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을 철학하다 가슴으로 읽는 철학 1
사미르 초프라 지음, 조민호 옮김 / 안타레스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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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에 관한 책을 읽고 그 책에 관해 글을 써서 뭔가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첫 문장을 어떻게 써야 할지 걱정이 앞섰다. 마음만 졸이다가 웹서핑에 몇 분, 쇼핑 사이트를 들락날락하는 데 몇 분, 괜히 허기진 탓에 집에 있던 과자를 주섬주섬 주워 먹으며 몇십 분, 그러다 보니 한 글자도 쓰지 못한 채 두 시간이 지나 있었다. 내일엔 내일의 삶을 살아야 하니, 나는 그 두 시간만큼 잠을 덜 자야만 한다. 내일 일하다가 졸지 않을까, 잠을 덜 자는 것만큼 불안을 안겨주는 일이 또 있을까. 고민할 시간에 얼른 한 글자라도 쳐넣으라고 화면 위 커서가 나를 재촉하는 것만 같다, 는 표현을 어렸을 적 친구가 알려준 기억이 있다. 불안과 불안에 관한 책에 관해 작업을 하는 이 순간에도 나는 불안하다.


불안에는 정체가 없다. 이 생각에서 저 생각으로 마음이 옮겨가도, 이 행동을 하다가 ‘이러면 안 되지’ 하면서 저 행동을 하려고 해도, 불안은 순식간에 모습을 바꿔 모든 생각과 행동에 들러붙는다. 우리에게서 쫓아낼 수 없는 것, 떨어뜨릴 수 없는 것, 없앨 수 없는 것. 물론 지금 내 상황에서 불안은 아무래도 내 게으름이 일으킨 걱정이 그 원인인 것 같긴 하지만, 과연 그런 걱정을 내 삶에서 완전히 지울 수 있는 날이 올 것인가. 게으르지 않고 부지런히 움직여 걱정을 없앨 수만 있다면, 내가 그렇게 실천할 수 있을까, 또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일까.


『불안을 철학하다』에서 다루는 학자들, 이른바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이런 사소한 걱정에서 불안이 인간의 존재 방식이라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걱정은 생각에서 온다. 생각은 미래를 향한다. 미래는 인간이 반드시 도달하게 되는 목적지다. 하지만 그 모습을 인간의 능력으로는 파악할 수 없다. 그 미래는 결국 현재로 다가와 알 수 있는 것이 된다. 동시에 또 다른 불투명한 미래가 그 현재를 대체한다. 인간은 파악할 수 없는 대상에게 모종의 두려움을 느낀다. 그림자만 보이는 무언가를 마주했을 때 전해지는, 무시무시한 것이 있을 것만 같은 그런 두려움과 비슷하다. 불안이란 바로 그런 두려움이다.


이런 이유로, 실존주의 철학자들에게 인간은 생각하는 한 불안하다. 불안하지 않으려는 노력은 생각하지 않기,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이 ‘인간이기를 포기하려는’ 노력을 다양한 관점에서 살핀다. 사회 문화 도덕적 압박에 순응하며 생각하지 않으려 하거나(니체),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한 창조적 가능성을 부정하거나(키르케고르), 죽음이라는 확실한 미래를 직시하지 않고 그런 일은 없을 거라며 회피하거나(틸리히) 아니면 모두 집어치우고 세속적 문제에 파묻혀 일상인이 되거나(하이데거). 하지만 불안에는 정체가 없기 때문에, 이 모든 노력에도 불안은 우리의 뒤를 졸졸 쫓아다닌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에게 불안은 똑바로 마주 봐야 할 대상이며, 없앨 수 없다면 함께 가야 한다. 몇몇 실존주의자들의 용어를 빌자면 ‘비본래적인’ 것에서는 벗어나서 본질적 불안만 고이 남겨두어야 인간으로서의 삶을 회복할 수 있다.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처럼 보이는 요소들은 사실 본질적인 불안을 바라볼 수 없게 만든다. 그런 요소들이 만든 비본래적 불안에 시달리며 이를 해소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뿌리가 아닌 잔가지만 쳐내는 헛수고다. 반대로 인간적 불안에 비하면 비본래적 불안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점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불안을 통해 삶을 새롭게 설계할 수 있다. ‘인간이기를 포기하려는’ 노력에서 벗어나, ‘맨몸으로서의 나’ 또는 다른 어떤 것에도 걸리적거리지 않는 인간 자체로서의 나로부터 우리의 행동 양식과 가치 체계를 새롭게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말은 이렇게 할 수 있지만, 힘든 일이다. 이 책에 따르면, 비본래적 불안을 야기하는 기제가 우리 마음속에도 있고 우리의 몸 밖에도 있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욕망을 가장 먼저 생각하는 자아의 활동이 충족하지 못하도록 내면화된 도덕인 초자아가 억누르면서 비본래적 불안이 생겨난다고 봤다. 마르크스의 이론에 따르면, 자본주의 경제 구조가 인간을 세계로부터 소외하게 만들어 비본래적 불안을 강제한다. 우리의 노동력을 집어넣어 무언가를 만들었지만 내 것이 되지는 않는다는 데서 오는 좌절, 그럼에도 그 무언가를 사지 않고서는 물질적 삶을 이어갈 수 없기 때문에 노동력을 집어넣는 행위와 임금을 맞바꾸는 일을 계속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사회체제, 그렇게 내 것이 아닌 물건으로 가득한 세계에 덩그러니 홀로 남게 되는 상황. 그저 비본래적이라고만 치부하고 건너뛰기에는 너무나도 큰 짐이 삶을 압박하고 우리를 이리로 저리로 끌고 간다.


