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항해시대의 동남아시아
앤서니 리드 지음, 박소현 옮김 / 글항아리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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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전반 50년 동안 식민주의 역사는 동남아시아를 서구의 위대한 팽창 과정에서 별다를 것 없는 배경쯤으로 축소하고 폄하했다. 반면 민족주의 역사는 아시아인을 행위자가 아닌 무력한 피해자로 묘사해, 오히려 식민주의 역사를 강화하거나, 지역 연구를 국제적 역학이나 비교로부터 고립시키는 식으로 문제점을 바로잡으려 애써왔다. 동남아시아인이 직접 쓴 사료를 발굴하고 접근 가능하게 만드는 영웅적인 과업을 시작한 것은 동양학 연구였으나, 이 잡학다식한 전통은 왕실 연대기, 종교적 주석, 서정적인 운문이 생산과 교환의 세계와 어떻게 만나는지 일러주는 길잡이가 되지는 못했다. - P17

‘대항해시대’는 익숙하다. 그러나 그 항해란 대부분 유럽에서 출발하여 아시아 등으로 뻗어나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유럽은 아시아에 대한 패권을 기반으로 향후 제국주의, 식민주의로 나아가게 된다. 그동안 과연 아시아의 관점에서 대항해시대를 바라본 시도가 있었나 생각해보면 떠오르는 것이 거의 없다. 이 책은 네덜란드가 동인도회사를 세워 동남아시아에 패권을 구축하기 전 16~17세기(길게는 15세기부터)의 역사를 동남아시아(남부인 도서부와 중북부의 대륙부)를 공간적 배경으로 전체사를 다루었다는 것이 핵심이다. 그동안 동남아시아사는 대부분 특정 도시사, 여행기, 지리사, 문화사 등으로만 접할 수 있었던 것 같다(원서는 더 있을지 모르나 번역서는 적어도 그렇다).

1권은 동남아시아의 환경(인종, 지리, 문화 등)을 다루고 2권은 대항해시대의 동남아시아 역사를 다루었다. 1권을 통해서 동남아시아의 지리적 환경과 사람들에 대한 이해를 충분히 한 후에 2권을 읽으면 역사의 과정에 대한 이해도를 더 높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지리, 문화적으로 동남아시아 남부 해안의 도서부 지역과 중북부 내륙 지역을 구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겠다(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베트남, 라오스, 미얀마 등지의 북부는 종교적으로 소승 불교를 믿었고 중국 문화의 영향이 강했다(특히 베트남). 반면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 등의 도서 남부 지역은 해안을 통한 외부와의 교류가 활발하여 이슬람교와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지역이었다.
빈랑, 의술에 대한 이야기 등을 먼저 짧게 언급해보면 빈랑은 가벼운 환각성 진정제로 빈랑야자 열매를 빈랑이라고 하는데 구장 잎(Piper betle)과 석회, 세 가지 재료를 함께 씹으면 붉은색 침이 많이 분비되어 뱉게 되는 것이다. 빈랑 씹기는 의례뿐 아니라 사회생활에서 핵심적인 요소였다. 동남아시아 의술은 약초를 섞은 음료와 목욕, 마사지로 이루어졌다(빈랑 씹기는 기생충으로부터 몸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경험에 의거한 민간 의술과 마술 등이 많이 쓰였다고 하는데 유럽인들의 시각에서는 비과학적이라고 보았겠지만 이들은 이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우기가 긴 동남아시아는 자연 환경에 의해 쉽게 무너질 수 있기 때문에 주거용 집은 나무로 건축을 했고 바닥을 지상에서 띄워 해충으로부터 보호했다(물론 스투파 등의 종교용 건축은 (벽)돌로 튼튼하게 지었다). 동남아시아 사람들은 목욕으로 몸을 께끗하게 하고 옷과 장신구를 통하여 치장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머리카락 또한 자기 표현 방식으로 생각했다 한다. 수공예, 금은공예, 도자기류나 금속류는 그들이 자연에서 준 선물을 바탕으로 제련한 상품이자 무기였다.
동남아시아는 상대적으로 여성이 강력한 자율성과 경제적 지위를 갖고 있었고 성 관계에서도 적극적이었으며 일부일처제에 이혼이 쉬웠다. 통치자가 여성인 경우도 많았으며 통치자를 보호하는 경호원 여성 부대도 있었다고 하는데 이것이 외부인들이 아마존 여전사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확대시킨 계기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저자가 대항해시대(교역의 시대. 개인적으로 대항해시대라고 하는 용어는 서구적 시각이 덧입혀진 것 같아 별로지만 그렇다고 교역의 시대라고 하기에는 다른 시대와 구별이 되지 않을테니 이렇게 쓸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는 것 같다)를 장기 16세기(15세기에서 17세기)로 잡은 이유가 궁금했다. 첫 번째로, 동남아시아산 후추, 정향, 육두구가 장거리 무역 품목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고 두 번째로는 동남아시아가 장거리 무역의 중심지이자 출발지 또는 경유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정향, 육두구는 유럽에서는 14세기 후반까지, 중국도 15세기 전까지는 구하기 어려워 귀하고 비싼 품목이었다. 정향은 1770년 말루쿠제도에서 독점 생산되었고 육두구는 18세기까지 반다 제도에서만 생산되는 품목이었다. 후추는 인도 남서부 케랄라가 원산지였는데 1530년경까지는 지역 자체에서만 소비되거나 중국에만 공급되다가 16세기 주변 지역까지 수요가 늘고 17세기가 되면 유럽 지역까지 퍼지게 된다.

