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테스 (하) 열린책들 세계문학 185
토머스 하디 지음, 김문숙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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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스를 몇십년 만에 읽으면서 새롭게 알게된 것은, 저자인 토마스 하디가 일련의 작품들을 통해서 당시 영국 사회가 내재하고 있던 인간에 대한 억압에 도전한 용기있는 작가였다는 점이었습니다.

최근에 읽고 있는 책인 은유님의 '쓰기의 말들'에서 아래 문장을 읽으며 토마스 하디가 생각이 나더군요.

"‘문학은 용기다’라는 명제를 처음 봤을 때 곧장 와 닿지 않았다. 문학은 언어 예술이고 용기는 굳센 기운인데 무슨 상관이 있지 했다. 꾸준히 글을 읽고 쓰면서 그 깊은 의미를 알아챘다. 좋은 글에는 금기와 위반이 있다. 차마 말하지 못했던 것들을 드러내고 감히 생각할 수 없었던 것들을 밝혀낸다. 작가의 용기에 탄복하고 작가의 용기에 전염된다."

사실상 철들고서는 처음 읽은 <테스>는 기억에 남은 이미지 이상의 다층적인 내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테스와 에인절, 그리고 알렉. 이 세 사람의 관계는 여느 삼각관계와는 또다른 의미를 줍니다. 그 구도에 한층한층 겹쳐지는 여러 관계의 그물들. 가족, 농장의 친구들. 그 위에 어두운 그림자처럼 드리워진 당시의 사회상.

작가는 가능한 많은 등장인물에게 자신만의 목소리를 부여하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무책임해 보이는 테스의 부모도 어떤 문장에서는 그들을 '무책임'하다는 말로 쉽게 재단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아마도 은유님의 글을 읽다가 아래와 같은 문장에서 흠칫하고 멈추었던 직후라서 더 그런 것 같습니다.

"읽고 쓰며 묻는다. 몸으로 실감한 진실한 표현인지, 설익은 개념으로 세상만사 재단하고 있지는 않는지. 남의 삶을 도구처럼 동원하고 있지는 않는지. 앎으로 삶에 덤비지 않도록, 글이 삶을 초과하지 않도록 조심한다."

테스를 읽으며 느낀 점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개개의 사람들을 독자적인 개인으로서 인정하고, 그들의 감정의 내면까지 포착하려는 시선이 따뜻하다는 점이었습니다. 안타까울 정도로 따뜻해서, 그들의 내면의 모순에 조차 비교적 관대합니다.

시대의 어두운 그림자와 개개인의 모순이 얽혀서 빚어내는 비극. 물론,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에 대해서는 잘못을 지적하고 그에 대한 비판은 정당합니다. 다만, 그것으로만 끝나는 것은 새로운 비극을 잉태하게 하는 또다른 잘못일 수 있습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러한 모순을 조금씩 가지고 있기에, 그에 대한 깊은 성찰이 없이는 비슷한 모순으로 인한 비극에 다시 한 번 휘말릴 수 밖에 없습니다.

토마스 하디의 이 작품은 그러한 성찰의 결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많은 등장인물 하나하나 매우 독특한 개성을 가지고 있지만, 각각의 사람의 마음들이 보여주는 것은 읽고 있는 나와의 차이점 만이 아니라, 공통점도 많이 느끼게 합니다. 좋은 면은 좋은 면대로, 부족한 면은 부족한 면대로.

때로는 알렉의 모순된 모습에서 제 자신의 불합리한 정념의 흔적을 볼 수 있었고, 때로는 에인절의 모순에서 제 자신의 위선의 껍데기를 볼 수 있었습니다.

때로는 테스 아버지의 모습에서 허명에 의존하려는 제 자신의 성향을 발견할 수 있었고, 때로는 테스 어머니의 모습에서 일상의 삶에 지쳐서 많은 것을 그냥 놓고 싶어질 때가 있었던 제 자신의 어떤 시절의 모습이 생각나기도 했습니다.

19세기 당시의 상황은 열린책들의 역자 후기에 간략하지만 깔끔하게 소개 되어 있었습니다. 새롭게 일어나는 자본주의 질서가 구시대의 가문 중심의 신분 사회를 서서히 붕괴시켜가고 있던 시절. 농민들이 자신이 경작하던 땅에서 쫓겨나 도시로 몰리게 되면서 노동자 계층을 형성하기 시작하던 시절.

그런 격변의 시대에 경제적으로 내몰리는 사람들에게 또다른 억압의 구조로 작용하던 구시대의 인습이 테스라는 아름다운 영혼을 모순된 존재로 만들고, 그 삶을 얽어매는 모습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과거의 모습이었습니다.

