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읽으면 왕 노릇 하려는 자의 스승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십년 후에 그 효과를 보게 될 것이다. 십삼 년 뒤에 젊은이가 또 제북濟北에서 나를 만날 수 있을 것인데, 곡성산〔黃石〕이 나다."
누런 돌아래의그러고는 결국 떠나니, 다른 말도 없었고 다시는 만날 수도 없었다. 날이 밝아 그 책을 보았더니 곧 『태공병법太公兵法』이었다. 이에장량은 그 책을 기이하게 여겨 늘 익히고 외워 가며 읽었다. - P829

장량이 말했다.
"패공께서는 정녕 항우를 배신하려고 하십니까?"
패공이 말했다.
"소인배들이 나더러 함곡관을 막고 다른 제후의 군대를 거두어들이지 않아도 진나라 땅이면 천하의] 왕 노릇 할 수 있다고 하여 그말을 들은 것이오."
장량이 말했다.
"공께서 스스로 생각하시기에 항우를 이길 수 있습니까?"
패공은 아무 말 없이 한참 동안 있다가 말했다.
"진실로 불가능하오. 지금 어떻게 하면 되오?"
장량은 한사코 항백을 만나자고 했다. 이에 항백이 와서 패공을만나자 패공은 그와 함께 술을 마시며 축수하고 혼인 관계도 맺었다. 그러고는 항백에게 패공은 항우를 감히 배반하지 않았으며, 함곡관을 지킨 것은 다른 도적들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고 했다. - P833

장량이 한韓나라에 이르렀을 때, 한왕韓王 성成은[그 부하인 장량이 한왕漢王을 따라갔다는 이유로 항왕이 한왕그 봉국성을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고 자신을 따라 같이 동쪽으로 데 가고자했다.
장량이 항왕을 설득하여 말했다.
"한왕漢王이 잔도를 태우고 끊어 버렸으니 돌아올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고는 장량은 제나라 왕 전영이 다시 모반했다는 것을 글로 항왕에게 아뢰었다. 항왕은 이 때문에 서쪽의 한왕漢王을 걱정하는 마음이 없어졌으므로 군대를 일으켜 북쪽으로 제나라를 공격하러 갔다. - P834

네 사람이 장차 나아가 대답하며 각각 이름과 성을 말하기를 동원공東園公, 각리선생角里先生, 기리계綺里季, 하황공夏黃公이라고 했다. 그러자 황상은 크게 놀라며 말했다.
"짐이 공들을 가까이 하고자 한 것이 몇 년이나 되었는데, 공들은짐을 피하여 달아나더니, 이제 공들이 어찌하여 스스로 내 아들을따라 교유하는가?" - P847

"폐하께서는 선비를 하찮게 여기고 욕도 잘하니 신들이 의로움에욕을 먹지 않을까 하여 두려운 마음에 달아나 숨었던 것입니다. 저희들이 듣건대, 태자께서는 사람됨이 어질고 효성스러우시며 사람을 공경하고 선비를 아끼셔서 천하에는 목을 빼고 태자를 위해서 죽지 않으려 하는 자가 없으므로 신들이 찾아온 것일 뿐입니다."
황상이 말했다.
"귀찮겠지만 공들께서 끝까지 태자를 잘 보살펴 주기 바라오."
네 사람이 축수를 마치고 이윽고 떠나가자, 황상은 눈짓으로그들을 전송하면서 척부인을 불러 그 네 사람을 가리키며 말했다.
"짐이 태자를 바꾸고자 하였으나, 저 네 사람이 보좌하여 태자우익羽翼이 이미 성장했으니 그 지위를 바꾸기 어렵소. 여후는 진정으로 그대의 주인이오." - P848

장자방張子房이 처음에 하비의 다리 위에서 만난 노인이 자기에게『태공서』를 주고 나서 십삼 년이 지나 고제를 따라 제북을 지나갔는데 과연 곡성산 아래에서 누런 돌을 보게 되어, 그것을 가지고 돌아와 보물처럼 받들며 제사까지 지냈다. 유후가 죽자 누런 돌도 함께매장했다. 그 후 사람들은 무덤에 오르거나 복일 日과 납일는 누런 돌에도 제사를 지냈다. - P850