1400년대 초 명나라 정화 원정을 시작으로 중국 시장을 겨냥한 작물 재배 수요가 늘며 동남아시아 교역이 활발해졌다. 이후 중국 사무역 금지 조치가 이루어졌지만 남중국해를 지나는 선박수가 늘고 포르투갈, 일본 산 은이 거래 수단으로 활용되면서 동남아시아는 핵심적인 중계 무역항이 되었다. 이때 포르투갈을 시작으로 네덜란드, 잉글랜드가 동남아시아 무역 경쟁에 가세하게 된다. 인도산 직물은 인도, 중동, 유럽으로 나가는 수출품 중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했는데 최고치 시기는 1510년과 비교하여 4배에 달하는 가격으로 거래되었다 한다(1680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주도하여 공급하면서 유입량이 절반으로 줄어든다). 동남아시아 정크선은 용골을 기반으로 쇠못을 쓰지 않으면서도 튼튼하여 유럽인들도 이를 보고 수준에 놀랐다고. 주로 남중국해 정크선은 중국인 공동체가 커지면서 선주가 되었고 동남아시아 기술자에 의해 만들어졌다. 해상 교역은 상인이 배를 직접 타고 일정 비율을 배 짐칸 사용료로 내며 물건을 파는 경우도 있으나 신탁을 이용해 나코다(대리인)에게 판매 대금 일정을 지불하고 물건을 판 나머지를 돌려 받는 형태로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내륙 교역은 강과 육로를 통해서 이루어졌는데 아무래도 빽빽한 삼림을 뚫고 지나가야 하는 경우가 많았고 강수량이 많아 불어난 강물로 위험을 감수해야 하여 험난했다.

무역 기반 도시로 권력이 이동하면서 도시는 지속적으로 성장한다. 특히 계절풍이 교차하는 곳인 말라카 해안 등은 자연스레 무역 네트워크가 형성되면서 도시가 형성되었다. 도시에는 부유한 외국 상인이나 봉신(귀족)이 몰려들었는데 귀족이 사는 단지는 자체 구역이 있어서 이를 중심으로 귀족에 딸린 하인들이 사는 가옥에 둘러싸인 형태가 되었다 한다. 성벽과 해자는 도시를 성장하게 하고 외부 공격을 막기 위해 특히 중요했다. 무역의 증대로 통화 유통을 중개하는 일을 업으로 하는 금융 조직, 국제 집단이 생겨났고 동남아시아 도서부 국가들에서는 무역하러 온 외국 상인이나 왕실과 무역상 중계인인 오랑카야가 상업을 지배하면서 귀족 위치를 차지한 이들이 있었던 반면 교역에만 전념하는 여성, 항해 상인 키위와 그 상위 지도자인 나코다가 있었다.
교역의 시대에 들어서면서 외부의 변화를 인식하게 된 동남아시아 사람들은 변화해야 한다 여겼다. 그러나 권위를 바탕으로 한 가부장 체제는 전통 신앙을 이끄는 주체인 여성보다 경전 종교를 이끄는 남성의 지배력을 상승시키려 했고 망자의 영에게 기도하고 재물을 바치는 행위에 대해서도 거부감을 느끼게 하는 등 경전 종교 수용에 일정 이상 어려움을 겪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서부 지역 통치자(와 가족)가 메카 성지 순례를 가고 율법 샤리아를 적용시키면서 이를 바탕으로 정치적 충성도를 매기려 하면서 이슬람 영향력은 확대되었다. 대륙부 동남아시아에서는 외부와의 교역이 시작되고 유럽의 군사력이 유입되면서 오히려 그들에게 저항하고자 하는 태도에서 이미 왕가를 중심으로 기득권을 차지하고 있었던 불교적 영향력이 더 확대되었다. 이렇게 1570년대부터 1630년대 필리핀은 그리스교도화, 동남아시아 남부는 이슬람화, 북부 지역은 상좌부(소승) 불교의 영향력이 강화되었다.