토마스 하디는 그러한 인습에 정면으로 부딪혀 갔던 용기 있는 작가였습니다. 1891년 테스 출간 이후로 무수한 비판에 시달렸지만, 1910년 국왕으로부터 공로훈장을 받는 등 결국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 무렵 유럽에서는 여성에 대한 참정권 부여가 하나의 이슈였습니다. 1905년의 핀란드를 시작으로 1918년의 영국에 이르기까지 여성에 대한 인습이 하나씩 제거되고 있었습니다. 토마스 하디는 그러한 시대의 흐름을 앞서서 제시한 작가였습니다. 거의 광야에서 외치는 선지자의 모습이었다고나 할까요. 우리가 그 시대의 인습을 과거라고 치부할 수 있는 것은 이렇게 먼저 외치는 자들의 용기에 힘입은 바가 적지 않구나 싶습니다.

토마스 하디에 대해서 테스 한 권 읽은 것 외에는 잘은 모르지만, 시대의 모순을 용기 있게 드러내는 이러한 작가로서의 결기의 바탕은 그러한 모순에 신음하는 개개의 인간에 대한 따스한 시선에서 기초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한 시선이 시대의 모순에 직면하게 하고, 도전해서 드러내게 하고, 그렇게 그 시대를 한 발자욱 더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타자에 대해 공감하고 안타까와 하는 마음들.
막말이 춤추고 약자에게 잔인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나라 사회에도 무척이나 절실합니다.

인상적인 구절들이 너무 많아 어렵게 추려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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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능하고 무기력한 남편을 찾아 이렇게 주점으로 행차하는 일은 아이들을 길러 내야 하는 힘겨운 일상에서도 더비필드 부인에게 아직 남아 있는 즐거움 중의 하나였다. 롤리버 주점에서 남편을 찾아내 옆에 앉아 한두 시간 정도 쉬면서 잠시 나마 아이들 생각과 근심에서 벗어나는 그 시간이 그녀를 행복하게 했다. 그러면 뭐랄까, 저녁 노을빛 같은 후광이 그녀의 삶 위로 어른거렸고 삶의 고통 그리고 팍팍하기만 한 수많은 현실들이 형태가 사라진 추상적인 모습으로 바뀌면서 잔잔한 마음으로 평화롭게 묵상을 할 수 있는 정신적인 현상이 되어 낮게 가라앉았다. 그러면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삶의 고통들이 딱딱한 결정체가 되어 몸과 영혼에 아프게 생채기를 내는 일은 없었다.

(테스의 어머니에 대한 시선이 이리 따스합니다.)

  겨울철 한밤중에 꽁꽁 동여맨 나뭇가지의 싹눈과 껍질 사이로 신음 소리를 내는 바람과 돌풍은 따끔하게 책망하는 소리였다. 비가 내리는 날은 어린 시절에 알고 있던, 하느님으로 분류할 수는 없지만 딱히 다른 것으로 이해할 수도 없는 미지의 어떤 윤리적 존재가 은근히 그녀의 나약함에 대해 슬픔을 표현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테스를 싫어하는, 자잘한 인습의 조각들로 만들어진 망령과 목소리들이 가득한 생각의 감옥은 그녀 본인의 상상에서 나온 유감스럽고도 잘못된 창작물이었다. 다시 말해서, 아무 이유도 없이 그녀를 공포로 몰아넣는 도덕이라는 허깨비들의 그림자였던 것이다. 현실 세계와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은 그것들이었지 결코 테스가 아니었다.
  테스는 나무에서 잠들어 있는 새들 사이로 걸어가면서, 달빛 어린 굴 위를 깡충거리며 뛰어다니는 토끼를 지켜보면서, 아니면 잔뜩 꿩을 힘겹게 떠받치고 있는 나뭇가지 아래에 서서, 스스로의 모습을 순수만이 존재하는 세계에 침입한 죄의 표상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줄곧 그녀는 전혀 차이가 없는 데서 차이를 만들어 내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이 다른 존재들과 적대적 상황에 있다고 느꼈지만 사실 그녀는 그들과 조화로운 관계를 이루고 있었다. 그녀가 어쩔 수 없이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질서를 깨뜨릴 운명이긴 했지만, 그리하여 이 자연 속에서 스스로를 정상에서 벗어난 존재로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 자연이 알고 있는 자연의 질서를 어긴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세례식을 치른 후 침착함을 유지했던 테스의 태도는 아기를 잃었을 때도 바뀌지 않았다. 테스는 한낮이 되자 아기의 영혼에 대한 자신의 공포가 조금은 과장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근거가 충분하건 아니건 이제 불안한 마음은 사라져 버렸고, 만일 하느님의 섭리가 그런 비슷한 행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원칙을 벗어난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한다면 그런 천국은 자신을 위해서나 또는 자신의 아기를 위해서나 중요하게 여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부당한 인습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작가의 결기가 느껴집니다.)