책을 읽다 보니, 이런 비본래적 불안을 ‘불안정’이라는 다른 단어로 불러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제 문화 사회 정치, 그 밖에 나에게서 나오지 않은 모든 것이 나를 가만히 있지 못하게 만든다. 그것들에 신경 쓰고 거기에 나를 맞추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나에게서 나오지 않았다는 바로 그 특성 때문에 그런 기준을 충족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지금 당장 생각하기로는 ‘적당한’, ‘평범한’ 같은 단어의 활용법에 이런 뜻이 숨어있는 것 같다. 내 상태를 가리키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남들만큼’이라는 비교급을 내포하는, 하지만 그 ‘남들’이 누구인지 물어보면 흐릿한 그런 말. 이런 불일치에 마음을 쏟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불안정이다.


불안정한 사람은 불안을 바라보지 못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본래적 불안을 바라볼 여유가 없다. 세속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이기를 포기하게’ 만드는 불안정이 사라지지 않은 상태에서 불안을 제대로 성찰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학업, 취업, 결혼, 노후준비 같은 문제를 포함해 우리의 일상 자체가 불안정을 만들어내는 것투성이이기 때문이다. 때로 불안정이 불안의 원인으로 오해돼 마치 불안정을 해결하면 불안도 없어질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지기까지 한다. 하지만 불안정을 없애려는 노력은 결코 충족되지 않는다. 앞에서 적은 것처럼 이미 그 모두가 내 것이 아닌, 내가 일치할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이 가능하리라고 상상하긴 어렵지만, 이 책은 설령 불안정이 모두 사라진다고 해도 불안은 남는다고 말한다.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노력을 멈추는 그 순간 인간으로서의 생각, 인간이 되기 위한 생각이 새롭게 시작되기 때문이다. 대상이나 외부를 향한 생각이 아닌 나를 향한 생각, 실체가 없는 것에 관한 생각, 가능성에 관한 생각. 이런 생각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 앞의 단독자(키르케고르)가 되거나, 세계 속에 던져지지 않고 스스로 집어던지는 나로 바뀌거나(하이데거), 내면의 생생함을 그대로 드러내는 초인(니체)이 되거나, 존재할 용기를 갖는다(틸리히). 이런 불안은 내겐 이명 같다. 모든 소리가 잦아든 뒤에야 우리에게 들리고, 끊임없이 우리를 자극해 신경 쓰이지만 그저 그렇구나 하고 받아들이면서 공존하는 게 얼마든지 가능한, 그런 대상 말이다. 조용한 방에서 이 글을 적고 있는 동안에도 이명은 내 귀를 떠나지 않는다.


이 책은 불안과 공존하라고 말한다. 내가 이해한 방식은 조바심을 내는 스스로에게 ‘그래서 뭐 어쩌라고?’라고 되묻는 것이다. 쉽지 않은 일이다. 어제도, 그저께도, 1년 전에도, 10년 전에도 실패했던 일이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실패할 것이다. 그런 쿨시크함은 최소한 나에겐 잘 어울리지 않는 태도인 것 같다. 그럼에도 ‘그래서 뭐 어쩌라고?’라고 묻지 못한 채 걸어온 길이 만든 나를 인정하고, 심지어 앞으로도 그러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알면서도 그렇게 말하길 포기하지 않는 것이 불안과 공존하는 삶의 방식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지식이라기보다는 위로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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