동남아시아 국가의 통치자들은 교역의 시대 무역 세입, 군사력 동원, 외교 등을 통해 역량을 동원하려 했는데 이것이 흥망성쇠의 결과로 이어졌다. 이 때 교역을 얼마나 빨리 선점하느냐가 핵심 요소가 되었다. 무역 세입은 교역 성장으로 인한 상업화와 화폐 경제를 이끌었고 총포와 무장갤리선은 왕의 지배력과 권위를 상승시키는 역할을 했으며 친서를 바탕으로 한 외교는 국가 인식과 무역 확대에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17세기(구체적으로는 1629년)에 들어서면 앞선 이유들 때문에 동남아시아는 쇠락한다. 이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먼저 유럽은 선상에서 강력한 화력을 지녔고 요새를 만들었으며 아시아인과 동맹을 맺으면서 우위를 선점했다. 구체적으로 1629년 동남아시아의 아체와 마타람이 유럽 세력에 패배하고 이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자리한 것이 원인이었다. 화물 운송을 책임 지던 버고의 몬족과 자바 북해안 파시시르의 자바인이 국제무역에서 사라진 것도 중요한 이유였다. 금은 공급이 축소되면서 전반적으로 세계 무역이 퇴조했고 전지구적으로 기온이 하락하면서 작황이 좋지 않았던 이유도 있었다. 유럽 세력이 밀려들자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자체 봉쇄를 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환금성 작물 재배를 중단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고 오히려 무역 이점을 떨어뜨리는 원인이 되었다. 명나라 정화 원정 이후 동남아시아 곳곳에 만들어진 중국인 공동체는 항구 밖에서 살다가 안쪽으로 이동하면서 국가 내 갈등을 빚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저자는 유럽과의 관계에만 집중하면 일부분 밖에 보지 못하는 결과를 낳는다 강조한다. ‘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밀어닥친 유럽에 밀려 몸을 사린 동남아시아가 패배한 것이다’ 등의 시각을 두고 하는 이야기다. 앞서 여러 이야기를 했지만 교역의 시대 동남아시아는 역동적인 흐름을 주도하며 세계 무역의 판도의 정점에 있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할 것 같다.

책은 과거에 나온 동남아시아 지리, 문화 등에 관한 자료를 바탕으로 유럽인의 기행문 등을 참고하여 쓰여졌다. 다만 있는 자료를 바탕으로 쓰여질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애초에 쓰여지지 않은 빈 공간의 자료는 상상으로 채워갈 수밖에 없어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저자도 그 점을 인정하지만 그마저도 지금까지 이렇게 동남아시아 관점에서 전체사를 조망하려는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이 책은 그것만으로 값진 책이 아닐 수 없다. 저자가 1,2권을 각각 마무리하는데 5년 정도의 텀이 있었다고 한다. 5년의 공백이 있었다고 하는 걸 보면 그만큼 자료를 취합하고 분석한 뒤 나름의 관점을 정리하는데 많은 애를 먹은 것 같다. 이 시기 역사를 균형적으로 바라보게 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책이 나와서 기쁘다.

교역의 시대의 특징은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이고 통합해내는 지속적인 혁신이었다. - P7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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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경제의 설계자들 - 국가 주도 산업화 정책과 경제개발계획의 탄생 역비한국학연구총서 40
정진아 지음 / 역사비평사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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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비총서 시리즈 전작을 읽은 뒤 독서 모임을 하면서 이 책이 다음 권임을 알게 되었다. 전권이 현대 한국 사회과학 형성의 계보를 정리했다면 이 책은 경제 정책의 초기 형성을 정리했다. 두 책을 연이어 읽고 나니 서로 보완되는 측면이 있어 책을 읽기를 잘했다고 생각한다. 


사상이란 역사적 현실에 대한 인간의 의식관념과 인식체계, 이를 기반으로 한 목적의식적인 사고 활동이다. 사상사는 역사적 현실 세계와 결부된 이러한 의미의 사상 전개와 그 발전사를 중심으로 역사상을 재구성하는 것을 말한다. 그럴 때 정책사상사 연구방법론이란 해방 후 현실에 대한 학자 및 관료를 비롯한 지식인층 일반의 인식체계 및 현실을 변화시키기 위한 정책구상과 이념을 파악하고 그 역사적 맥락을 체계화하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 - P26~27