진평이 말했다.
"신이 위왕을 섬겼으나 위왕은 신의 말을 쓸 수 없어 위왕을 떠나항왕을 섬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항왕은 다른 사람은 믿지 못하였고그가 신임하고 총애하는 사람은 항씨가 아니면 그의 아내의 오라버니들이었으니, 비록 빼어난 선비라도 등용될 수 없어 저는 곧초나라를 떠났던 것입니다. 듣건대 한왕께서 사람을 잘 가려 쓰신다기에 대왕께 귀의한 것입니다. 신은 맨몸으로 온 탓에 금품을 수수하지 않고는 자금으로 삼을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진실로 신의 계책 중에서 받아들일 만한 것이 있다면 원컨대 대왕께서는 그것을 쓰시고, 만약 쓸 만한 것이 없다면 금전이 아직 그대로 있으니, 청컨대잘 봉하여 관청으로 보내고 사직하여 집으로 돌아가도록 허락해 주시옵소서." - P863

"초나라에도 어지러워질 수 있는 것이 있으니, 저항왕의 강직한 신하들은 아보亞父, 종리매鍾離昧, 용저龍且, 주은周殷 같은 무리 등 몇사람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대왕께서 진실로 수만 근황을기꺼이 내놓으시어 이간책을 행하여 초나라 군신들을 이간질하여그들로 하여금 의심하는 마음을 품게 하시면 항왕의 사람됨이 시기하고 참언을 잘 믿으므로 반드시 안에서 서로가 주살할 것입니다.
한나라는 이 틈을 타 군대를 거느리고 공격하면 초나라를 반드시 격파할 수 있습니다." - P864

진평이 말했다.
"옛날에는 천자가 순수하며 제후를 만났습니다. 남방에 운몽이라는 곳이 있는데, 폐하께서는 그저 나가시어 거짓으로 운몽을 순수하시면서 제후들을 진陳땅으로 불러 모으십시오. 진 땅은초나라의 서쪽 경계인데, 한신은 천자가 순수하시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듣고, 그 형세상 반드시 아무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교외에서 맞이하여 뵈려고 할 것입니다. 이 사람이 뵈러 올때 폐하께서 그 틈에 그를 사로잡으십시오. 이는 단지 한 사람의 역사가 할 일일 뿐입니다." - P867

한왕유방이 군사를 돌려 항적항우을 공격할 때, 왕릉은 비로소 군사를 한나라에 예속시켰다. 항우는 왕릉의 어머니를 잡아다군중에 두었다. [이에] 왕릉의 사자가 도착하자 왕릉의 어머니를쪽을 바라보며 앉게 하고는 왕릉을 불러들여 자신에게 귀의 시험고자 했다. 그러나 왕릉의 어머니는 비밀리에 사자를 보내면서 흐느끼며 말했다.
"이 늙은이를 위해서 왕릉에게 말하기를 한왕을 삼가 섬기라고해 주십시오. 한왕은 장자이니 이 늙은이 때문에 두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하시오. 나는 죽음으로써 당신을 전송하리다."
드디어 칼을 품고 죽었다. 항왕은 노여워하여 왕릉의 어머니를 삶았다. 왕릉은 마침내 한왕을 수행하여 천하를 평정했다. - P872

한왕이 팽성에서 패배하여 서쪽으로달아날 때, 초나라 왕은 한왕의 아버지와 여후를 잡아서 볼모로 삼았는데, 심이기는 사인舍人가신여후를 모셨다. 그 뒤 심이기는 한왕을 따라가 항적를 쳐부수어 후侯가 되었고, 여후에게총애를 받았다. 승상이 되어 궁중에 머무르자 모든 관리들은 다 그를 통하여 일을 결정하였다. - P873

태사공은 말한다.
"그는 항상 기이한 계책을 내어 아귀다툼하는 어려움을 구해 주었고, 국가의 근심거리를 떨쳐냈다. 여후 때에 이르러 사건이 정말 많았으나, 진평은 끝내 스스로 화를 벗어났고, 종묘사직을 안정시켜 영예로운 이름으로죽어 어진 재상이라고 일컬어지고 있으니, 어찌 시작도 잘 하고 끝도 잘 맺었다고 하지 않겠는가! 지혜와 책략이 없었다면 누가 이와같을 일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 P877

