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그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31
헤르타 뮐러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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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타 뮐러의 <숨그네>는 수용소에서 보낸 5년을 보낸 사람의 삶을 다룬 소설이다. 그러나 무심결에 초반 여러 페이지를 넘기면서 읽을 때는 “수용소”라는 단어에서 으레 느껴지는 어두움과 참혹함이 없다. 밝고, 아름답고, 반짝인다. 300페이지가 넘는 시를 읽은 기분이다. 이 글이 어떤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지 직관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천천히 곱씹어봐야만 아, 이런 상황이구나 알 수 있다. 이 책의 책장을 쉽게 넘길 수 없는 첫번째 이유다.


이 정도는 독자라면 어느 정도 간파(?)할 수 있는 일종의 문학적 전략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숨그네>의 경우엔, 문장에 가득한 긍정의 단어와 그 조합이 만들어내는 비참함 사이의 낙차가 어마어마하다. 하나하나 꾹꾹 눌러썼다는 표현만이 어울리게 꼼꼼히 지어진 문장들 속에서 생각의 길을 잃고 헤메다보면 주인공 레오의 마음의 흐름을 따라가는 것 같다가도, 정상세계에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마다 소설의 밖으로 튀어나간다. 이 책의 책장을 쉽게 넘길 수 없는 두번째 이유다.


수용소라는 공간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남기는가? 레오는 배고픔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정말 배고픔만 남았기 때문에 그렇게 대답하는 것은 아니다. 수용소가 사람들에게 남긴 것이 무엇인지 알려면 무엇을 빼앗아가는지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그런데 자유라느니, 존엄성이라느니, 수치심이라느니, 이런 추상적인 단어들은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않는다. 정상의 사회에서는 아무도 이런 추상체들을 주목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에겐 진짜 이름이 없다. 수용소가 이들을 빼앗아갔을 때에는 빼앗겼다는 문장을 만들어낼 수가 없다. 이름이 없기 때문이다. 보통 인간성이라는 기호가 가리키는 그 덩어리가 흐트러져 버렸다는 사실은 설명될 수 없다. 묘사라는 먼 길을 통해서만 힘겹게 가닿을 수 있을 뿐이다. 이 책의 책장을 쉽게 넘길 수 없는 세번째 이유다.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마주하면 내가 아니라 사물이 눈에 들어온다. 비루한 인격은 내 곁을 감싸는 물건들 속으로 한 조각씩 들어간다. 이제 나는 그 물건들 없이 나를 설명할 수 없다. 내가 삽을 사용하지 않고, 내 옷에 시멘트가 붙지 않으며, 내가 침대에 눕지 않는다. 내가 곧 삽이고, 내가 곧 시멘트이며, 내가 곧 침대다. 나는 더 이상 내 육체가 아니기 때문에 죽음이 이것을 끝내주지도 않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누군가는 그것을 삶에 대한 희망이라고 부르겠지만, 정말 그런지 잘 모르겠다. 이 책의 책장을 쉽게 넘길 수 없는 네번째 이유다.


레오는 5년째 되는 날 수용소에서 나갈 수 있었다. 탈출은 아니고, 강제노동의 재편성 과정에서 발생한 우연이었다. 수용소에 가는 것도, 수용소에서 나오는 것도, 그 무엇 하나 나와 관련돼 결정된 것이 없었다. 육체는 소련이 내쫓았기 때문에, 정신은 아직도 수용소의 언저리를 헤매고 있다. 내 역사의 일부이기에 짊어져야 하고 그래도 삶은 계속되어야 하니 살아야 한다고 말하기엔, 결코 만만하지 않은 짐이다. 사회는 그대로 있고, 그에 대해 말하는 법을 알려주지 않는다. 이 책의 책장을 쉽게 넘길 수 없는 다섯번째 이유다.


강제노동의 수용소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군에서 보낸 2년을 생각해본다. 군에 대한 담론은 넘쳐난다. 너무 넘쳐나서 아무도 그에 대해 적절하게 말하지 못한다. 그 시간을 보낸 모든 사람의 마음엔 꺼내지 못한 혼란스러움만 쌓여있다. 낮아진 지능으로 자주, 대상이 잘못된 분노로 가끔 나타나야만 그 어지러움의 존재 내지는 인격의 부재를 확인할 수 있다. 난 <숨그네>가 그런 종류의 상처를 보여주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그 강도는 덜하다 할지라도, 레오 같은 상태에 있는 사람이 전국민의 3~40%인 이곳은, 어떤 곳일까 생각해본다. 이 책의 책장을 쉽게 넘길 수 없는 마지막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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