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코룸은 다른 도시들과 달랐다. 궁전 지구가 뚜렷이 구분되어 있지 않아 저택에 사는 사람도 있고 오 - P248

두막에 사는 사람도 있는 등 부자와 빈자가 나란히 살았고, 4개의 성문이름도 문의 방향 혹은 그곳에서 살았거나 죽은 사람이 아닌, 판매하는상품을 따라 지어졌다. 서쪽 성문은 양과 염소, 동쪽 성문은 곡식, 남쪽성문은 소와 수레, 북쪽 성문은 말인 식이었다. 이런 식으로 제국의 수도는 여전히 시장임을 일깨워준 것이다.
그러나 그 외의 면에서는 카라코룸도 여느 시대의 제국 수도와 다를 바없었다. 몽골인, 중국인, 튀르크인, 헝가리인, 알라니인, 루테니아인, 조지아인, 아르메니아인, 아랍인 그리고 다수의 다른 종족으로 이루어진주민들이 도시의 좁은 길목에서 어깨를 부딪히고, 선술집에서 합석을 하며, 제국의 방대한 지배 범위를 반영하고 있었던 것만 해도 그랬다. - P249

몽골의 부상으로 유럽은 본의 아니게 "세계는 그들의 조상이 보았을 법한 것보다 무한정으로 더 크고 더 다양하며 덜 순종적이었다. 세계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것을 들으려고 하지 않으며, 무력으로 쉽게 정복당하지 않을 사람들로 가득했다"는 점을 인정해야만 했다."
이 깨달음은 유럽에 특별히 중요한 세 가지 진전을 가져왔다. 첫째, 유럽의 상상력이 구속에서 해방된 것이고, … - P273

두 번째 진전은 유럽이 유목민 국가인 몽골의 부상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무엇보다 중요했던 것은, 몽골의 힘과아시아의 많은 지역에 걸쳐진 그들 지배력의 광대함이 유럽인들로 하여금 시야를 넓히도록 자극해 그들이 동쪽의 인도와 서쪽의 대서양 너머를바라보게 만든 것일지도 몰랐다. 그것이 종국에는 유럽뿐 아니라 세계의변화로도 이어졌기 때문이다. - P274

티무르의 거대 제국은 교역 도시들, 특히 실크로드의 허브였던 히바, 부하라, 발흐(아프가니스탄 북부에 자리한 마을/역자), 델리와 물탄(파키스탄 펀자브주의 도시/역자) 같은 남아시아의 요지들, 그리고 근동의 도시들인 바스라, 바그다드, 알레포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중심축은 마샤드, 헤라트, 그리고 티무르가 시간, 관심, 돈을 특히 아낌없이 투자한 사마르칸트였다. 그러나 이 도시들이 가진 명백한 중요성과 장려함에도 불구하고 티무르 제국은 그가 살아 있을 때에도, 사후에도 계속 유목민의 특성을 띠었다. 제국의 유목성은 부족 중심의 구조와 전통, 정례적으로 개최된 쿠릴타이와 이주, 천막과 말 위의 삶을 선호했던 티무르의 생활 방식, 군대의 편성과 구조, 그가 총애한 아내 비비 하눔과 다른 여인들이 의사결정과 부족 문제를 논하는 과정에서 힘을 계속 보유했던 점, 자유 무역을 중시한 점, 티무르의 총독들이 이동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를 촉진하 - P309

여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 그리고 여타 종교들이 확산될 수 있게 한 점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유라시아의 시장들을 통해서 막대한 부가 유통되고, 중국에서부터 북유럽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부유해진 것도 티무르 제국의 개방성이 가져온 결과였다. - P310

존슨 박사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존재한다. 하지만 두 견해 중 어느 것도 그가 왜 "nomad"를 사전에 등재할 가치가 없다고 여겼는지를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그는 사하라를 본 적이 없고, 엠티쿼터(루발할리)나고비 사막을 걸어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가 사막desart(desert)을, "황무지, 황야, 황폐한 고장, 사람이 살지 않는 곳"으로 사전에 실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 P345

방랑자wanderer는 "방랑을 직업으로 하는 상인과 같은 사람이면서, 그와 동시에 토지나 일터로는 쓸모없는 모든 곳에 존재하는 사람"으로 사전에 등재되어 있다. 그러나 nomad와 nomadic nolition("의지 없음")과 nomancy (이름 점, 즉 "이름자로 사람의 운명을 점치는 기술) 사이에 기재되어 있지 않다. 존슨 박사는 이동 방목을 뜻하는 transhumance도 그의 고향 마을에서 행해진 일이었는데도 사전에 포함시키기에는 부적절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심지어 migration도 싣지 않았다." - P346

베이컨이 생각의 신세계가 발견되기를 갈망했다면, 빙켈만은유럽이 과거를 모방함으로써 위대함을 재발견하고 거인들의 어깨 위에올라서 더 넓은 세상을 바라보기를 원했다.
두 사람의 의견이 일치했을 법한 것도 한 가지 있었으니, 바로 진보에대한 의식이었다. 빙켈만과 그의 동료들은 예술의 역사를 물질문화 속에서 골라낸 길로 제시했다. 그들은 18세기 말의 시점에서 뒤를 돌아보며,
유럽에서 독립적으로 등장한 매혹적인 운동, 즉 유럽 르네상스에 대한개념을 회고적으로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유목민도 포함된 유럽 동쪽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끼친 영향과 자극은 교묘히 가려버렸다. - P350

"… 우리 문화에서는 정식 동의를 받지 않고는 문화가 다른 나라에 들어가는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동의는 언제나 교섭으로 결정된다. 교섭이라고 해서 반드시 직접 대화를 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교섭에는 종종 의식을 통한영적 소통도 포함된다."

