 넘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근대 시기에 들어서면 더 많이 들어본 이름과 더 많이 보았던 사건이 배경으로 펼쳐진다. 우리와 일본이 모두 (강제로) 세계사의 일원으로 편입되면서 생긴 일이기 때문인 것 같다. 일본에서도 있었다는 신사참배 반대운동은 똑같이 한국에서 있었던 (그리고 국사시간에 배웠던) 논쟁을 생각나게 하고, 신도가 종교냐 하는 논쟁은 (성격이 약간 다르긴 하지만) 오래된 사찰에 국고보조금을 줘야 하는가에 관한 우리나라의 문제를 떠올리게 한다. 결정적으로, 일본의 입장에선 종전일인 매년 광복절마다 논란이 되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의 문제에 대한 논란과 그에 대한 다양한 견해를 생각해보면, 일본의 종교는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 아직 살아숨쉬고 있는 현재진행형 안건이다.


<XX사>라는 딱딱한 제목을 지닌 책이 그러하듯, 쉽게 술술 넘어가는 책은 아니다. 그럼에도 일본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결코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주제이긴 하다. 이렇게라도 압축적으로 읽어둬서 잘했다 싶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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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그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31
헤르타 뮐러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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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타 뮐러의 <숨그네>는 수용소에서 보낸 5년을 보낸 사람의 삶을 다룬 소설이다. 그러나 무심결에 초반 여러 페이지를 넘기면서 읽을 때는 “수용소”라는 단어에서 으레 느껴지는 어두움과 참혹함이 없다. 밝고, 아름답고, 반짝인다. 300페이지가 넘는 시를 읽은 기분이다. 이 글이 어떤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지 직관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천천히 곱씹어봐야만 아, 이런 상황이구나 알 수 있다. 이 책의 책장을 쉽게 넘길 수 없는 첫번째 이유다.


이 정도는 독자라면 어느 정도 간파(?)할 수 있는 일종의 문학적 전략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숨그네>의 경우엔, 문장에 가득한 긍정의 단어와 그 조합이 만들어내는 비참함 사이의 낙차가 어마어마하다. 하나하나 꾹꾹 눌러썼다는 표현만이 어울리게 꼼꼼히 지어진 문장들 속에서 생각의 길을 잃고 헤메다보면 주인공 레오의 마음의 흐름을 따라가는 것 같다가도, 정상세계에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마다 소설의 밖으로 튀어나간다. 이 책의 책장을 쉽게 넘길 수 없는 두번째 이유다.


수용소라는 공간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남기는가? 레오는 배고픔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정말 배고픔만 남았기 때문에 그렇게 대답하는 것은 아니다. 수용소가 사람들에게 남긴 것이 무엇인지 알려면 무엇을 빼앗아가는지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그런데 자유라느니, 존엄성이라느니, 수치심이라느니, 이런 추상적인 단어들은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않는다. 정상의 사회에서는 아무도 이런 추상체들을 주목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에겐 진짜 이름이 없다. 수용소가 이들을 빼앗아갔을 때에는 빼앗겼다는 문장을 만들어낼 수가 없다. 이름이 없기 때문이다. 보통 인간성이라는 기호가 가리키는 그 덩어리가 흐트러져 버렸다는 사실은 설명될 수 없다. 묘사라는 먼 길을 통해서만 힘겹게 가닿을 수 있을 뿐이다. 이 책의 책장을 쉽게 넘길 수 없는 세번째 이유다.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마주하면 내가 아니라 사물이 눈에 들어온다. 비루한 인격은 내 곁을 감싸는 물건들 속으로 한 조각씩 들어간다. 이제 나는 그 물건들 없이 나를 설명할 수 없다. 내가 삽을 사용하지 않고, 내 옷에 시멘트가 붙지 않으며, 내가 침대에 눕지 않는다. 내가 곧 삽이고, 내가 곧 시멘트이며, 내가 곧 침대다. 나는 더 이상 내 육체가 아니기 때문에 죽음이 이것을 끝내주지도 않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누군가는 그것을 삶에 대한 희망이라고 부르겠지만, 정말 그런지 잘 모르겠다. 이 책의 책장을 쉽게 넘길 수 없는 네번째 이유다.