앞선 사회과학의 계보를 정리할 때도 사상사적 방법론을 사용했지만 이 책도 그렇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그저 정책의 형성 과정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상사’가 역사적 현실을 담은 사상을 추적하며 역사를 재구성해나가는 것을 의미한다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도대체 담당자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자신의 이상을 현실 세계와 어떻게 절충시켜나갔는지 들여다보는 과정이야말로 그들의 인식 세계를 확인해보는 일이기 때문이다. 한국 경제 정책과 정책을 내놓은 관료들의 면모를 확인하다 보면 당시의 정치적, 사회적 배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자연스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저자는 정리 시기를 1945년부터 1960년대로 한정했다. 해방 후 일본의 영향력으로부터 미국의 압도적 영향 하에 들어선 뒤 한국이 자본주의의 경제로 정해지기까지를 구성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해방 직후 대부분의 국민들은 사회 복지, 균등 분배 경제 정책을 원했다. 그래서 정책 담당자들은 이를 고려하여 농업 분야는 지주 자본을 산업 자본으로 전환시키고 국가 통제하에 공업 생산력을 증강시켜 산업 구조의 불균형을 시정하는 것에는 합의했다. 다만 경제주의 주체를 누구로 설정할 것인가를 두고 우파는 자본가의 손을 들어주었다면 중간파는 중소농과 중소자본가, 노동자에 손을 들어준 것이 달랐다. 그래서 정부 수립 초기 경제 관료진은 기획처, 농림부에는 계획 경제론자들(중간파)을 기용하고 상공부, 재무부 등에는 자유 경제론자(우파)를 배치하여 균형을 맞추었다. 계획 경제론자들은 사적 소유를 바탕으로 한 공동 생산 협동 정책안을 구상했다. 그러나 정부 내부의 견제로 인해 정책은 조기에 좌절되었다. 자유 경제론자들은 소농체제를 육성하고 미국 원조를 바탕으로 통제를 최소화한 자유 경제 정책을 추진했다. 이에 따라 산업부흥 5개년 계획이 추진된다. 인플레이션이 심화되자 미국이 급브레이크를 걸었는데도 불구하고 남한 정권은 공산주의 투쟁과 산업부흥 정책을 병행한다. 하지만 미국이 원조를 차단함으로써 꼬리를 내린 정책론자들은 한미경제안정위원회를 설치하고 안정 추구 방향을 선언한다. 이에 따라 통화량 조절, 긴축 금융, 귀속재산의 급속불하, 조세증진을 통한 세입 증대, 정부 보조금 폐지, 통제 완화 등을 담은 경제안정 15원칙에 의거한 정책을 펼쳤다. 이로 인해 미국이 원하는 대로 인플레이션은 잡혔으나 산업은 오히려 위축되었고 소비재 산업에 급속히 자금이 몰리면서 산업 구조의 불균형 문제가 생겨난다.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전쟁 특수로 물가가 대폭등하여 정부는 비상이 걸린다. 유엔금이 준 대여금과 세입 마련을 위한 한국 은행 차입은 인플레이션을 더 심화시켰고 물가를 더 폭등시키는 악순환이 되었다. 이에 정부는 통화 증발을 억제하고 유엔이 준 대여금을 상환하고 통제 경제 정책을 실시하며 미국에 원조를 요청하자는 방안을 내놓는다. 필수 민생 부분에 한해 국가가 물자와 자금을 알선하고 통제하고 그 외 분야는 자유롭게 하겠다는 관리 경제 방침을 발표한다. 이는 개인 기업을 성장시켰으나 국공엽 기업체가 부진을 겪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전시경제 정책을 맡은 담당자들은 재무부국장 백두진, 차관 김유택, 이재국장 송인상, 회계국장 박희현이었다. 이들은 인플레이션 수습을 위해 수입 내 재정 지출을 하는 초긴축 정책을 실시했다. 이로 인해 정부 재정의 적자는 더 발생하지 않았으나 애초부터 자본금이 없는 중소자본가는 힘들어지고 지주, 농민에게는 해택이 없어 불합리한 방식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정부는 1952년 말 유엔금 대여금에 지불 능력이 없다고 미국에 통보하고 대여금 청산을 위한 통화 개혁을 단행을 발표한 뒤 이를 실시한다. 1953년 2월 미국은 한국의 성의를 감안하여 대여금을 완전히 탕감한다. 1951년 6월 주한 ECA 원조가 끝나고 한미경제안정위원회 운영이 중단되면서 한국 정부와 유엔사령부 합의 하에 합동경제위원회가 설치되었다. 1952년 상공부 주도 하에 시행된 상공생산종합계획은 전쟁 물자 생산을 밑받침하기 위한 단기 계획 성격을 띤 정책이었다. 재건기획팀은 기획처장에 원용석과 상공부장관에 안동혁을 중용한 뒤 기획처와 물동계획국 주도하에 기간산업 복구를 위해 장기계획인 부흥물동계획을 세웠으나 원조액 대부분이 재정 적자인 정부에 쓰여지면서 정작 부흥 정책에 쓰여지지 못했다. 


