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형상화하기, 자코메티가 종종 말했듯이 삶이라는 이 경이를 형상화하기, 그것의 움직임을 형상화하고, 눈이 아니라 눈길을, 눈길과 그 눈길이 바라보는 모든 하늘을, 그리고 그 눈길 안에서 질주하는 삶을 형상화하기?그는 인간이 하는 어떤 일도 눈길의 광채만큼 가치 있지 않다고, 자신은 오직 눈길을 재현하기 위해 조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실패를 계속해야 했고, 고꾸라져야 했다. 결과에 대한 보장 없이 실패해야 했고, 그 모든 암중모색과 망침, 후회, 망설임, 엉김, 돌출, 사고, 비틀림, 추함, 자신이 견뎌낸 모든 실패와 불확실성을 작품에 담아야 했다.쉬지 않고 고집스레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왜냐하면 앞으로 나아가는 건 스스로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그저 자기 내면에서 나아가는 것일지라도.그는 계속 걸어야 했다. 걷는 행위가 어쩔 도리 없이 그를 끔찍한 난파로 이끌지라도.심장이 고동치는 한 걷고, 걷고, 걸어야만 했다.
허공에 사람들의 머리가, 공간에 에워싸인 머리들이 보였다. 내가 보고 있는 머리가 어떻게 정착될 수 있는지, 어떻게 시간 속에 확고하게 고정될 수 있는지 처음으로 명료하게 지각했을 때, 나는 살면서 그 어느 때보다 두려워 몸을 떨었고, 등줄기에서는 식은땀이 흘렀다. 그것은 더이상 살아 있는 머리가 아니었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은 다른 오브제들과 마찬가지인 하나의 오브제였다. 아니, 그것은 어떤 오브제와도 닮지 않았다. 산 동시에 죽은 무언가를 닮았다. 나는 공포의 비명을 내질렀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세계로 들어가는 문턱을 넘어선 듯한 느낌이었다. 모든 산 자들이 죽은 자들이었다. 이 환영幻影은 자주 반복되었다. 지하철에서, 길에서, 식당에서, 친구들 앞에서….
〈걷는 사람〉은 나에게 최종 목적지를 일깨워주었던 것이다.정확히 말하면 빠져나갈 수 없는 길을.그동안 내가 보기를 거부해온, 출구 없는 길을.종착역을.그것은 〈걷는 사람〉이 이미 발을 들여놓은 땅으로 내가 돌아갈 차례가 곧, 반드시 온다는 사실을 나에게 일깨워주었고, 그 생각은 나를 공포로 짓눌렀다.
〈걷는 사람〉은 우리에게 인간의 취약성만 말해주는 게 아니라, 그가 걷고 있는 땅의 취약성도 말해주는 것 아닐까?
그날 밤 나를 사로잡았던 불안의 원인들이 밝혀지자, 기이하게도 가장 단순하고 가장 친근한 일들이 중요해졌다. 산책하는 것, 20구 거리를 거니는 것, 콜리브리 카페 테라스 자리에서 진한 커피 한 잔을 마지막 커피 마시듯 마시는 것, 고양이 한 마리가 창가로 풀쩍 뛰어오르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 윌리엄 포크너의 《압살롬, 압살롬!》을 다시 읽는 것, 분홍빛 감도는 하늘로 날아가는 찌르레기 떼를 눈으로 좇는 것, 베르나르와 함께 아무 얘기나 나누고 르프레드Lefred의 그림을 보며 함께 웃는 것. 이 모든 사소한 일들이 나에게는 난생처음 접하는 행복처럼 보였고, 저녁까지 걷고 싶은 욕구를 안겨주었다.
