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제의 목적은 명마를 얻는 데 있었다. 국방력의 중요한 부분을 말에의존하고 있던 시대이니 무제가 명마를 원했던 것은 한나라의 주인으로서 당연했다. 그러나 무제가 개인적으로 말을 좋아했다는 이유도 이 원정에 영향을 주었다.
장건의 서역 여행으로 인해 한나라와 서역 간의 길이 열려 교역도 점차로 활발해졌다. 대완으로부터의 주요한 수입품은 말이었는데, 아무래도 가장 좋은 말은 이사성이라는 곳에 숨겨 두고 밖으로 내놓지 않았다.
무제가 사절을 보내 이사성의 말을 청해봤지만, 대완의 왕은 이를 거절 - P486

했다. 이때 한나라의 사절이 욕을 하며 비난을 하는 등 그 태도가 매우좋지 않았다. 그 때문에 한나라의 사절은 돌아오는 길에 욱성성(郁成城)이라는 곳에서 대완 군의 습격을 받아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이것이 대완 원정의 원인이었다. - P487

"무릇 주나라 문왕은 사로잡혀서 『주역(周易)』을 풀었고, 공자는 재액을 만나 『춘추』를 지었고, 굴원은 방축(放逐)되었기에 <이소>미를 지었고, 좌(左丘)가 실명하였기에 『국어』가 있으며, 손자는 다리를 잘렸기에 『병법(兵法)』을 편찬했으며, 여불위는 촉으로 좌천되었기에 세상에 『여씨춘추』를 전했으며, 한비가 진에 사로잡혔기에 <설난(說難)>, <고분(孤憤)>(『한비자』를 말함)이 있고, 시 300편은 무릇 성현이 발분(發憤)하여 만들어 내었다. 이 사람들은 모두 뜻한 것에 막힘이 있어 그 길이 통하지 못했기에 옛일을 이야기하고 미래를 생각했다." - P499

무제가 황태자 거에 대해서 약간 불만을 품고 있다는 사실은 황실에가까운 사람이면 누구나가 알고 있었다. 자신과 닮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렇다고 해서 황태자의 됨됨이가 좋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기질적으로 아버지인 무제와 맞지 않은 점이 있었던 모양이다.
주안세에 의한 무고의 대옥은 제1차 무고의 난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사건의 발단은 정화 원년이었으며, 공손하의 일족 및 여러 사람이 목숨을 잃은 것은 이듬해인 2년의 일이었다. 같은 해에 제2차 무고의 난이일어 그 화가 마침내 황태자에게까지 미치게 되었다. - P509

참으로 강충은 피에 굶주린 괴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같은 사전공작을펼친 뒤에 궁중에도 ‘고의 기운‘이 있다는 말을 올리게 했다. 후궁 여성들의 거처, 황후, 태자의 궁전을 파헤치자 나무 인형이 속속 모습을 드러냈다. 황태자의 궁전에서 나온 인형의 숫자가 가장 많았다.
황태자는 마침내 마음을 정했다. 지금까지 강충이해 온 방법으로 봐서 비상수단을 쓰지 않으면 죄를 모면할 수가 없었다. 쿠데타밖에 없었다.
황태자의 가신이 사자라고 속여 강충을 체포해, 황태자 앞으로 끌고갔다.
조려(趙慮, 조나라 놈), 전에는 네 녀석의 국왕 부자를 어지럽히더니그것도 모자라서, 이번에는 우리 부자까지 어지럽힐 생각이냐?
황태자는 이렇게 호통을 치고는 자신이 보는 앞에서 강충의 목을 치게 했다. 이것이 수만 명의 죄 없는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간 희대의 요물의 최후였다. - P512

황태자가 무죄였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무제는 강충 일가를 전부 죽이고 환관 소문을 위수에 걸린 다리 위에서 불태워 죽였다. 호현에서 황태자에게 칼을 휘둘러 ‘의상(賞)‘이지만 열후가 된 자들은 그것을 물론박탈당하고 일가 몰살이라는 형을 받았다.
황태자의 무죄를 용감하게 상서한 전천추는 대홍(鴻臚, 외무부장관)로 승진되었으며 다시 승상에 기용되었다. 그는 무제에서 소제(昭시절에 걸쳐서 승상에 머문 햇수가 12년에 이르렀고, 나이가 들어서는 수레를 타고 궁궐에 들어가도록 허락되었기에 사람들은 그를 거승상(丞相)이라고 불렀다. 『한서』에는 거천추(秋)라고 그의 전기가 수록되어 있다. - P520

