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크 군의 침공 초기에는 알 하라위가 그랬듯이 서쪽으로부터비롯한 위협이 그처럼 광범위하게 퍼지리라고 짐작한 아랍인들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너무 빨리 새로운 상황을 받아들인 경우도 있었다. 대부분의 아랍인들은 체념하고 살아 남는 길을 택했다. 그러나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이 낯선 상황을 이해하려고 비교적 냉철한 관찰자의 모습을견지한 이들도 있었다. 그들 중 가장 뛰어난 이가 바로 다마스쿠스 명망가 출신의 젊은 문필가이자 연대기 사가인 이븐 알 칼라니시3일 것이다.
1096년에 스물세 살의 나이로 프랑크인들이 처음 동방으로 들어오던 모습을 목격한 이래로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들을 정기적으로 기록하였다. - P19

그 해 여름, 서쪽 하늘에 혜성 한 개가 나타났다. 그 혜성은 스무 날이나 계속 올라가더니 이윽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 - P42

버렸다. 그러나 이러한 환상은 곧 사라져 버렸다. 소문은 점점 구체성을 띠갔다. 그리하여 9월 중순에 이르자 사람들은 프랑크인들의 전진 과정을포착할 수 있었다.
1097년 10월 21일, 시리아에서 가장 큰 도시 안티오케이아에 날카로운 비명이 울려퍼졌다. "그들이 온다!" 몇몇 사람들이 성벽으로 뛰어갔지만 그들이 볼 수 있었던 것은 저 멀리 벌판 끝 안티오케이아 호수 근처에서 이는 희미한 먼지뿐이었다. - P43

새벽 4시, 도시 남쪽에서 밧줄과 돌이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거대한 오각형 망루 꼭대기에서 한 남자가 몸을 매단 채 손으로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꼬박 밤을 새웠는지 그의 수염은 심하게 헝클어져있었다. 이븐 알 아시르는 그의 이름이 피루즈이며 망루를 지키는 일을담당한 갑옷 제조인이었다고 쓰고 있다. 아르메니아 출신의 무슬림인 피루즈는 오랫동안 야기 시얀의 주변에 머물러 왔으나 암거래를 한 혐의로얼마 전에 큰 벌금을 문 적이 있었다. 복수를 벼르던 피루즈는 포위자들편에 가담하기로 했다. - P61

당시 시리아는 아주 작은 부락조차도 독립적인 군주국으로 자처할 만큼 정치적 분열이 극에 달해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군사력만으로는 스스로를 지키거나 침략자들을 상대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왕자든, 카디든, 귀족이든 누구라도 지극히 미미한 저항만으로도 자신의 공동체를 단번에 위험에 몰아넣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그들은 애국심은 따로 묻어둔 채 억지 미소를 지으며 공물을 지참하고프랑크인들에게 존경을 표하러 찾아왔다. 네가 부러뜨리지 못할 팔이라면 그것을 껴안고 그 팔을 부러뜨릴 수 있도록 신에게 기도를 하라는 그지방 속담을 따르기나 하는 듯. - P74

생질은 그에게 신의 저주가 있기를 클르츠 아르슬란에게 패한뒤 시리아로 돌아왔다. 그의 휘하에는 3백 명의 병사들밖에 없었다. 그 때 트리폴리스의 영주인 파크르 알 물크는 두카크 왕과 홈스의 통치자에게 전갈을 보냈다. "생질에게 사람들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하니 이번에야말로 그를 완전히 물리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 P106

아니겠소!" 두카크는 2천 명을 서둘러 모았고 홈스의 총독도 가세하였다. 트리폴리스의 군대는 성문 앞에서 이들과 합세한 뒤 생질과 전투를 벌일 예정이었다. 생 질은 1백 명은 트리폴리스 군대와, 1백 명은 다마스쿠스 군과, 50명은 홈스 군과 맞붙게 하고 나머지50명은 자신을 호위하도록 했다. 그런데 적을 보자마자 홈스의 군대는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어 다마스쿠스 군도 똑같이 도망쳤다.
트리폴리스 군대만 홀로 맞섰는데 이 모습을 본 생질은 2백 명의군사를 이끌고 이들을 공격하여 7천 명을 죽이는 승리를 거두었다. - P107

샤라프의 수하 몇몇이 그에게 말했다. "성지를 탈환하러 가셔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보다는 자파를 손에 넣읍시다!" 샤라프는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갈팡질팡했다. 그가머뭇거리고 있는 동안 바다를 건너온 원군과 합세한 프랑크인들은기세를 회복하였고 샤라프는 결국 빈손으로 이집트의 부친에게 돌아가야 했다. - P108

여름이 시작되자 프랑크인들은 그들의 이동탑들을 성벽으로 밀어붙이면서 트리폴리스에 대한 총공세를 개시했다. 주민들은 격렬한 공격을 감당해야 할 것을생각하자 일찌감치 기가 질려 버렸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길 수 없으리라는 것을 벌써 느꼈다. 식량도 바닥난 데다 이집트 함대의 도착도 늦어지고 있었다. 상황을 마무리지으려는 신의 의지인지 바람은 반대편에 머물러 있었다. 프랑크인들은 공격의 수위를 곱절로 높였고 1109년 7월 12일, 마침내 도시를 함락시켰다. - P125

하산이 적을 겁주는 데 선호한 무기는 바로 살인이었다. 조직원은 대개는 혼자서, 아주 드물게는 두세 명의 무리를 이루어 지목한 인물을 살해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들은 주로 상인이나 수행자로 변장을 하고범행을 저지를 도시를 배회하면서 그 장소와 희생자의 습관 등을 익혔다. 계획이 일단 결정되면 그들은 단번에 실행했다. 그런데 준비는 극도로 엄중한 비밀 속에서 이루어졌지만 실행은 되도록 많은 군중들이 모인장소에서 공공연하게 행해지는 것이 관례였다. 장소는 대사원이 시기는금요일 정오가 선호되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산에게 살인은단순히 적을 제거하는 방법에 그치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것은 대중에게이중의 교훈을 주는 방식이었다. 살해당한 자에 대한 개인적인 징벌이하나라면 그 일을 행한 조직원의 영웅적 희생이 또 하나였다. 이 암살자를 이른바 ‘자살 특공대‘ 라는 뜻의 ‘피다이‘로 불렀던 것도 그들이 주로 그 자리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기 때문이었다.
그 조직원들이 침착하게 죽음을 맞는 모습 때문에 이들이 하시시에 중독되었을 것이라고 믿는 동시대인들이 많았다. ‘하시시 중독자‘라는 뜻의 ‘하슈샤신‘이라는 별칭이 훗날 ‘아사신‘으로 변형되어 여러 나•라 말들에서 보통명사로 자리잡게 된다. - P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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