예술은 사는 일이 우리에게 고통을 안긴다는 사실에 맞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그럼에도 한 가지는 확실하다. 예술이 우리의 기쁨과 삶에 대한 허기를 늘리기도 한다는 것. 예술이 죽음에 당당히 도전하거나 냉혹하게 우리에게 죽음을 상기하기도 한다는 것. 몸과 영혼이 포맷된 세상에 대한 우리의 거부를 날카롭게 만들기도 한다는 것. 시대는 더이상 불가능을 희망하지 말라고 엄명하는데 예술은 불가능을 좇는 우리의 취향을 자극하기도 한다는 것. 유용한 목적만 좇는 정신이 곳곳에서 우세할 때 예술이 무용한 것에 대한 우리의 취향을 되살리기도 한다는 것. 우리가 그것 없이는 살아가지 못하는, 꿈을 꾸고 자유로움을 갈망하는 강렬한 욕망을 다시 솟구치게 하기도 한다는 것. 우리가 유년기에 무척 좋아했던 색채들, 특히 빨강에 대한 취향, 잊어버린 취향을 우리에게 다시 안겨주기도 한다는 것. 형태와 사물에 대한 취향, 그것들의 소재와 빛에 대한 취향, 이 세계에 존재하지만 우리가 보지 못하는, 주어진 단순한 사물들의 아름다움에 대한 취향을 다시 안겨주기도 한다는 것.
우리가 인과관계를 부여하는 사건의 연쇄 또는 연결은 정확히 말하면 자의성(즉 특정 사건들 사이의 특정 연결을 특권적 연결로 삼는 다소 임의적인 선택)을 적용할 때만 나타나는 환원적 설명이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시장에 출시된 최신형 스마트폰을 원하는 것은 단순히 그가 부유한 동료에 대한 열등감의 희생자여서, 혹은 그 스마트폰의 특정 기능이 그에게 필요해서일 수 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이유 모두 사실일 수 있으며, 위계질서 없이 공존할 수 있다. 따라서 특정 사건들 사이 특정 연결에 특권을 부여하는 선택은 자의적일 수 있으며, 이 자의성은 현실의 왜곡이므로 가능한 한 적어야 좋다.
ANT는 라투르가 비서구 문화가 아니라 서구의 근대 문화(특히 과학기술)에 인류학적 분석을 적용하면서 시작되었다. 라투르는 여기에 그레마스의 기호학적 접근을 결합해 인간과 비인간의 이분법을 벗어난 탈인간중심적 사회과학의 길을 처음 열었다.
‘번역’이란 용어는 미셸 세르(Michel Serres)의 ≪헤르메스(Hermes)≫ 3권에서 빌려 온 것이다. 세르는 정보 이론을 바탕으로 번역이 신호를 전송하고 왜곡하는 의사소통 행위라고 보았지만, 칼롱과 라투르는 이 개념을 존재론적으로 재해석해 특정 존재가 다른 존재들의 대표자 또는 대변인으로 등장하는 끊임없는 재배치를 설명한다.
행위자와 연결망은 항상 함께 존재하기 때문에 둘 사이에 하이픈이 붙는다(actor-network). 행위자는 분해될 수 있으며, 그 구성 요소들은 해체되고 재조립될 수 있다. 따라서 행위성(agency)은 개별 행위자에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연결망 또는 ‘집합체’ 내에 분포해 있다. ‘누가 또는 무엇이 행위 하는가’는 특정 연결망에서 어떤 효과가 생산되는지 조사해야만 파악·결정할 수 있는 경험적 문제다.
라투르는 근대성에 대한 학계의 상식과 달리 "우리는 결코 근대적이었던 적이 없다"는 도발적 명제를 제기했다. 근대인들은 이원론적 세계관을 지녔음에도 ‘번역’ 작업을 통해 인간과 비인간을 계속 혼합했지만, ‘정화’ 작업으로 이러한 하이브리드의 존재 가능성을 부정함으로써 오히려 하이브리드들의 증식을 가속해 왔다.
근대적 헌법에서 벗어나기 위한 ‘사물의 의회’ 개념은 인간과 비인간의 공동세계인 코스모스를 점진적으로 구성하는 정치, 즉 ‘코스모폴리틱스’의 제안으로 이어진다. 이는 어떤 존재든 당혹→협의→위계화→제도화의 정당한 절차를 거쳐 집합체의 구성원이 되는 제도를 통해 실현될 수 있다.