여덟 살인 불릉을 후계자로 삼은 것은 딸린 식구가 적으니 강력한 ‘내조‘를 붙여 준다면 틀림없이 무제 체제를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 - P525

문이다. 어른이 된 후계자, 예를 들어서 연왕인 유단 등은 연의 작은 궁정에 이미 자신의 신하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황제가 되면 틀림없이 그무리들을 데리고 장안으로 들어와 무제 체제를 무너뜨리려 할 것이다.
물론 어린 불릉에게는 아직 신하가 없었다. 무제 체제를 물려받을 수밖에 없을 터였다. 게다가 불릉의 어머니인 권 부인은 하간의 비천한 계층 출신인데다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황제의 모계 세력이 궁정으로 들어올 염려가 없었다. - P526

스물한 살이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소제재위 10여 년동안은 궁정 내의 권력투쟁의 시대였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컵 속의 폭풍에만 그치지 않고 국민의 생활에도 상당한 영향을끼쳤다.
고조 유방이 제위에 오른 뒤부터 무제가 즉위하기까지의 60년 동안은무제 시대를 위한 준비 기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무제가 죽은 뒤전한이 멸망하기까지의 90년 동안은 무제의 여운 시대라고 할 수 있다.
무제 사망 직후에는 말할 나위도 없이 여운이 짙게 드리워 있었다. 궁정내의 권력투쟁은 여러 방면에서 일었는데 그것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 P528

백성은 피폐했다. 거듭되는 외국 정벌 때문에 일을 해야 할 사람들이차출되어 전쟁터로 갔다. 커다란 건조물 조영을 위한 인부로도 징용되었다. 농민뿐만 아니라 상인과 운송업자도 일을 잃었다.
정부는 독점 기업이 되었고 그 폐해는 여기저기서 나타났다. 당연히사회 불안이 조성되었다. 각지에 도둑이 창궐했다. - P537

승자의 입장에서 기록한 역사에는 상관걸 부자가 연왕과 손을 잡고곽광을 제거한 뒤 소제를 폐하고 연왕 단을 위에 앉히려는 계획을 세웠지만, 그것이 들통 나서 일망타진했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곽광이 정적을 쓰러뜨리고 연왕의 야망을 꺾기 위해서 기선을 제압했을 가능성도 있다. 상관 일가는 황후이자 곽광의 외손녀이기도 한 어린 여자 한 사람만을 남겨 놓고 전부 주살당하고 말았다.
연왕 단은 천자의 새서(書)를 받고 원통하게 자살을 했으며, 후에 부인 등 연왕을 따라서 죽은 자도 20여 명이나 되었다.
이 사건 때문에 어사대부인 상홍양도 주살당했다. 상홍양은 외조의대표자로서 내조의 대표자인 곽광과 대립하고 있었다. 염철회의는 상황양에 대한 곽광의 첫번째 공격이었으며, 두 번째 공격은 상서(尙書천자에 대한 상주권(上奏權)을 가진 자의 직권으로 심복 양창(楊)을 대사농(大司農)으로 임명한 일이었다. 대사농은 지금의 재무부 장관에 해당하는요직으로 상홍양이 부수상인 어사대부가 된 후에도 그것을 겸임하고 있었다. 그런데 곽광이 그 자리에 전임을 둔 것이었다. 정책적으로도 상황양과 곽광은 의견이 맞지 않았다. 그랬기 때문에 상홍양이 반 곽광 진영인 상관 부자에게 접근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곽광이 그 일을 계기로구실을 만들어서 나이 든 정적을 말살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 사건의 결과로 인해서 외조는 곽광이 기대한 대로 명목뿐인 사무실로 전락했다. - P542

