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다 벨 웰스, 메리 처치 테럴: 흑인 여성 운동의 리더들
프레더릭 더글러스(19세기), W.E.B. 듀보이스: 흑인 여성 운동을 지지한 주도적 남성들
전미여성참정권협회의 지도부가 ‘피부색 문제‘에 대해서 취했던 표면상의 ‘중립적인‘ 입장은 사실상 참정권 운동에 가담한 사람들 내에서 노골적인 인종주의적 사고가 확산하는 데 기여했다. 맞춤하게도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열린 전미여성참정권협회의 1895년 대회에서, 참정권 운동에서 가장 손꼽히는 인물 중 한 명은 "니그로 문제에 대한 하나의 해법으로 여성참정권을 채택할 것을 남부에 촉구했다".10 헨리 블랙웰의 주장에 따르면 이 ‘니그로 문제’는 투표권에 문해력 요건을 넣으면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었다. - P182
1899년 참정권 운동가들은 재빨리 탐욕스러운 신흥독점자본가들을 향한 한결같은 충성의 증거를 마련했다. 인종주의와 쇼비니즘의 명령이 국내 노동계급에 대한 전미여성참정권협회의 정책을 이미 결정해놓았으므로 이들은 미제국주의의 새로운 개가를 무리 없이 받아들였다. - P187
흑인 여성들의 조직 결성 경험은 남북전쟁 이전으로 거슬러올라갈 수 있다. 이들은 백인 자매들처럼 문학 모임과 자선 모임에 참여했다. 그 시기에 이런 활동들은 대체로 노예제 반대라는 대의와 관련이 있었다. 하지만 노예제 폐지 운동에 함께했던 백인 여성들과는 달리 흑인 여성들의 동기는 자선이나일반적인 도덕적 원칙보다는 흑인의 생존이라는 확고부동한요구였다. 1890년대는 노예제 폐지 이후 흑인들에게 가장 어려웠던 시기였고 여성들은 자연스럽게 자기 인종의 저항 투쟁에 가담할 의무를 느꼈다. 밀어닥치는 린치의 물결과 흑인 여성에 대한 무차별적인 성폭력에 대한 대응에서 최초의 흑인여성 클럽이 조직되었다. - P203
수전 B. 앤서니, 엘리자베스 캐디 스탠턴, 그리고 다른 신문사 동료들이 여성 노동자들의 대의에 중요한 기여를 하긴했지만 사실 이들은 단 한 번도 노동조합주의의 원칙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앞서 흑인해방이 백인 여성들의 이해보다 일시적으로 더 중요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이들은, 노동운동이 힘을 얻으려면 반드시 필요한 단결과 계급 연대라는 근본적인 원칙들을 전적으로 포용하지 못했다. 참정권 운동가들이 보기에 ‘여성’은 궁극의 시험대였다. 만일여성의 대의를 더 발전시킬 수만 있다면 남성 노조원들의 파업에서 여성들이 배신자 노릇을 해도 잘못이 아니었다. - P218
노동계급 여성들은 계급투쟁을 지속하는 데 보탬이 되는 무기로서 참정권을 요구했다. 여성참정권 운동 내에서 이 새로운 관점은 사회주의 운동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음을 입증했다. 실제로 여성 사회주의자들은 참정권 운동에 새로운 에너지를 불어넣었고 노동계급 자매들의 경험에서 탄생한 투쟁의 비전을 옹호했다. - P223
흑인 여성들은 여성의 정치적 권리를 획득하기 위한 다인종운동을 구성하는 데 그 ‘관찰과 판단이라는 분명한 권력‘ 을 보탤 의지가 누구보다 더 컸다. 하지만 이들은 백합처럼 환한 백인 여성참정권 운동의 지도자들에게 번번이 배반당하고퇴짜맞고 거부당했다. 참정권 운동가들에게도 여성 클럽 회원들에게도 흑인 여성들은 남부의 지지를 얻기 위해 하얀 피부색으로 아양을 떨어야 할 때가 되면 바로 갖다 버릴 수 있는대상에 불과했다. 여성참정권 운동의 경우, 남부의 여성들을위해 한 온갖 양보는 결국에 별 효과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수정헌법 제19조*에 대한 투표 결과를 분석해보니 남부의 주들은 여전히 반대 진영에 도열해 있었고 사실 이 수정안을 거의 부결시킬 뻔했다. - P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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