코스모스는 인간이 다른 인간들 그리고 비인간 존재들과 공유하는 하나의 지구를 나타낸다. 코스모스 개념은 지구에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존재들이 있으며, 인간뿐 아니라 비인간들에게도 정치적으로 고려해야 할 다양한 이해관계가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함축한다.
라투르는 사회를 잘 식별되고 분리된 영역으로 간주하면서 ‘사회적 행위’에 대한 이해와 ‘사회적 사실’에 대한 설명을 사회학적 용어로 제공하는 과학인 전통적 사회학을 ‘사회적인 것의 사회학’이라고 부른다. 반면 그 대안인 ‘결합의 사회학’은 다양한 결합들을 추적하고 그 결합들의 안정화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분석해 사회적인 것을 형성하는 집합적 과정을 재조립하는 데 관여한다. 이런 결합의 사회학을 가리켜 라투르는 ‘행위자-연결망 이론’이라고 부른다.
라투르는 과학을 ‘상대화’하지 않으며, 과학이 ‘단지 다른 형태의 믿음’, ‘또 다른 문화’라고 비난하지도 않는다. 그는 탈근대주의자도 아니고 상대주의자도 아니다. 다양한 존재양식들을 각각 ‘그 자체의 용어로’ 조사할 수 있도록 허용할 뿐이다. 라투르의 존재론은 과학의 가치를 격하하는 것이 아니라 근대인들이 소중히 여기는 다른 가치들을 격상한다. 그것들은 각각 그 자체의 용어로 표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이아’라는 이름은 그리스 신화에서 유래한다. 소설가 윌리엄 골딩(William Golding)은 과학자인 제임스 러브록에게, 생명체들이 지구의 대기(더 구체적으로는 지구에 생명이 존재할 수 있게 하는 산소 수준과 이산화탄소 수준의 균형)를 조절한다는 그의 가설을 부를 이름으로 ‘가이아’를 제안했다. 유기체들 대신 생물권을 자연 선택의 단위로 간주한 것에 대해 진화생물학자들에게 비판받았던 러브록은 나중에 가설을 수정해 가이아 이론을 발전시켰다. "간단히 말해 유기체들과 물질적 환경은 단일한 결합적 시스템으로 진화하며, 현재의 생물군이 무엇이든 그들이 거주 가능한 상태에서 기후와 화학의 지속적 자기조절이 이 시스템으로부터 창발한다."(Lovelock, 2003: 769
러브록이 근대의 과학적 세계관에 의존해 이 존재들의 집합체를 인간 활동에 의해 방해받을 수 있는 자기조절시스템으로 이해했을 때, 라투르는 러브록을 따라하기를 완전히 멈추고 그러한 ‘메타디스패처’는 없다고 단호히 주장한다. ‘타자로서의 존재들’, 즉 "공약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모든 것은 결합될 수 있고 결합되어야만 하는가"(Latour, 2013: 461)라는 질문을 자극하는 존재들로 이루어진 다원적 집합체(plural collective)만이 존재한다. 우리는 ‘가이아’에 대한 호소가 우리를 통합시켜 주거나 인간과 비인간의 가장 포괄적인 공동 이익을 대변할 수 있다는 환상을 가져서는 안 된다.
인종적 우월성의 수사학을 주장하는 서구 정당들의 대두는 단순히 낡은 파시즘으로의 회귀가 아니다. 이들 현상은 우리의 근대적 제도와 습관이 지구가 인간 활동에 폭력적으로 반작용(react)하고 있다는 사실에 응답할 능력을 결여하기 때문에 초래되는 독특한 결과다. 이러한 곤경 속에서 라투르는 인류에게 "우리의 정치적 정동이 새로운 목표로 향할 가능성을 모색할 것"을 촉구한다(Latour, 2018: 2).