레오는 5년째 되는 날 수용소에서 나갈 수 있었다. 탈출은 아니고, 강제노동의 재편성 과정에서 발생한 우연이었다. 수용소에 가는 것도, 수용소에서 나오는 것도, 그 무엇 하나 나와 관련돼 결정된 것이 없었다. 육체는 소련이 내쫓았기 때문에, 정신은 아직도 수용소의 언저리를 헤매고 있다. 내 역사의 일부이기에 짊어져야 하고 그래도 삶은 계속되어야 하니 살아야 한다고 말하기엔, 결코 만만하지 않은 짐이다. 사회는 그대로 있고, 그에 대해 말하는 법을 알려주지 않는다. 이 책의 책장을 쉽게 넘길 수 없는 다섯번째 이유다.


강제노동의 수용소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군에서 보낸 2년을 생각해본다. 군에 대한 담론은 넘쳐난다. 너무 넘쳐나서 아무도 그에 대해 적절하게 말하지 못한다. 그 시간을 보낸 모든 사람의 마음엔 꺼내지 못한 혼란스러움만 쌓여있다. 낮아진 지능으로 자주, 대상이 잘못된 분노로 가끔 나타나야만 그 어지러움의 존재 내지는 인격의 부재를 확인할 수 있다. 난 <숨그네>가 그런 종류의 상처를 보여주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그 강도는 덜하다 할지라도, 레오 같은 상태에 있는 사람이 전국민의 3~40%인 이곳은, 어떤 곳일까 생각해본다. 이 책의 책장을 쉽게 넘길 수 없는 마지막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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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 필요한 순간 - 삶의 의미를 되찾는 10가지 생각
스벤 브링크만 지음, 강경이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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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만 보고 이 책을 집어든 이유는, 소설가 아이리스 머독을 철학자 로 분류해놓은 관점에 놀랐기 때문이다. 소설가로 유명하긴 하지만, 머독은 철학자로서도 업적을 쌓은 대가다. 특히 영미철학 전통에서 페미니즘 윤리학을 정립한 선구자다.


이 책을 다 읽었을 때에는 더 괜찮은 기분이 들었다. 요즘 흐름과는 완전히 다르지만 귀담아들을만한 메시지를 던지기 때문이다. 내면으로 매몰되는 순간, 우리는 행복해질 수 없다고 브링크만은 말한다. 인간은 온전히 개인(개별자)일 수 없고, 근본적으로 타인(타자)과 함께 맺어진 그물로서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는 지향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점을 잊어버리고 타인을 내 뜻대로 움직여서 나만이 추구하는 목적을 이뤄야한다는 "도구적" 관점을 취한다면, 타인은 언제나 지옥일 수 밖에 없다. 결코 그들은 내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으니까.


우리에겐 인정이 필요하다. 타인도 목적이며(칸트) 타인과 맺는 관계도 목적이라는(아리스토텔레스) 사실, 그리고 이 관계의 사실을 구성하는 요소인 약속(니체), 진실성(아렌트), 사랑(머독), 용서(데리다), 책임(로이스트루프)은 다른 목적에 대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추구할만한 대상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한다. 그래야만 내면에 침몰된 반쪽자리 자아(ego)가 아닌, 타인을 포함하는 진짜 자기(self)와 관계를 맺을 수 있다(키에르케고르). 진짜 자기를 대면하는 순간 나는 자아의 요구로부터 벗어나 나의 행동방식을 선택할 자유(카뮈)를 얻는다. 이 자유를 발판삼아 내 삶을 목적의 가치들로 채워나가는 것이, 죽음을 필연적으로 맞이하게 되는 우리가 삶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최상의 존재양식이다(몽테뉴).


나는 나이면서 동시에 내가 아니다. 타인 또한 타인이면서 동시에 타인이 아니다. 타인은 나를 만들고, 나 또한 타인을 만든다. 이 점을 우리는 너무 쉽게 잊어버리는 것은 아닌지, 그렇게 잊어버리면서 진짜로 가치있는 것들을 놓쳐버리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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