민간에서 자란 그는 백성들의 고통을 알고 있었다. 백성을 구제하는 이른바 휼민(民)은 아마도 이상이었겠지만, 그는 현실을 아는 사람이었다.
선제의 황태자이자 후에 원제(元帝)가 되는 유석은 유교에 지나치게경도된 사람이었다. 그리고 황제인 아버지에게 거듭 유가에 의한 국가 운영을 주장했지만 그에 대해서 선제는,
패도(覇道)와 왕도(王道)를 섞지 않으면 안 된다.
고 대답했다.
선제의 정치는 그랬다. 소제에 이은 선제 시절은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무제 55년간을 끼고 문제와 경제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휴식의 시대였다. 무제 말기에 유민이 되었던 사람들도 다시 농민이 되었다. ‘무위로 화한다‘는 무리를 하지 않는 정치가 생산력을 회복시켰고 그것을 높였다.
그러나 이상적인 세상이 왕도만으로 실현될 수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선제는 무른 사람이 아니었다. 민간에 있어 봤기 때문에 구제할 길이 없는 악당이나 도둑이나 변질자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유협을 좋아하여 각지를 돌아다녔기 때문에 그는 많은 것들을 보고 들었다. 일반서민들이 가장 바라는 것이 치안의 유지라는 사실을 자신의 체험을 통해서 알고 있었다. - P554

왕망은 안한공(安漢公)이라는 칭호를 받았는데, 한나라가 시작된 이래생전에 공이라는 칭호가 사용된 경우는 없었다. 거기에 ‘재형(宰衡)‘이라는 칭호도 더해졌다. 주나라 성왕을 보좌했던 주공을 태재(太宰)라고 부르고, 은나라 탕왕을 보좌했던 이윤을 아형(阿衡)이라고 불렀는데, 그 두 - P562

사람의 이름을 합성한 것이다.
머지않아 그는 스스로를 가황제(假皇帝)라 칭하고, 사람들에게는 섭황제(攝皇帝)라 부르게 했다.
평제의 후계자로는 선제 계열의 황족 중에서도 나이가 가장 어린 자영(子嬰)이 선택되었다. 두 살짜리 젖먹이였다. 연호는 거섭(居攝)으로 삼았다.
이렇게 된 이상 왕망은 이미 황제가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머지는시간문제에 지나지 않았다.
거섭 3년(8), 왕망이 드디어 천자의 자리에 올랐다. 천명이 내렸다는증거가 여기저기서 보고되어 올라왔지만, 이것은 물론 왕망이 자신의 특기를 살려서 조작해 낸 것이다.
그해 12월 1일을 시건국(國) 원년 정월 1일로 삼고 국호를 ‘신(新)’이라 했다.
한나라는 이로써 멸망했다. - P563

왕망의 복고적 신정책은 전부 백성을 혼란시키고 외교를 정체 상태에빠뜨렸으므로, 사회불안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왕망이 국책 헌법으로 삼은 것이 『주관』이라는 점은 앞에서도 이야기했다. 그런데 이 『주관』그 자체도 왕망이 창작했을지도 모른다는 학설이 유력하다. 고대에서부터 그와 같은 저작이 전해진 것이 아니라 왕망이 꾸며 냈다고 보는 것이다. 그에게는 전과가 있었다. 상서로운 조짐 등도 그가 만들어 내었다. 왕망의 덕을 칭송하는 자가 48만여 명에 이르렀다는 것 역시 그가 만들어 낸 일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따라서 태고의성천자가 시행한 제도를 기록했다는 『주관』도 그가 그렇게 말했을 뿐 의심스러운 것이다. - P566

한나라가 건국된 지도 이미 200년이 지나 있었다. 각지에 제후왕으로봉해졌던 사람들과 열후왕으로 봉해졌던 사람들의 자손이 결코 적지는않았다. 그들은 각지에서 호족이 되어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들호족에게 있어서도 왕망의 정책은 좋지 않았다. - P568

먹을 것만 주면 따라올악소년(少年)들은 어디에나 있었다. 악(惡)은간악하다는 뜻이 아니라 일정한 직업이 없다는 말이다. 소년이란 젊은이를 말하는 것으로 이광리의 대완 원정에도 수많은 악소년들이 종군했다는 사실은 앞에서 이야기했다. 밥을 먹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술도 마실 수 있었으니 순식간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여모가 모은 것은 수백명에 지나지 않았지만, 모여든 악소년이 또 다른 친구를 불러들였기문에 그 수는 수천에 달했다.
한편 여모는 가진 돈을 아끼지 않고 무기를 사들여 결국에는 재산을전부 써 버렸다. 그러나 그녀는 소망을 이루었다. 일당이 해곡현을 습격하여 현재를 잡아다 그 목을 베어 버렸다. 여모는 그 목을 자기 자식의무덤 앞에 바쳤다.
소망을 이루기는 했지만 이제 와서 그 무리들을 해산할 수는 없었다.
-> 적미군의 탄생 - P57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