생태화 정치는 더 이상 마르크스의 생산 시스템 분석을 통해 사유할 수 없는데, 그 분석이 자연을 인간 활동의 맥락이자 자원으로 간주하는 근대적 관념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그 대신 라투르는 우리가 생성의 실천들(practices of engendering)을 통해 사유하고 행동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생산’은 자원들로 이루어진 주어진 세계를 당연하게 여기고 그로부터 시작하지만, ‘생성’은 먼저 이들 자원과 그것들에 의존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이 태어난 이 세계가 계속 존재하도록 허용하는 것은 무엇일지 고려하는 가이아적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기후변화가 문제인 이유는 그것이 ‘생산’(즉 경제 성장)에 충격을 가할 뿐 아니라 가이아의 거주 가능성 조건을 급격히 변형해 ‘생성’ 자체를 위협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슐츠는 라투르가 말한 ‘생성의 실천들’ 속 계급들이 생산 시스템에서 차지하는 경제적 위치에 의해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생성의 과정에서 차지하는 영토적 위치에 의해 정의된다고 본다(Schultz, 2020). 따라서 단지 경제적 자원에 대한 접근에 의해 정의되는 사회적 계급들과 달리, 지구사회적 계급들은 사회 집단들의 번영과 생존을 허용하는 더욱 광범한 존재의 물질적 조건들(땅, 식량, 물, 옷, 집 등)에 대한 의존과 접근에 의해 정의된다.
마르크스에게 인간의 생존과 재생산은 모든 사회와 그 역사의 제1원칙이었다. 따라서 인간 사회와 사회적 역사에 대한 분석의 첫 번째 단계는 필연적으로 사회와 인간 집합체들이 생존할 수 있게 하는 물질적 조건들(사람들이 먹는 음식, 마시는 물, 입는 옷, 사는 집 등)과 그것들이 출현하게 된 과정을 명확히 하는 것이었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재생산의 물질적 조건들을 생산하는 것을 사회적 역사의 토대로 간주했다. 그러나 그것은 주로 인간 존재들의 재생산에 한정된 것이었다.
계급 투쟁은, 오늘날 다시 명백해지듯 언제나 지구사회적 갈등의 얽힘이었다. 경제화를 통해 이를 협소하게 틀 짓는 것은 지구적 존재들(인간 포함)을 위한 공간을 마련할 수 없기 때문에 더 이상 적절하지 않다. 따라서 생태계급은 경제화 대신 거주 가능성 문제를 제기한다.
정치신학은 현대의 공적 공간 한복판에서 작동하는 종교에 대한 비전으로, 자신의 행위성이 남긴 발자취에 민감하고, 더 크고 새롭게 출현하는 전체의 구성 요소로서 자신의 책임을 인식하며, 따라서 세계에서 완전한 정치적 행위자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인간 주체들을 생성한다.
라투르는 종교의 존재양식을 ‘생존’의 관점에서 정의하면서 종교가 세상에 내재된 자신의 상황에 대한 ‘돌봄’과 ‘주의’라는 윤리적 태도를 낳는다고 주장한다. 아울러 종교는 존재의 내재적 조건들에 충실한 행위를 요구하며, 미래의 궤적을 결정하는 자신의 역할에 대한 책임감을 키워 준다고 본다. 라투르는 오늘날 우리 모두가 직면한 생태적 도전 때문에 종교가 만들어 내는 이러한 윤리적 태도가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오직 종교적 존재양식만이 인류세 시대에 필요한 정치 활동 양식을 창출하고 배양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어떤 견제세력으로? 어떤 맞불로? 감지하기 힘들고 무시무시할 정도로 도처에 편재하는 그 힘에 맞서려면 어떤 전투를 벌여야 할까? 싹을 틔우기도 전에 바로 질식당하고 소멸해버리지 않으려면 어떤 싸움을 걸어야 할까? 어떤 틈새를 파고들고 어떻게 우회할까? 어떻게 넘어설까? 어떤 식으로 훌쩍 도약해야 지구 전체를 쓰레기로 뒤덮어버린 그 시스템을 넘어설까?