주발은 사람됨이 순박하고 강하며 인자하여, 고조는 큰일을 맡길만하다고 생각했다. 주발은 문학을 좋아하지 않아서 유생과 유세객을 접견할 때마다 동쪽으로 향해 앉아 그들을 재촉하여 말했다.
"빨리 나에게 말하시오!"
그는 질박하고 꾸밈이 없는 것이 이와 같았다. - P887

"천자께서 곧 도착할 것이오!"
군문의 도위都尉가 말했다.
"장군께서 영을 내려, ‘군중軍中에서는 단지 장군의 명령만 듣고천자의 조서도 듣지 말라.‘ 라고 하셨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황제가 도착하였는데도 그 역시 들어갈 수 없었다. 이에 황상은 사신을 보내어 부절을 지니고 장군에게 조서를 내렸다.
"짐이 군대를 위문하고자 군영에 들어가려 한다."
주아부는 그제야 명령을 전하게 하여 성벽 문을 열게 했다. 성벽문을 지키는 관리들이 황제의 거기병의 속관에게 말했다.
"장군의 규약에는 군영에서는 말을 달릴 수 없습니다." - P892

이에 문제는 고삐를 잡고 천천히 걸어갔다. 군영에 이르니 장군주아부가 무기를 들고 공손히 절하면서 말했다.
"갑옷 입고 투구를 쓴 무사는 절을 하지 않는 법이니, 군대의 예로뵙고자 합니다."
천자는 감동하여 얼굴빛을 엄숙히 하고서 수레 앞 횡목에 의지하여 경의를 표하고는 사람을 보내 감사의 말을 했다.
"황제인 내가 삼가 장군을 위로하는 것이오."
예의를 갖추고는 떠났다. 이미 군영의 문을 나오자 여러 신하들이모두 놀라니 문제가 말했다.
"아! 이 사람은 진정한 장군이구나! 이전에 본 패상과 극문의 군영은 아이의 노리개 같다. 그곳의 장군은 정말 몰래 공격하여 사로잡을 수 있겠지만, 주아부라면 어찌 범할 수가 있겠는가!" - P893

태사공은 말한다.
"강후 주발은 처음에 벼슬하지 않을 때는 하찮고 소탈한 사람이었으며 재능이 일반 사람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가 고조를 따라 천하를 평정하니, 항상 장군과 재상의 자리에 있었으며, 여러 여씨가난을 일으키려 하자, 주발은 국가의 어려움을 바로잡아 그것을 올바른 데로 상태로 회복시켰다. 비록 이윤伊尹주공周公이라고 하더라도 어찌 그보다 낫겠는가! 주아부가 병사를 다룰 때 위엄과 무게를 유지하고 굳건하게 견뎌내었으니 사마저司馬穰苴라도 어찌 그보다 낫겠는가! 스스로에게 만족하고 배우지 않고, 절조를 지켰으나 겸손하지는 않아, 결국 빈궁한 데에 이르렀으니 슬프구나!" - P899

양효왕은 두 태후의 작은아들인데 [두 태후는] 그를 매우 총애하여내려 준 물건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때 효왕은 동원東苑을 짓고있었는데 사방 삼백리 남짓이나 되었다. 또 수양성을 칠십 리나 넓혔다. 궁실을 크게 짓고 복도複道를 만들었는데 궁궐로부터 평대까지가 삼십여 리나 이어졌다. 천자의 깃발을 하사 받았으며,
외출할 때 일천 대의 수레와 일만 명의 기병이 따라갔다. 동쪽과서쪽으로 수레를 달리며 사냥하는 것이 천자에 버금갔다. 외출할때는 ‘필‘이라고 말하여 통행하는 사람을 끊게 하고 궁궐로 돌아올 때는 ‘경警‘ 이라고 말하여 경비를 강화했다. 사방의 호걸들을 불러들여 효산 동쪽에서 유세하는 선비들 가운데 오지 않은 자가 없었으니제나라의 양승勝, 공손궤公孫詭, 추양鄒陽문학가의 무리들이다. - P905