한국전쟁이 끝나자 이념 체제 경쟁에 따라 남한은 자본가들에게 힘을 실어주어야 한다는 자유경제론자들의 입김이 거세졌고 미국이 국유화, 사유재산권 제한을 명시한 제헌 헌법 조항을 문제 삼으면서 개헌의 목소리가 높아진다. 경제위원회는 국영기업체 지정을 해제하고 민유민영방침을 내세우며 이를 위한 자본은 한국 산업은행의 융자로 확보하고 차후 민간에 양도한다는 방침을 내세웠다. 이승만 정권은 경제조정관에 김현철을 기용하고 한일관계 개선과 재정금융 안정을 하는 대신 미국에 기간 산업 건설에 쓰겠다며 원조증액을 요청했다. 이때 백두진이 물러나고 3년간 중지중이었던 합동경제위원회가 재개되면서 정례화되었다. 

1956년부터는 전후 재건을 마치고 정부에서도 경제 자립과 부흥을 위한 정책으로 경공업과 중공업의 동시 발전을 병행하기로 한다. 이승만은 자유당 국회의원인 인태식을 재무부장관에 기용하고 미국에 대충자금을 요청했으나 미국은 요청을 거절한다. 인태식은 산업자금을 위해 정부가 가진 달러를 팔기 위한 산업부흥국채를 발행하자고 제안하는데 유엔사령부 경제조정관 윌리엄 원은 이에 딴지를 걸며 산업자금은 대충자금이 아닌 다른 곳에서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 결국 김현철이 이를 중재하며 산업부흥국채 집행은 세입 한도 내에서만 가능하도록 한다. (1957년부터 시행된 이 정책은 이승만이 퇴진하는 1960년까지 계속되는데 이는 갈수록 산업 수준을 하락시키고 제조업의 불황을 초래하였으며 대기업과 정부의 유착 관계를 심화시키는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했다.)


1957년 김현철의 뒤를 이어 송인상이 부흥부 장관 겸 경제조정관에 취임했다. 부흥부는 처음으로 여론을 참고하여 장기경제개발을 위한 기관으로 부흥부경제개발위원회를 설치하고 전문가를 물색했다(그전까지는 정부 입맛대로 기용했다는 이야기).  미국에서 산업 기금을 확보한 뒤 1958년 경제개발위원회를 산업개발위원회로 이름을 바꾸고 분야별 전문성을 고려하여 위원들을 선정한다(정부에 비판적인 인사도 두루 포함시켰다). 이렇게 시작한 경제개발 3개년 계획은 1차로 생산력 증강과 국제수지 개선을 1차 목표로 했다. 경제개발 3개년 계획은 향후 경제개발 7개년 계획의 프리로드 성격을 갖는 것이었으며 향후 자립경제 체제 확립을 조성 기반이 되었다. 


이처럼 한국 경제는 자본주의 계획경제 정책과 관리경제 정책, 자유경제 정책이 각축하고 경합하는 가운데 그 기본 구조가 형성되었고, 그것이 한국 경제의 역동성을 만들어낸 요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본가 중심으로 정초된 한국 경제정책의 계급적 성격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당시 정책 담당자들은 원조자금이 들어오는 동안 공업화와 생산력 증진에 매진함으로써 경제자립을 달성하려고 했다. 관민협조, 노자협조 이데올로기 속에서 자본가들은 생산력 증진의 주역으로 상정된 반면, 농민과 노동자들은 작업장과 마을 단위에서 자활과 자립을 통해 국책에 부응하는 존재로 규정되었다. 또한 전후재건사업과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한국 경제는 국민생활수준의 향상 및 분배와 계급 문제 해결을 후순위로 돌린 채 경제성장을 고도화하는 방향으로 설계되었다. 정부와 자본가의 유착관계가 심화되는 가운데 노동자, 농민의 삶은 피폐해졌다. - P377