그것은 우리 인간의 무한한 고독과 무한한 취약성을, 취약하지만 삶을 이어가려는 끈질긴 고집을, 분별없이 삶에 집착하는 고집을 보여준다.〈걷는 사람〉은 꼼짝 못하게 굳어 있는 동시에 움직이는데, 그 움직임이 마치 넘실대는 순간 추위에 얼어버린 바다의 파도 같다.그는 고독하다, 절대적으로 고독하다. 도무지 속을 파고들 수 없을 정도로 닫혀 있으며, 자기 안에 깊이 틀어박혀 있어 가 닿을 수가 없다.
그는 앙상하지만 무겁다. 아마도 홀로코스트와 부헨발트 수용소의 희생자들에 대한 앎으로 무겁다. 그는 늙었고, 시련의 흔적이 역력하다. 삶의 전장에서 무수한 타격을 입고 돌아와 기진맥진해 있다.그는 세상의 무게에 등이 휘었다. 어쩌면 세상을 그렇게 만든 것이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고 있는지도 모른다.그는 무한히 취약하다. 한 포기 풀처럼, 잔가지처럼 취약하다. 그토록 무력하고, 그토록 보잘것없다.
그는 소멸 직전이다. 어쩌면 죽음의 문턱에 서 있는지 모른다.그럼에도 그는 걷고, 걷고, 걷고, 걷고, 걷고, 계속 걷고, 용감하게 계속 걸으며 앞을 똑바로 응시하고, 성큼성큼 걷기를 계속하고, 주춤거리지 않고, 잔유물들의 세계 속에서 쉬지 않고 걷는다. 무의미에도 불구하고, 희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부조리에도 불구하고, 절대적 고독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의 폭력성에도 불구하고, 만물의 덧없음에도 불구하고, 예고된 온갖 종말론에도 불구하고 계속 걷는다. 걷기를 멈춘다는 건 곧 죽음을 뜻하므로. 바람과 패배에 맞서 계속 걷는다. 자코메티처럼, 나처럼, 우리처럼.
라틴어로 레젠다legenda인 전설은 읽혀야 하는 것, 따라서 기억해야 하는 것, 우리가 금박을 입히거나 검게 칠해서 영원히 잊지 못할 것으로 만드는 진실이다.
자코메티에게 예술은 모든 화려함과 풍요로움에 맞서 저항하는 것, 심지어 전적이고 단호하게 반대하는 것, 관광객을 끌어당기는 눈부신 황금빛으로 현실을 장식하기를 철저히 거부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그의 예술은 젊은 사람들이 말하듯 너무 아름다운 아름다움인 비욘세와 제이지가 보여주는 아름다움에 완벽하게 상반되는 형태의 아름다움일 것이다.
구성의 대안적 메시지는 논쟁에 뛰어들고, 진보와 옛 - P60
것의 분리를 포기하고, 거주 가능성이라는 근본적 문제에관심을 기울이고, 생산보다는 거주 가능한 조건을 우선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려면 할일이 많지요! 우리는결코 근대인이었던 적도 없지만 이제 우리가 근대인이었다는 생각에서도 벗어났습니다. 작업장은 완전히 열려 있어요. - P61
기술한다는 것은 앉는다는 것, 자신을 위치시킨다는 것, 토대를 지닌다는 것입니다. 철학과 존재론의 근본적 문제에 대해서 나는 늘 실용적이고 - P77
경험적이라고 할 만한 해결책을 찾습니다. 그래서 내가찾은 해결책은 이렇습니다. "당신이 의존하고 있는 것들을 모두 적어보시오." 혹은 "당신이 무엇에 의존하느냐가영토를 정의할 겁니다." 이것이 내가 하려는 작업입니다. - P78
나는 여전히 학파를 만들지 않았지만 이것이야말로 오늘날에 맞는 진정한 모델이라고 생각합니다. 서로 완전히 다른 학문 분과들이 집합적으로 작업하는 모델 말입니다. 그 학문 분과들은 매체도 각기 다르지만같은 문제에 접근하지요. 이러한 모델은 과학적 생산물을 내놓고 A급 혹은 B급 학술지에 발표한 후에 대중에게까지 확산되기를 바라지 않고 오히려 연구자 못지않게 혼란에 빠져 있는 대중을 향합니다. 이것은 절대적으로 중요한 모델이지요. - P110