  그는 파스칼이 <지능이 높을수록 다른 사람에게서 각자의 다른 점을 이해하게 된다. 평범한 사람은 사람 사이의 차이점을 보지 못한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틀에 박혀 있는 것처럼 아무런 변화가 없는 촌뜨기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 촌뜨기들은 수많은 모습의 동료들, 여러 가지 생각을 가진 사람들, 무궁무진한 다양성을 지닌 사람들로 나뉘어졌다.

(에인절을 통해 드러나는,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작가의 따뜻한 시선이 느껴집니다.)

  집을 나설 때 들떴던 기분이 조금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이 처녀들 사이에 적개심이나 악의 같은 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너그러운 영혼들인 데다가 운명론이 강력하게 지배하는 한적한 시골 벽지에서 자랐기 때문에 테스를 원망하는 마음 따위는 없었다. 그렇게 뭔가를 빼앗기는 것은 그들에게 이미 예정된 운명이었던 것이다.
  테스는 마음이 아팠다. 자신이 에인절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다른 친구들 역시 그에게 마음을 뺏앗겼다는 걸 알고 난 후 더욱 절실해진 그를 향한 사랑을 그녀는 도저히 감출 수 없었다. 이런 감정은 특히 여자들 사이에서 전염성을 띠는 법이다. 하지만 그를 갈망하는 그녀의 마음속에는 친구들을 애잔하게 바라보는 감정도 들어 있었다.

(세 처녀의 마음들과 테스의 마음이 모두 그냥.... 뭔가를 빼앗기는 것을 당연한 일로 체념하는 모습들이 애잔합니다.)

  그러나 그들 두 사람 위로 드리워져 있던 그림자는 에인절 클레어가 느끼고 있던 것보다 더 짙었으니, 그건 바로 에인절 클레어라는 인간의 한계 때문에 생긴 그림자였다. 지난 25년의 세월이 훌륭하게 만들어 낸 이 진보적이고 호의적인 청년이 모든 일을 독립적으로 판단코자 기울였던 노력에도 불구하고 막상 뜻밖의 일에 놀라자 어릴 적의 배움으로 도망쳐 관습과 인습의 노예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이러한 에인절의 모습은 인간의 연약함을 고려하면, 지극히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바보스러움입니다. 인간은 그렇게  바보입니다. 자신의 경험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들에 대해서는 어쩔 줄 모르는 바보스러움은 영혼의 바닥까지 긁어내는 처절한 시련에서의 자기 성찰을 거치지 않고서는 극복 되질 않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그는 브라질에서 그러한 시련을 겪게 됩니다.)

  그는 그 문제를 에인절과는 완전히 다른 시각으로 보았고, 그래서 테스가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느냐는 것은 앞으로 그녀가 어떤 사람이 될 거냐는 것과 견주어 볼 때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녀를 두고 떠나온 클레어의 처사는 명백히 잘못된 거라고 말했다.
  그 다음 날 그들은 폭풍우를 만나 흠뻑 젖고 말았다. 이 동반자는 열병에 걸렸고, 그 주가 끝날 무렵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를 묻어 주기 위해 클레어는 몇 시간을 기다렸고, 그러고서 다시 길을 떠났다.
너그러운 마음을 소유했던 낯선 남자, 평범한 이름 외에 아는 거라곤 아무것도 없는 그 남자가 무심코 던진 말들은 그의 죽음으로 숭고해졌고, 철학자들의 온갖 논리적인 윤리보다도 에인절에게 더 많은 영향을 주었다. 에인절은 자신의 편협한 생각을 그의 생각과 비교하면서 스스로를 부끄러워했다.

(이 대목이지요. 브라질에서 에인절은 자신의 모순을 직시하고 그제서야 깨닫게 됩니다.)

  장대 하나가 탑의 돌출 부위에 꽂혀 있었다. 그들의 시선도 그 장대에 꽂혀 있었다. 시간을 알리는 소리가 나고 몇 분이 지나자 장대 위로 서서히 올라가며 미풍에 나부끼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은 검은색 깃발이었다.
  <정의>가 실현되었다. 아이스킬로스138의 말을 빌리자면, 신들의 수장은 테스와의 희롱을 모두 끝낸 것이다. 더버빌 가문의 기사와 귀부인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무덤 속에서 계속 잠들어 있었다. 묵묵히 이를 바라보던 두 사람은 기도라도 올리듯 땅바닥에 엎드린 채 한참을 미동도 없이 그렇게 있었다. 깃발은 소리 없이 계속 펄럭였다. 기운을 차린 두 사람은 일어나서 다시 손을 잡았고, 그리고 가던 길을 계속 갔다.

(손을 잡고 가던 길을 계속 가야하는 그들의 모습이 아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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