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 - 7개의 도시
발레리 한센 지음, 류형식 옮김 / 소와당 / 201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중앙아시아의 역사를 조금씩 접하고 있다. 최근에는 사기나 한서를 통해 중국 한나라 시기와 교류한 다양한 나라들(대표적으로 흉노)의 이름을 눈으로 익혔다. 수-당과 경쟁했던 돌궐의 역사도 보았다. 몽골의 역사는 안다고 볼 수 없지만 그래도 청을 제외하면 비교적 익숙한 것 같다.

이 책은 우리에게 초원길로 잘 알려진 실크로드의 범위에 있던 7개의 대표 도시의 역사를 다룬다. 내부에서 바라본 역사이기 때문에 미시사를 다룬다고 할 수 있겠다. 미시사는 이야기들 자체가 흥밋거리가 되는 경우이므로 전체가 보이지 않는다고 아쉬워할 필요는 없다. 길을 걸으며 산책하듯 도시를 누빈다는 생각으로 저자인 가이드의 시선에 따라 도시를 탐방하면 되겠다.

실크로드의 "로드(길)"는 "길"이 아니라 사실은 이동의 범위였고, 거대한 사막과 산맥을 가로지르는 이정표 없는 발자취들이었다. "실크(비단)"는 "로드(길)" 못지 않은 오해를 담고 있다. 비단은 실크로드의 여러 무역 상품들 중 하나에 불과했다(P21). "실크로드"라는 명칭은 최근에 만들어진 것이다. 1877년 리히트호펜(Ferdinand von Richthofen) 남작이 "실크로드"라는 말을 만들어 냈다. 그는 1868년부터 1872년까지 중국에서 석탄 매장지와 항구를 조사했던 유명한 지리학자였고, 5권짜리 지도책을 썼다. 거기서 처음으로 실크로드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P22).

실크로드의 "실크"와 "로드", "실크로드"라는 명칭에 대한 정의와 기원은 다음과 같다. 리히트호펜이 만들어낸 실크로드라는 용어는 점점 퍼져나가다 중앙아시아 탐험 관련 책이 번역되어 출간된(The Silk Road, 1936) 이후 다양한 경로를 통해 확산되면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생각보다 실크로드라는 용어를 사용한지는 얼마 되지 않은 셈이다.



실크로드의 역사책이 유물을 기반으로 설명한 것이 많은데 이 책은 고문서를 바탕으로 했다. 7개의 도시는 니아/누란, 쿠차, 투르판, 사마르칸트, 장안, 돈황, 호탄이며 역사의 범위는 2~3세기에서 11세기 초까지 다룬다. 11세기 초로 범위가 설정된 이유는 발굴된 고문서들의 하한 연대가 그렇기 때문이다. 2~3세기 중국과 서양의 문화가 처음 만나기 시작하여 시대의 흐름에 따라 각기 다른 실크로드 유적들을 만날 수 있었다. 니아, 쿠차, 투르판, 돈황, 호탄은 중국의 북서부에 위치하며 사마르칸트는 우즈베키스탄에, 장안은 옛 당나라의 수도로 중국 중부 섬서성에 있던 곳이다. 무역은 제한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서 간의 광범위한 문화 교류가 이루어졌다. 다양한 그룹의 사람들이 서로 다른 길로 중앙아시아를 거쳐갔다. 이 때 종이를 만드는 기술이나 비단을 직조하는 기술이 중국에서 서쪽으로 전해지고, 유리를 만드는 기술이 중국으로 전해졌다.