"여러분은 과학자니까 사실을 생산해내십시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아요! 이자벨 스텡거스가 자기 방식대로부단히 보여주었잖아요. 사실들은 희박하고, 과학적 발견은 정말 희소하지요. 어디서나 통하는 과학적 방법에 - P130
대한 관념, 그러니까 하얀 가운을 걸치면 아무 말이나해도 과학적 권위가 있는 것처럼 받아들여진다는 관념은 완전히 허구입니다. 그런 건 사기예요. - P131
투사는 종교적 진리 양식을 차용하는 선에서 그치지 않고 그 양식의 변동, 변화, 주석, 매개를 제거하고 완전히 세속화된 버전으로 도입합니다.투사는 정치를 규정하는 행위들을 모조리 상실했습니다. 그와 달리, 특정 장소의 풍력발전소 문제, 또다른 곳의 이민자 문제가 규정이나 명령의 형태로 되돌아오기까지, 또한 명령이 마침내 실행되고 준수되기까지 어마어마한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 나는 바로 그런 사람을 활동가라고 부릅니다. - P156
자기가치관과 의견을 고수한다면 당신은 정치를 하는 게 아니고, 작전의 다음 단계를 준비하는 게 전혀 아니에요.그게 첫번째 정치적 과오입니다. 두번째 정치적 과오는"난 이미 명령을 내렸고 필요한 것도 다 마련했습니다.봐요. 벌써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 이미 규정들을 다만들어놓았습니다"라고 하면서 다들 그대로 따라줄 거라 생각하는 겁니다. 이러한 과오 중 으뜸은 자기 의견을 믿고, 그것을 고수하고, 그 의견이 충실하게, 투명하 - P157
고 절대적으로 대변되기를 바라는 겁니다. - P158
어떤 존재가 계속 존재하기 위해서는 매순간 다른 무엇을 거쳐야 하지요. 내가 여기 와서 당신과얘기를 나누기 위해 그전에 아침부터 먹어야 했던 것처럼. 아주 평범한 방식으로 그렇습니다. 나는 삶의 끝까지나를 지속하기 위해 계속해서 타자를 집어삼킵니다. 이러한 성질을 지니지 않은 존재는 하나도 없습니다. 존재들은 다른 존재들을 거치지 않는 한 결코 시간 속에서 지속할 수 없어요. - P169
그덧은 존재로서의 존재를 정의하는 것이 아닙니다. 철학은 토대를, 나머지 모든 것을 떠받치는 기저를, 모든 사물을 구성하는 그것을 정의해주지 않습니다. 철학은 겸손한 실행이요. 더욱이 그 또한 글쓰기에 의존합니다. 하지만 철학은없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 P172
예루살렘에 입성에 성공한 십자군은 이제 방어를 위한 작전에 돌입한다.예루살렘 초대 왕은 고드프루아가 맡았으나 1년 만에 세상을 떠났고 그의 동생인 보두앵이 18년 간 예루살렘 왕을 지켰다. 그 기간동안 십자군은 시리아와 팔레스티나 부근 정복을 끝낸 뒤 에데사, 안티오키아, 트리폴리, 예루살렘으로 세력이 쪼개지면서도 통합 세력을 유지했다. 제2차 십자군의 발단은 에데사를 잃은 일 때문이었다. 그곳은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한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예루살렘 부근의 십자군 세력을 방어하는 위치에 있었기에 그들에게는 중요했던 것이다. 사태를 심각하게 여긴 로마 교황도 자신이 직접 가지는 못하지만 대리 자격으로 수도사인 베르나르두스를 보내기로 한다. 1차 십자군이 민중들과 봉건 제후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면 이번에는 최고 권력자인 프랑스 왕(루이 7세)과 독일 황제(콘라트 3세)가 직접 참전했다. 이는 베르나르두스의 설득이 먹혔기에 가능했다. 또한 1차 때 부족했던 물자 보급 문제를 위해서 이번에는 이탈리아 해양 세력을 이용하여 만반의 준비를 하고 떠난다. 다만 규모는 1차 십자군에 비해 소수였는데 그래도 정예병이었다. 