그 결과는 역사가 말해주듯 4.19혁명이었다. 미국의 역할도 한국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게 컸음은 앞선 바대로다. 경제 관료들의 정책에 미국의 입김과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고 한국전쟁은 해방후 사회분배와 평등정책이 더 우선이었던 상황에서 미국식 자본주의에 의거한 자유경제로 완전히 들어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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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시아의 사회·경제체제를 봉건제나 노예제로 보는 것은 옳지 않다. 유럽의 봉건제와 노예제의 핵심에는 국가와 교회 등이 인지하는 법적 종속이 있었다. 중세 유럽과 고대 로마의 도시에는 법적으로 인정되는 자유의 조건이 있고, 이 조건은 자본 축적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자본 축적은 마침내 자본주의의 등장을 이끌어냈다. 이와 비교해보자면동남아시아의 체제는 더 개인적이고 금전적이었다. 법보다 충성이 중요하고 모두에게 주인이 있었다. 돈은 채무를 통해 사람의 충성을 사는 데는 유용했으나, 일시적인 임금으로 노동력을 사는 데는 무용했다. 자본을 보호하고 사용할 하인을 모으지 않고 자본을 축적하기란 가능할지는 몰라도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 P203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혼전 성관계, 일부일처제와 정절(이혼으로 쉽게해소되는), 여성의 강력한 지위 등 성관계의 전반적인 양상은, 교역의 시대에 동남아시아에서 점차 세력을 키워나가던 세계종교와 여러 가지로갈등을 빚었다. 가장 첨예한 갈등은 이슬람 율법과의 충돌이었다. 이슬람 율법은 여성을 법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남편에게 의존적인 존재로만들고, 여성이 이혼을 요구할 권리도 철저히 제한했다. 혼전 성관계(지 - P229

나zina) 또한 아주 엄하게 처벌받았기 때문에, 최근까지도 아랍 부모들은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을 막으려고 딸이 사춘기가 되면 곧 결혼시키는 경향이 있었다. - P230

도서부 동남아시아에 관해 주장하고 싶은 바는 서기 1000년 이전에종교적 문헌을 읽을 목적으로 인도에서 문자체계가 처음 들어온 것이분명하겠지만 수마트라, 남술라웨시, 필리핀의 여러 지역에서는 상당히다른 일상적 목적으로 전파되었다는 것이다. 16세기 이슬람교와 그리스도교의 확장 이전에는, 세계 어느 곳에서보다 여성이 상업과 사회 면에서 능동적이었던 애니미즘 문화에 의해 문자 체계가 받아들여졌다. 여성은 글쓰기를 남성만큼이나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서신을 주고받고 여성의 영역이던 채무와 상거래 문제를 기록했다. 따라서 문자 교육과 전승은 가정의 영역이자 대개 어머니와 손위 자매의 책임이 되었고, 배타적인 사제계급과는 아무 관련 없는 일이었다. - P314

교역의 시대는 바람 아래의 땅에서 엄청난 변화의 시기였다. 문화와교육의 형태, 대중 신앙, 법체계, 심지어 의복과 건물의 양식까지, 교역도시들은 자신들이 중심이었던 공동체들을 개조했다. 이런 점에서 이 시기는 이 연구가 그 시작점도 변화의 방향도 세계의 다른 지역과 유사할 것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명확히 해왔음에도) 유럽에서 유사한 시기인 르네상스 시대와 비교할 만하다. - P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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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역사는 이음매 없이 짜인 거미줄과 같아서 역사의 어느 한 부분을 따로 떼어내 얽힌 맥락을 제거하기란 불가능하다. 특히 ‘바람아래의땅‘처럼 국제 교역과 긴밀하게 얽힌 부분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이지역을 연구하는 우리는, 그 연결성을 인식하는 동시에 동남아시아인을스스로의 역사적 무대에서 구경꾼으로 만들지 않기가 무척 어려운 것을 잘 안다. 20세기 전반 50년 동안 식민주의 역사는 동남아시아를 서구의 위대한 팽창 과정에서 별다를 것 없는 배경쯤으로 축소하고 폄하했다. 반면 민족주의 역사는 아시아인을 행위자가 아닌 무력한 피해자로 묘사해, 오히려 식민주의 역사를 강화하거나, 지역 연구를 국제적 역학이나 비교로부터 고립시키는 식으로 문제점을 바로잡으려 애써왔다.
동남아시아인이 직접 쓴 사료를 발굴하고 접근 가능하게 만드는 영웅적인 과업을 시작한 것은 동양학 연구였으나, 이 잡학다식한 전통은 왕실연대기, 종교적 주석, 서정적인 운문이 생산과 교환의 세계와 어떻게 만나는지 일러주는 길잡이가 되지는 못했다. - P17