쿡은 영국의 해군 장교였다. 뱅크스는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 특히 자국민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지식의 범위를 세계적 규모로 넓히는 일에 자신의 재산을 쏟아부은 유복한 과학자였다. 두 사람 모두 식자였으며, 문화적 세련미와 식견도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신들이 총을쏜 사람들이 자신들의 상륙을 허용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을 의심하지않았다. 그 만남의 영적 측면을 이해하지 못한 그들의 무지는, 자연에 대한 지배력을 되찾기 위해서 노력한 베이컨의 욕망과 직접적인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 P356

1803년에 루이지애나를 매입함으로써 미국은 지구상에서 가장 비옥한 땅의 일부인 미시시피 강 유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거래에는 문제가 있었다. 그 땅은 프랑스의 소유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땅은 여전히 원주민 부족들의 터전이었고, 그 부족들에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강력한 부족들 중 하나였던 라코타 수족도포함되어 있었다. - P376

루이지애나를 매입하고 30년 후에 미국의 제7대 대통령 앤드루 잭슨이인디언 이주법 Indian Removal Act에 서명했다. 그에 따라 정부와 정착민들은, 그 땅은 이제 루이지애나 매입 조건에 따라 미국 "소유가 되었음을근거로, 원주민들을 그들의 조상 땅에서 제거할 권리를 가지게 되었다.
그 땅을 잃는 데에 대한 대가로 원주민들이 받은 것은 미국 정부가 "체계가 잡히지 않은" 서부로 분류해놓은 곳이었다. 원주민들의 대다수는 이조치에 반대했다. 그들 중의 일부는 심지어 그 사건을 미국 대법원까지끌고 가 법률에 입각한 변론을 펴기도 했다. 대법원도 원주민 부족들은주권 국가이고, 그러므로 미국 법률의 적용을 받지 않기 때문에 잭슨 대통령의 법은 적용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 대통령도 법원의 판결을 따를의무가 있다는 점을 인정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판결은 집행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다수의 다른 사람들도 대통령의 본을 따랐다. 그결과 자주권이나 정당한 법적 권리의 어느 것도 원주민들이 부추김을 받고, 감언이설에 속으며, 괴롭힘을 당하다가 결국에는 그들의 삶이나 생계를 전적으로 무시당한 채 조상 땅에서 쫓겨나 더 먼 서쪽으로 이주당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 P377

유목민 부족과 비유목민 부족을 망라해 명백한 운명의 완수로 희생된것이 아메리카 원주민뿐만은 아니었다. 그들이 잘 알고 보호해준 세계,
그들이 숭배한 동물들과 신들도 모조리 사라졌다. 그중에서도 가장 극적으로 사라진 것이 미국 대평원을 누비고 다닌 막대한 들소 무리였다. - P387

제국의 재무 관리에게 지시한 시대 이후로 많은 것이 변했다. 19세기가되면서 크고 작은 도시들에서 정주가 가속화되기 시작했다. 그 새로운시대에는 아메리카 원주민 제국과 연합들을 멸망시킨 행위, 러시아 남부국경과 중국의 만리장성 서쪽, 그리고 유럽 열강이 식민지를 확대하고있던 아프리카에서 유목민을 정복한 행위가 진보로 간주되었다. 유목민은 일정한 거처가 없는 방랑자, 떠돌이, 수렵인, 채취인, 고귀한 야만인이었고…………그들 모두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이는 모두 유목민들이 살아남았거나 자연계를 존중했는지의 여부가 아닌, 그들이 지닌 금전적 부와 물리적 힘으로 문화와 문명의 가치를 매긴 데에서 나온견해였다. 문명과 문화는 친구, 가족, 부족의 모임 때 함께 나눌 이야기나기억을 후대에 남겨서가 아니라, 웅대한 기념물을 증거로 남겼기 때문에소중했다. - P389

"내 생각은 이렇습니다. 가능한최선의 세계는 우리 모두가 유목민이고 우리 모두가 정착민인 세계, 우리 모두가 이동할 수 있고, 우리 모두가 한동안은 집에서 지낼 수 있는 세계일 수도 있다는 거죠." 그것이 바로 파리둔이, 그나 그의 자식들은 성취할 수 있다고 여긴 것이었고, 어쩌면 산의 목초지와 도시의 성벽 사이에위치한 그곳에서는 그것이 모종의 해결책이 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헤로도토스라면 파리둔의 해법을 지지했을지도 모른다. 고대 그리스인들이야말로 "인류의 모든 관습 중에서………… 선택한 최고의 관습에 기반을 둔 세계를 상상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파리둔의 해법은 다양한 생각유목민의 생각의 또다른 종류였다. 나는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 P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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