그러나 독일군은 소아시아를 지나면서 투르크군의 게릴라 작전에 당해 상당수의 병력을 잃고 황제가 부상을 당하는 손실을 입는다. 프랑스군도 적의 기습으로 병력을 일부 잃고 한동안 고립을 겪었다. 그래도 목적지인 다마스쿠스를 위해 남은 병력은 이동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군량도 부족해지고 십자군에게 특히나 익숙하지 않았던 극심한 더위는 그들을 곤란하게 했던 것 같다. 게다가 이슬람의 우누르였던 알레포 지역의 누레딘(그의 아버지인 ‘장기‘가 지략가였다)이 다마스쿠스에 온다는 소식을 듣자 십자군은 다마스쿠스에서 철수를 결정한다. 이로써 2차 십자군 입장에서는 전쟁이 실패했다.독일 황제와 프랑스 왕은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유럽으로 돌아간다. 로마 교황도 실패의 책임을 제대로 지지 않았다. 교황 대리로 떠났던 베르나르두스가 그럼에도 성인에 올랐음을 저자는 지적한다. 과연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다치고 죽은 병사들은 자신의 고향도 아닌 외국의 어느 산야에 묻혔으나 책임을 지지 않았던 사람은 정작 성인에 오른다는 것이...당시 이슬람의 시아파 주류는 셀주크투르크족이었고 수니파 주류는 아랍족이었다. 이집트 파티마 왕조의 힘이 약해지자 재상인 샤와르의 아들 카릴이 수니파 권력자였던 누레딘에게 군대를 요청한다. 이때 장군 시르쿠의 조카였던 살라딘이 이집트로 향했다. 샤와르가 급사망(!)하면서 살라딘이 재상의 자리에 오르고 누레딘은 카이로(시아파)까지 지배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최고 권위자는 누레딘이었지만 살라딘은 자신의 이름을 알릴 기회를 얻게 된 셈이다.살라딘은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해 다마스쿠스에 전진기지를 세우고 길을 나선다. 이때 유럽 세력은 올 여력이 되지 않는 상황이었기에 그리스도교 보호를 위해 나선 템플 기사단과 성 요한 기사단을 중심으로 한 종교 기사단, 예루살렘에 남아 있었던 병사들을 중심으로 구성한 세력 중심의 군대가 아코를 떠난다. 다마스쿠스에서 예루살렘으로 오는 길목을 막을 계획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살라딘은 하틴 전투에서 완승을 거두면서 갈릴리 지방을 손에 넣는다. 사실상 팔레스티나 지방의 항구도시를 수중에 넣는 쾌거를 거둔 것이다. 1차 십자군 방어를 맡게 된 발리앙 이벨린은 60여명 정도로 예루살렘을 맡게 되는 상황에 놓였다. 그는 기지를 발휘해 예루살렘 내 있던 16살 이상의 장정들을 모두 기사로 임명한다. 하지만 수적으로 열세였던 상황에서 그는 회담을 택한다. 최악의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생각이었기에 그의 결정은 현명했다고 보여진다. 아무튼 이슬람 세력은 그렇게 88년 만에 예루살렘 성도를 자신의 영역으로 얻게 되었다. 템플 기사단과 성 요한 기사단으로 대표되는, 수도사와 기사의 겸업 집단인 종교 기사단은 십자군의 산물이다. - P.34중근동에 건설된 십자군 사이의 성채는 대표적인 것만 해도 백개가 넘는다. ‘성채가 아니라 요새‘라고 번역하는 것이 적절해 보이는 소규모 건축물과 감시원만 두고 있던 탑까지 더하면 2백개가 훨씬 넘을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수많은 방어 시설이 근동 서쪽 절반의 좁은 지역에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 P.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