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에는 베트남 전쟁 관련한 다큐멘터리 영상을 보았다. 베트남에서의 철수는 당연히 미국과 함께 이루어진 줄 알았고 심지어 그 과정에서 문제가 있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 이 책 말미에 하노이를 빠져나오지 못한 한국인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2014년 jtbc에서 방영을 한 다큐멘터리 <사이공 1975>로 총 4부작으로 방영이 되었다(다행히 현재 유튜브에 풀 영상이 올라와 있어서 모두 볼 수 있었다). 10년 전 영상이니 보신 분들이 있으실 거라 생각한다(나는 이걸 이제야 봤다). 


https://youtu.be/GCjjKkQQLrk

https://youtu.be/iD7CCrTWjjo

https://youtu.be/opLY9CgYJEA

https://youtu.be/As1wdL8VqzI



때는 1975년 하노이가 호치민이 되던 무렵 베트남에 남아 있던 한국인들의 이야기다. 당시 베트남에는 2만 명의 교민이 있었다. 한국에서 범죄를 저지르고 남베트남에 거주하거나 불법체류하고 있었던 사람들, 그리고 한국군을 대상으로 나이트클럽이나 바를 운영하던 이들도 있었지만, 더 많은 사람들은 사업가와 한국 회사, 그리고 외국계 회사 직원들이었다. 이들은 베트남에 재산이 있는 상태에서 쉽게 떠날 수 없었다. 주베트남 미국대사가 사이공을 떠나기 하루전까지도 남베트남의 패망을 믿지 않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많은 한국 사람들이 사이공에 남아 있었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P282~283).

하지만 미국은 오랜 베트남 전쟁의 결과 지쳐 있었고 베트남에 더 이상 신경쓰고 싶어하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탈출 작전에 실패하여 한국 민간인들은 6개월여를 그곳에서 고생해야 했고 한국 대사관 공관원 3명은 현지 형무소에 끌려가 1981년까지 장장 5년을 억류되어 있었다는 기가 막힌 이야기다. 


물론 당시 한국 정부는 이들의 석방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하지만 한국인들은 최우방국이었던 한국을 미국이 배신했다 생각할 만했을 것 같다. 낙동강 오리알이라는 말이 딱이지 않은가. 특히 마지막 4부의 한국인 대사관 직원 3명의 이야기는 착잡한 마음이 들 수 밖에 없게 하였다. 여기에는 북한과 북베트남의 이해 관계가 있었고 베트남과 캄보디아와의 전쟁으로 충돌이 발생하면서 지연되었던 측면이 있었다.

그렇게 죽을 고비를 겨우 넘기고 7년 만에 돌아온 한국은 몰라 보게 달라져 있었다는 대사관 직원들의 이야기가 기억에 남았다. 



자연스레 떠오른 책은 <구술로 본 한국현대사와 군>이다. 


이 책은 현대한국구술사연구사업단이 2009년부터 10년 간 한국군 인사들의 구술 채록을 바탕으로 한 연구 및 조사를 정리한 것이다. 한국현대사에서 한국군과 관련된 역사를 군의 공식 자료 이외에 조사, 정리된 사료로 확인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3부는 특히 베트남 전쟁을 통째로 다루고 있다. 


베트남전에서 군의 지휘권은 한국군이, 작전권은 미군이 가졌다. 이는 한국군의 군수물자의 보급과 수당 등을 사실상 미군에 의존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애초부터 한미동맹 관계의 틀을 벗어나기 어려웠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 때 한진, 현대 등의 한국기업은 베트남에 진출하여 막대한 이윤을 끌어 모았다. 한국군은 구호사업, 건설사업, 의료사업, 농경지원, 자조사업 등에 주력하여 필요한 물자와 자금을 미군에게 지급받아 사업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한국군의 민사작전은 긍정적 성과를 이끌어내지 못한 채 도난사건, 교통사고, 살인, 성범죄 등의 사건에 연루되며 베트남의 민간사회와 충돌했다.

 

전투병 파병과 브라운각서 체결을 전후로 해서 한국기업들은 베트남으로 새롭게 진출하거나, 기존의 사업영역을 확장할 수 있었다. 기업의 활동 폭이 넓어진 배경은 무엇보다 한국군-특히 전투부대-의 존재 그 자체였다. 군과 기업이 개별적으로 존재하던 시기 이전 시기와 비교해본다면, 1965년 이후 군과 기업의 관계는 운명공동체와 유사한 형태로 변화했다고 볼 수 있다. 기업은 전쟁이라는 상황 속에서도 군을 통해 안전을 보장받고 사업에 필요한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P246).




베트남 전쟁은 1965년 한일 수교와 깊은 관련이 있었다. 미국의 입김, 북한과의 충돌 등 안보 면에서 일본과의 협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물론 경제재건과 성장을 위한 이유도 있었다). 


한국 정부는 미국의 요청에 따라 1964년 베트남에 의료부대와 태권도부대를, 1965년부터는 전투부대를 파병하며 한국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해외 파병으로 매년 5만 명 정도의 전투병이 나갔다.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은 외교적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이는 한미관계를 좀 더 강고하게 하는 기회였기 때문이다. 


한국은 한미동맹을 강화하는 측면에서 미군의 파병 요청을 받아들였으나 스스로 방위를 지키지 못해 외국 군대가 주둔하고 있던 한국이 다른 나라의 방위를 위해 군대를 파견한다는 것 자체가 문제시될 수 있었으며, 결론적으로 한미동맹 강화라는 목표도 제대로 달성하지 못했다(P406~407).




베트남 전쟁에 대한 역사를 읽을수록 복잡한 생각이 든다. 베트남 전쟁으로 인한 한국이 얻은 것은 컸지만 어쨌든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한국군도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래도 만약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전쟁이 오래도록 지속되지는 않았을 것 같아서 씁쓸함이 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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