양 효왕은 자애롭고 효성스러워, 매번 두 태후가 병에 걸렸다는소식을 들으면 입에 음식을 대지도 않고 편안히 잠도 자지 않았으며항상 장안長安에 눌러앉아 두 태후를 모시고 싶어 했다. 태후도 그를매우 아꼈다. 양 효왕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자, 두 태후는 통곡하여 비통해하기 이를 데가 없었으며 음식을 먹지도 않고 말했다.
"황제가 과연 내 아들을 죽였구나!"
경제도 슬프고 두려워서 어쩔 줄 몰랐다. 그래서 장공주와 이 일을 의논하여, 양나라를 나누어 다섯 개의 작은 나라로 만들고, 양효왕의 다섯 아들을 모두 왕으로 세우고, 다섯 딸들에게는 탕목읍湯沐邑을 식읍으로 주었다. 그러고는 이렇게 처리한 것을 두 태후에게아뢰니 두 태후는 그제야 기뻐하며 경제를 위하여 음식을 한 차례먹었다. - P908

태사공은 말한다.
"고조 때는 제후들이 모두 세금을 거두었으며 스스로 내사內史민정 담당 관리 이하의 관리를 임명했다. 한나라 조정은 승상만을 두었는데 그 승상은] 황금 인테을 찼다. 제후들은 스스로 어사, 정위정廷尉正형옥刑獄을 관장하는 관리, 박사 등을 제수할 수 있었으니 [위상이) 천자에 버금갔다. 오나라와 초나라가 모반한 이후 오종이왕이 된 시대에 한나라는 제후국에 이천 석급의 관리들을 두었고,
‘승상‘ 이란 말을 없애고 ‘상相‘ 이라고 부르며 은인銀印을 허리에 차게 했다. 제후들은 단지 세금만을 거두었고 그들의 통치] 권한은빼앗겼다. 그 이후의 제후들 가운데 가난한 자들은 우거소가 끄는수레를 타기도 했다." - P936

신 승상 장청적, 태복太僕신공손하, 어사대부를 겸한 태상 신조충,
태자소부 신임안은 종정의 일을 겸하면서 죽음을 무릅쓰고 아뢰옵니다. 신장청적 등이 이전에 "대사마신 곽거병이 상소하여 아뢰면서 황자에게 아직 봉호와 작위가 없다."라고 아뢰었고 신은 삼가 어사대부장탕, 중이천 석, 이천 석급, 간대부 및 박사 신경慶 등과 더불어 죽음을무릅쓰고 황자인 신유굉 등을 제후왕으로 삼으실 것을 주청하였습니다. 폐하께서는 문무를 겸양하시고 몸소 스스로 엄격하였으나 황자들에게는 아직 가르치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여러 신하들의 논으로는, 유학가儒家들은 입으로는 그들의 방법을 말하면서 간혹 속으로 그들의 마음과 어그러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폐하께서는 굳이 마다하시며 허락하지 않다가 황자를 열후에 봉해야 된다고 하십니다. 신 장청적 등이 삼가 열후인 신 성소의 현손인 찬후로 나중에 태상이 됨등 스물일곱 사람과 논의해 보니, 모두가 그것은 높고 낮음의 순서를 잃 - P948

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고황제께서는 천하를 세우시고 한漢나라에게는 시조가 되시며, 자손들을 왕 노릇 하게 하였으며 서자들의 보좌를 넓히셨습니다. 선제의 법칙은 바뀌지 않았으므로 따라서 지극히 존귀한 자리를 선양하였던 것입니다. 신은 청하건대 사관으로 하여금 좋은 날을 택하여, 예의를 갖추어 황제를 모시고, 어사로 하여금 전국 지도를 바치게 하고, 다른 것들은 모두 과거의 관례에 따라 처리하시기 바라옵니다.
이에 황제는 조서를 내려 말했다.
"허락하노라." - P949

태사공은 말한다.
"옛사람이 하는 말이 있으니 그를 아끼면 그가 잘살게 되기를 바라며, 그를 가깝게 여기면 그가 존귀하게 되기를 바란다.‘ 라고 했다. 따라서 제왕이 된 자는 구획을 정하여 나라를 세우고 자제들을세워 봉해 주었다. 친족을 기려 상을 주고, 골육을 구분하고, 주상을존중하고, 종족宗族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같은 성의 세력을 천하에넓히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형세는 굳세지고 왕실은 비로소 안정된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 별다른 점이 없으므 - P952

로 논할 필요도 없다. 연나라와 제나라 사적事迹은 수집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그러나 삼왕三王을 책봉하는 데서 천자는 공손하고 겸양하여 군신들은 도의를 지키며 문사가 찬란하니 매우 볼 만한 것이있다. 따라서 이들을 『세가』에 덧붙인다." - P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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