역사학자들은 식민지 이전 동남아시아에 관한 극히 부실한 사료에서 도출한 부정확한 통계 수치는 사용하기를 꺼려왔는데,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일정 수준의 수량화 작업 없이 특정한 시기나 지역을다른 시기나 지역과 비교하거나, 동남아시아 자료를 유럽이나 중국처럼누적된 연구 자료가 많은 지역의 더 정교한 사회사와 연결시키기란 불가능하다. 파편적이고 모순되는 여러 자료에서 특정한 수치를 도출하는데는 큰 위험이 따르며 오류가 생길 가능성 또한 상대적으로 높다. 그러나 전근대 유럽 사회사도 정도만 다를 뿐 비슷한 문제를 겪었으며(이 분야에는 상반되고 모순되는 사료가 더 많다), 주저함과 망설임으로 가득한 초창기 이래 거둔 성과에 이제는 아무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 P39

쌀이야말로 동남아시아 최대의 교역 품목이었으므로, 동남아시아 교역의 근간이 사치스럽고 "아름답고 쓸모없는 물건이라고 본 판 뢰르의가정"은 옳지 않다. 쌀 수출이 충분하지 않았다면 생산의 문제가 아니라 보관과 유통의 어려움 때문이었다. 큰 도시 지역의 쌀 소비 시장이출현하면 쌀 생산지는 금방 뒤따라 생겨났다. 북수마트라의 근세 이래쌀 잉여 생산지인 적 없었던) 델리가 연간 쌀 300톤을 생산해 1640년대에전성기를 누린 아체에 쌀을 공급했던 것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네덜란드의 봉쇄나 지역 경제 위축으로 쌀 수입량이 줄어들면, 1650년대아체와 1630년대 반튼 주변에서 그랬듯 인근에 벼 재배지가 생겨났다. - P55

새로운 국가 대부분에서 국가적 양식을 재정의하는 과정은 종교적 변화와 밀접하게 관련되었다. 이슬람교와 그리스도교의 수용은 거의 예외없이 복식뿐 아니라 머리 모양, 몸치장에 변화를 가져왔다. 여러 종족에 - P140

게(자바인은 아니지만) 말레이식 문화적 타협이 이슬람 복식으로 받아들여졌다. 기본적인 사롱 위에 여성은 바주나 크바야 같은 상의가, 남성은비슷한 헐렁한 웃옷과 두건이 더해졌다. 여성용 스카프(슬렌당selendang)는 다른 용도로 살아남았다. - P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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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신민족주의 전환기에 『국체의 본의』를 읽다 히토쓰바시대학 한국학연구센터 번역총서 1
히토쓰바시대학 한국학연구센터 기획, 형진의.임경화 엮음, 다카하시 데쓰야 해설 / 어문학사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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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체의 본의』는 일본의 다이쇼 데모크라시나 천황기관설 등의 대항 사상을 배척하고 메이지의 왕정복고에 내재된 신화적 국가관을 전면적으로 전개하여 국가 공인 사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내세운다. 1937년 이 책이 간행된 해 중일전쟁이 발발했고 이후 태평양 전쟁으로 확대되며 국가총동원체제가 이어졌기에 시점이 절묘하다고밖에 없다. 

신화적 국체관을 받들고 세계대전으로 향한 일본 체제는 패전으로 붕괴했다고 생각했지만 오늘날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일본 주류사회는 헌법 개정을 통해 내부의 위기를 외부로 돌리며 평화 헌법을 부정하고 보통 국가라는 허명 아래 전쟁 국가로 나아가려하고 있다. 극우정권을 후원하는 단체인 일본회의는 국체 이데올로기를 신봉하는 전형적인 예다. 

1945년 12월 15일 GHQ에 의해 금서로 지정되었던 이 책은 2009년 사토 마사루의 『일본국가의 신수: 금서 「국체의 본의」를 해독하다』가 출간된 이후 해설서와 번역서, 관련 저서 등이 쏟아져 나오는 모양이다. 언론과 미디어도 이에 호응하며 과거의 영광을 복기하고자 한다.


이 책을 장바구니에 넣어두고도 사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고민했다. 책을 읽으면 '무슨 헛소리야'하는 소리가 나오면서 분노할 수밖에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대체 말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확인하는 차원에서, 조선 식민지 체제의 영향이 여전히 잔존하고 있고 극우 파시즘이 판을 치는 지금의 시기에 미루지 않고 읽어야 한다고 여겼다.


책이 출간될 무렵의 배경을 생각해보아야 할 것 같다. 

일본은 서양 문물의 급격한 흡수로 인해 전통이 흔들리는 것을 경계했다. 서양의 개인주의, 자아 주장, 자유 주의를 비판하며 집단(그러니까 가족, 국가)을 강조한다. 가정에서는 집이 나라이고 충효는 모든 선의 근본이라 주장한다.  

일본은 가마쿠라 시대에 송(宋)학이 수입되고 선(禪)학이 유행하면서 대의 명분론과 국체론이 발흥하기 시작했다. 도쿠가와 막부 시대에 주자학을 채용하면서 신도사상을 바탕으로 한 국학이 성립하고 발전하는 배경이 되었다. 


