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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의 아이히만 ㅣ 한길그레이트북스 81
한나 아렌트 지음, 김선욱 옮김 / 한길사 / 2006년 10월
평점 :
그 이름도 유명한 책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읽었다. 꼬박 1주일이 걸렸다. 두툼한 책, 빽빽한 글자에 정보량도 엄청나게 많은 책이라 펼치기만 하면 자꾸 졸음이 몰려왔다. 그래서 하루에 100페이지씩은 읽어야겠다고 마음먹고 실제로는 5~60페이지씩만 읽어가면서 어떻게 어떻게 끝맺기는 했다. 이렇게 도전적으로 책을 읽는 게 드문 일은 아니지만, 유독 이 책은 더 심하게 오래 걸렸다.
그렇게 열심히 읽은 결과는, 한 편으로는 생각보다 싱겁다. 이 책은 정말 그야말로 보고서이고, 기사다. 누가 어디서 무얼 했고 그는 누구와 관계가 있으며 이런저런 정책의 실무진으로 활동을 했는데 그 정책은 누구의 아이디어에서 비롯되었고 그 아이디어가 나오기까지는 책임자 선에서의 권력암투가 있었는데 그 둘의 다툼은 누구누구와 연결돼있고… 하는 이야기의 끊임없는 나열이다.
이 책에서 나온 개념으로 유명해진 이른바 악의 평범성에 관해서도, 이게 무슨 뜻인지 갈피를 잡기가 쉽지 않다. 15장까지 사건을 보고하는 내용을 죽 보여준 뒤에, “이게 악의 평범성이다”라는 문장으로 글이 끝나버리기 때문이다. 에필로그에 악의 평범성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 추적할만한 단서가 제공되긴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다. 시중에 돌아다니는 악의 평범성에 대한 설명이란 이 책에 등장하는 몇몇 폼나는 단어들을 몇 개 이어붙여서 만든 가짜설명이라는 게 오히려 이 책을 읽고 나서 더 확실해졌다.
읽으면서 내가 흥미를 느꼈던 부분은 따로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 당시 유럽 전체가 얼마나 반유대주의에 물들어있었는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중간 부분에서 아렌트는 독일 본토 및 독일의 영향권 아래 놓여있던 지역에서 유대인을 어떤 식으로 처리했는지 국가별로 매우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요약하자면, 독일이 저지른 것마냥 반드시 유대인을 이 지구에서 축출해버려야겠다는 정도의 태도는 아니었지만, 상당수의 독일 주변국들은 각자의 경제/정치/사회적 이유에 따라서 유대인을 2등 시민으로 대우했다. 그 국가들 중 몇몇은 독일이 “최종해결책”을 선포했을 때 매우 협조적이기까지 했다. 이러한 차별정책에 명백하게 반대의견을 표하고 그에 따른 정치적 행동에 나섰던 국가는, 이 책에 따르면 덴마크가 거의 유일하다.
그 와중에 1등 시민 대우를 받았던 부유한 유대인들과 유대인 공동체의 지도자들 중 일부는 나치에 협력했다는 점도 빼놓을 수는 없겠다. 물론 여기에는 고려해볼만한, 약간의 맥락이 있긴 하다. 반유대주의의 거울쌍으로 탄생한 시온주의의 영향 덕분에, 어떤 유대인들은 실제로 독일(과 유럽)을 떠나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고 싶어했고, 이들은 유대인을 지배지역 밖으로 이송하고자 했던 독일의 초기 유대인 정책에 실제로 “협조”했다. 추방당하는 유대인들은 거의 전재산을 몰수당하는 처지에 놓일 수 밖에 없었음에도 그랬다. 아마 이들 중 일부는 독일의 유대인 정책이 “최종해결책”으로 변화한 것을 제대로 감지하지 못하고, “이송” 과정에 협조했을 지도 모른다.
또 하나 주목했던 부분은, 일종의 총체적 엉망진창이라고 부를 수 있을만한 어떤 사회적 분위기였다. 무엇보다도 재판을 받고 있는 아이히만의 정신과 기억이 뒤죽박죽이어서, 이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고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인지 그 내용을 파악하기가 정말 힘들다. 행정기록과 다른 증인에 의해 확정된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도 곳곳에서 드러나고, 자신의 권한을 부풀려서 말했다가도 그 점이 불리하게 작용할 때는 자신이 한 일이 아니었다고 발뺌하기도 한다.
책 안에서 복원된 독일의 분위기도 혼돈의 도가니다. 유대인에 대한 첫번째 공개적 차별정책인 소개령 자체도 “이게 말이 되는 정책인가?”라는 의구심을 자아내지만, 그에 협조하는 유대인도 있고, 이때다 싶어 신나서 날뛰며 소개령을 거부하는 유대인을 죽이러 다니는 독일인도 있고, 뒷돈을 받고 유대인의 책무(?)를 면제해주는 증명서를 발급해주거나 이송목록에서 제외시키는 관리도 있다. 뒷돈 액수도 지역에 따라 천차만별이라, 적게는 인당 50마르크에서 많게는 1만 마르크까지 치솟는다. 아이히만을 둘러싼 명령체계도 일관성있게 잡혀있지 않으며, 정부의 각 부처들은 힘겨루기에 골몰하고, 무엇보다도 최고통수권자였던 히틀러의 명령도 손바닥 뒤집히듯 뒤집히는데, 당연히 근거가 전혀 없다. 그 속에서 아이히만은 혼란한 정부의 상태를 탓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다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이런 나라가 어떻게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벌일 수 있었던 것이지? 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통해 아렌트가 하고 싶었던 말에 대해서 다른 시각을 갖게 됐다. 도덕적 악은 이렇게 정돈되지 않은 집단, 좋은 사회에 대한 지향점이 확실하지 않은 공동체에서 발생한다. 이런 집단은 개인에게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할 수 있는 잣대를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개인이 혼자 수양과 반성을 통해 도덕적 기준을 발견할 수 있다면 이런 상황이 큰 문제가 되지 않겠으나, 안타깝게도 인간은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며 구성원들과 함께 하는 삶 속에서만 그 기준을 얻을 수 있다. 도덕적 지향이 없는 집단 속에서 지내다보면, 그 안에서 높은 지위를 얻기 위해 나의 일상을 열심히 꾸려가는 사람은 그 어떤 자각도 없이 악을 저지를 수 있다. 그래서 악은 때로는 평범의 옷을 입고 자행되고, 이것은 개인이 어떻게 용을 쓴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다.
그러나 아렌트는 분명하게 덧붙인다. 자각이 없어도 악행을 저지르는 것은 악이다. 자각이 없었다는 것이 악행을 저지른 것에 대한 이유가 될 수 없다. 하지만 그런 개인이 악을 저질렀다고 선언하는 것은, 개인에게 책임을 묻는 작업일 뿐만 아니라 공동체에 책임을 묻는 작업이다. 그래서 아렌트 또한 아이히만은 예루살렘이 아니라 UN 사법재판소, 즉 “인류의 법정”에 갔어야 한다는 데 동의하는 것이다. 그가 인류의 법정의 시선을 가졌더라면, 인간성에 대한 깊은 고려가 동반되었더라면, 공동체를 향해서 모든 인간을 인간으로서 배려하라고 요구했더라면, 아우슈비츠와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