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인들과 함께 살게 된여성들은 <장기적으로 안정적인 가정을 이루고,> 모피 무역에서 통역, 중개인, 심지어 모피를 만드는 노동력까지 제공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런 통혼은 사실 유럽인들에게 비유럽 사회로진출하는 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일종의 안전 장치나 보험과도같은 것이어서 새로 개척한 지역에서는 이런 식의 결혼이 공식적으로 권장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식민 지배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유럽의 시각에서는 이런 결혼을 흔히 <양쪽 모두에게 도움이 되었던 정형>으로 포장하여 제시하곤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식민지 지배자와 종속민 사이의 성적 관계는 엄청나게 강압적인 것이었다. - P166
최근 여성학자들 사이에서는 오스트일리아와 남아프리카의 여성들이 <매춘> 이외에는 금전적 이익을취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이런 상황에서 매춘은 유일한 독립의 방식이었으며, 심지어 스스로에 대하여 긍정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는 주장까지 제기되고 있다. 그들은 가정에 매인 주부들보다 오히려 더 자유로운 생활 방식을 구가할 수 있었으며, 직업인으로서 합리적인 직업 정신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제국주의 구도에서 매매춘이란 단순히 성을 사고파는 관계가 아니라 권력의 관계, 나아가 젠더보다는 인종의 문제, 퍼져가는 자본주의에서 비롯되는 계급 문제이기도 하였음을 이해해야 한다. - P170
1866년 전염병 예방법을 확대 적용하기 위한Association for Promoting the Extension of the ContagiousDiseases Act가 결성되었다. 하지만 매춘에 대한 국가의 통제에 이의를 제기하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1869년 전염병 예방법 폐지를 위한 두 개의 단체가 결성되고, 그후 10년간 이 법을 폐지하라는 캠페인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 P174
매춘부에 대한 강제 검진에서 촉발된 이 캠페인은 1870년대와1880년대를 통해 전염병 예방법 폐지라는 이슈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적으로 강력한 <순결 캠페인 Purity Campaign>을 불러일으켰다.)이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관용해왔던 하층민 사이의 성 관행과 청소년의 성에도 강력한 규제가 가해지기 시작했다. 1870년대에 이미 12세에서 13세로 한 차례 상향되었던 여성의 결혼 허용 연령이 1880년대에 이르면 16세로 다시 한번 상향 조정되었는데, 이는 당시 세계 어느 곳보다도 엄격한 기준이었다. 소년들의 자위행위 또한 엄격한 규제 대상이 되었다. - P175
19세기를 거치면서 <성>을둘러싼 개념들은 이제 지극히 세속적이고 합리적인 영역에서 <과학적 포장>을 거쳐 <객관적 진실>이라는 무게를 확보하게 되었다. <섹스광> 흑인의 이미지는 그전부터 있어왔지만, 19세기를 거치면서부인할 수 없는 <과학적 사실>이 되어갔다. 서구 역사에 나타난 <야만인>의 이미지를 분석한 귀스타브 야호다Gustav Jahoda는 〈19세기의 주요 변화는 이들 이미지들이 좀더 (사이비) 과학이라는 가면을 쓰게 되었다는 것>이라고 말한다.)과학은 이제 제국주의 세계라는 엄청나게 확장된 범위를 근거로하여 각 지역과 인종을 상호 비교하며 성적인 위계를 매기기 시작하였다. - P178
19세기는 <클리토리스>를 <발명한 시대로 볼수 있는데, 이것은 곧 여성이 성적 쾌락을 느끼는 존재인가에 대한문제와 직결된다. 여성은 성욕이 부재한 존재라는 전통적인 믿음과여성이 엄청난 성적 욕망을 갖고 있다는 새로운 주장들이 열띤 논쟁을 벌이는 동안 과거에는 <신비스러운 것>이었던 여성의 성욕이 객관적인 <실체>가 되어갔고, <오르가슴>은 과학적 영역에서 그 존재를 인정받게 되었다. - P18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