신을 받드는 것, 정치를 행하는 일의 근본은 같다.

천황을 만세일계의 황통에서 나와 신민이 천황을 섬기는 것은 의무도, 힘에 굴복하는 것도 아닌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추앙과 순종이다.

충효는 천황을 섬기는 관계에 핵심이며 일본은 가족국가이고 황실은 신민의 종가다. 

신심은 죄와 부정을 씻고 사를 버리고 공에 합치되어 개인을 버리고 국가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참된 자기를 살리며 국가에 봉사로써 남을 동화시키는 힘을 키워야 한다(몰아동화).

무사도는 정직, 근본, 바른 모습을 지닌 사람이다.


간단히 책의 핵심 내용만 추리면 이 정도가 될 것 같다. 사실 더 많지만 말만 바뀌었지 반복되는 내용이 많다.


스진 천황(10대) 시대에 사도장군을 지방으로 보낼 때 다음과 같은 조칙이 나와 있다.

"... 도읍에서 멀리 떨어져 천황의 위엄이 미치지 않는 지방의 백성들은 아직 법도를 지키지 않고 있다. 이것은 아직 왕화에 익숙하지 않은 탓인가. 이에 경들을 선발하여 사방으로 보내니 짐의 법도를 알리라." - P48

국토 경영의 정신이라며 천황의 위엄이 퍼지지 않은 곳은 이를 교화시켜 바꾸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 교묘한 숨은 논리에 날이 설 수 밖에 없다.


읽으면서 당황스러운 부분이 많았다. 예를 들면 무사도는 정직, 근본, 바른 모습을 바탕으로 하여 남을 살리기 위한 일이라는데 과연 그런 것인지. 그들이 말하는 국민성과 국민 정신은 진심과 조화라는데 과연 그런 진심이 어디에 표출되었는지 말이다. 힘에 굴복당하지 않기 위해서 남을 굴복시키는 것이 옳은 일인가 따져 묻게 된다. 


마지막 인용구가 나는 참으로 의미 심장했다. 공교롭게도 메이지 유신에 관한 책을 읽고 이 책을 읽으니 더 그렇게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과거의 폭력과 전쟁을 향수로 미화하려는 시도를 앞으로도 계속 경계해야 할 것이다.

창조는 항상 회고와 하나가 되고, 복고는 항상 유신의 원동력이 된다. - P131


충은 천황을 중심으로 받들고 천황에게 절대 순종하는 길이다. 절대 순종은 나를 버리고 사사로움을 멀리하여 오로지 천황에게 봉사하는 것이다. 이 충의 길을 행하는 것이 우리 국민의 유일한 살 길이고 모든 힘의 원천이다. 그러므로 천황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은, 이른바 자기 희생이 아니고, 소아를 버리고 크신 능위에 살면서 국민으로서의 참 생명을 떨쳐 일으키는 것을 의미한다. ... - P55

효는 동양 도덕의 특색이지만, 그것이 나아가 충과 하나가 되는 점에 우리나라 도덕의 특색이 있고, 세계에 그 유례를 볼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무사의 선언이 그 집안이 황실에서 나온 것을 선언하고, 또한 가헌이나 가훈이 황실을 섬기는 관계를 그 먼 기원으로 삼은 것은 완전히 동일한 도리에서 나온 것으로 보아야 한다. - P67

우리 무의 정신은 살인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활인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 전쟁은 그 의미에서 결코 남을 파괴하고 압도하고 정복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도리에 따라 창조의 역할을 하고, 큰 조화 즉 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쇼와 천황 즉위식의 칙어는 다음과 같다.

"황조황종께서 나라를 세워 백성을 다스리실 때, 나라를 집으로 삼고 백성을 보기를 자식처럼 여겼다. 역대 천황은 대대로 그것을 이어받아 어진 정치는 온 천하에 고루 퍼지고, 만민이 서로 이끌며 군주를 공경하고 충성을 다하는 미풍으로 위를 섬기고, 상하가 진심으로 서로 느끼며 군주와 신민이 일체가 되어 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국체의 정화이고, 천지와 함께 영원 무궁히 존재해야 하는 바이다." - P76

우리나라의 신에 대한 숭경은 나라를 시작하신 정신에 바탕을 둔 국민적 신앙으로 서양의 신앙처럼 하늘이나, 천국, 피안, 이념과 같은 인간 세계에서 초월한 신앙이 아니고, 역사적 국민생활에서 나온 섬김의 마음이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제사는 지극히 넓은 의의를 가지는 한편, 완전히 국가적이고 현실생활적이다. - 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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