니아와 누란은 간다라 지역에서 온 이주민들이 정착한 곳이다. 그들은 카로슈티 문자와 목판에 글을 새기는 기술을 현지인들에게 전했고 불교를 전파했다.
오아시스인 쿠차의 주민들은 독실한 불교 신자들이었는데 쿠마라지바(344-413)는 산스크리트어 불교 경전을 중국어로 최초로 번역하여 중국에 불교가 널리 확산되는데 도움을 주었다. 쿠마라지바가 얼마나 유명한지 대표적인 유적지인 키질 석굴에는 그를 기리는 거대한 기념상을 만날 수가 있다.
투르판은 중국 지역과 이란 지역 사이를 이어주는 다리의 역할을 했던 도시다. 오늘날에도 화려한 국제도시의 느낌이 드는 곳이라고 한다. 투르판과 관련해서는 현장 법사의 서역 원정기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제자 혜립에 의해 그의 여정기가 마치 무용담처럼 전해지는데 사실로 다 믿기는 어려우나 이런 목숨을 건 여정들이 많았겠구나 생각해보게 된다. 투르판 주민들은 5~6세기 다른 중앙아시아 사람들이 동전을 사용하는 동안 은화를 사용했는데 이를 통해 당시 서쪽의 이란과 많은 교역이 이루어졌음을 짐작하게 한다. 투르판은 매우 건조하여 상대적으로 유적의 보존 상태가 매우 좋다고 한다(다른 도시들에 비해서).
사마르칸트는 실크로드의 대표적인 상인인 소그드인이 주로 활동하던 도시였다. 그들은 이란계 민족으로 실크로드 무역에서는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중국 문헌상으로는 그들의 특성이 야비하고 남을 잘 속이는 식으로 묘사되어 있는데(아이가 성장해서 입으로는 달콤한 말을 하고 손에 들어온 돈은 꿀에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도록 한다는 의미이다. ... 그들은 무역에 능하여 이익을 좋아한다. 이익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간다.) 역시 이는 상행위를 그만큼 잘했다는 방증일 것 같다. 소그드인은 소그드어라는 중세이란어를 사용했고 국제적인 교류가 있었던 당나라 시기에는 그쪽으로 많이 이주하기도 했다.
장안은 10개 왕조의 수도였다. 그 중 7개의 왕조는 통치 기간이 짧아 금방 왔다 사라졌지만 3개의 왕조는 통일된 왕조인 전한, 수, 당이었다. 장안은 정치의 중심일 뿐 아니라 국제 무역의 중심지였고 서역으로 떠나기 위한 출발지이기도 했다. 도시는 109개의 방으로 나뉘어져 높은 담장이 둘러쳐져 있었으며 엄격한 시간에 따라 통행이 이루어졌다. 시장 중 동시(東市)는 국산품, 서시(西市)는 수입품에 특화되어 있었다. 이민자들이 많이 들어오면서 자신의 종교를 그대로 가지고 들어와 당시 장안에는 조로아스터교 사원이 6곳, 기독교(네스토리우스파) 교회 1곳이 있었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현재 남아 있는 당나라 건축물이라고는 두 개의 전탑인 대안탑과 소안탑 뿐이라는 게 아쉬울 뿐이다.
돈황은 기원후 천년 동안 중요 군사 주둔지이자 불교 순례지, 무역 거점도시의 역할을 했다. 저자 왈 실크로드 유적지 한 곳만 가야 한다면 무조건 돈황으로 가야 한다고 한다. 바위 절벽을 파내어 만든 석굴들이 500여 동이 있고 거기에는 벽화들이 그려져 있다. 또 도서관인 장경동 석굴도 만날 수 있다. 석굴 자료는 8세기 중반 이전은 중원에서 온 텍스트이고 이후는 돈황 인근에서 생산된 텍스트인데 이 때 학생들이 필사한 자료들이 많이 기록되었다는 게 흥미롭다. 짐작하겠지만 돈황은 현존하는 실크로드 자료들이 가장 많이 배출된 곳이다. 하지만 이 많은 유적과 유물을 발견한 사람의 행위는 협잡꾼이자 도굴꾼과 다를 바가 없어 마음이 찜찜했다. 아쉽게도 돈황의 석굴이 많은 관광객들의 유입으로 최근 많이 훼손되었다고 한다. 이제는 관광객도 적당히 받는다고 하지만 이제는 거기에 기후 변화가 더해져 그 훼손도가 가속화하지 않을까 우려가 된다.
호탄은 1006년 이전까지는 불교 왕국이었다가 이슬람이 정복하면서 완전히 성격이 바뀐 도시이다. 호탄 주민들은 이후 이슬람으로 개종하였으며 자국어인 호탄어를 사용하지 않고 위구르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오늘날에도 순례객들이 많아서 방문객들은 이곳을 "성지"라고 부른다.

실크로드는 인류 역사상 교통량이 가장 적었던 길이다. 일정 시기에 운송된 물량, 교통 빈도, 혹은 여행객의 수를 의미 있는 기준으로 본다면 연구할 가치가 별로 없는 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실크로드는 역사를 바꾸었다. 대체로 실크로드의 일부 혹은 전체를 힘겹게 건넸던 사람들이 외래종의 씨앗을 심듯이 자신의 문화의 씨앗을 먼 지역으로 옮겨와 심었기 때문이다. ... 여러 갈래 길의 네트워크는 지구상 가장 유명한 문화의 혈맥이었다. 이를 통해 동양과 서양의 종교, 예술, 언어, 신기술이 교환되었기 때문이다(P403). 지금은 사라져버린, 그러나 한때 다양한 문화를 포용했던 한 세계의 유물을 보고자 하는 관광객들이 지금도 이곳을 찾고 있다(P41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