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壬寅】五十六年秦之始伐趙也魏王問諸大夫皆以爲秦伐趙於魏便孔斌曰不然秦貪暴之國也勝趙必復他求吾恐於時魏受其師也先人有言燕雀處堂子母相哺呴呴焉相樂也自以爲安竈突炎上棟宇將焚燕雀顔不變不知禍之將及己也今子不悟趙破患將及己可以人而同於燕雀乎當今山東之國敝而不振三晉割地以求安二周折而入秦燕齊楚已屈服矣以此觀之不出二十年天下其盡爲秦乎
진나라가 조나라를 정벌할 때 위나라 왕이 대부에게 의견을 물었다. 대부분의 대부들은 찬성의 의견을 보였으나 공빈은 반대 의견을 보였다(선인은 ‘제비가 당에 살면서 새끼와 어미가 서로 먹여 주어 다정하게 서로 즐거워하여 스스로 편안하다고 여긴다. 부엌 굴뚝에서 불길이 올라와 집이 장차 타려 하는데도 제비는 낯빛을 변치 않고 장차 자신에게 미칠 줄 알지 못한다’고 했다면서 조나라를 정벌하면 그 다음은 위나라 차례 아니냐고 말한 것).
【癸卯】五十七年秦以王陵攻邯鄲武安君曰邯鄲實未易攻也且諸侯之救日至破秦軍必矣辭疾不行乃以王齕代王陵
趙王使平原君求救於楚平原君約其門下食客文武備具者二十人與之俱得十九人餘無可取者毛遂自薦於平原君平原君曰夫賢士之處世也譬若錐之處囊中其末立見今先生處勝之門下三年於此矣勝未有所聞是先生無所有也毛遂曰臣乃今日請處囊中爾使遂蚤(早)得處囊中乃穎脫而出非特其末見而已平原君乃與之俱十九人相與目笑之
平原君至楚與楚王言合從之利害日出而言之日中不決毛遂按劍歷階而上謂平原君曰從之利害兩言而決爾今日出而言日中不決何也楚王怒叱曰胡不下吾乃與而君言汝何爲者也遂按劍而前曰王之所以叱遂者以楚國之衆今十步之內不得恃衆也王之命懸於遂手吾君在前叱者何也今以楚之彊天下弗能當白起小竪子爾一戰而擧鄢郢再戰而燒夷陵三戰而辱王之先人此百世之怨而趙之所羞而王弗知惡焉合從者爲楚非爲趙也楚王曰唯唯誠若先生之言謹奉社稷以從毛遂謂楚王之左右曰取鷄狗馬之血來毛遂奉銅盤而跪進之楚王曰王當歃血而定從次者吾君次者遂遂定從於殿上毛遂左手持盤血而右手招十九人歃血於堂下曰公等碌碌所謂因人成事者也平原君已定從而歸至於趙曰勝不敢復相天下士矣遂以毛遂爲上客於是楚王使春申君將兵救趙
진나라가 왕릉으로 한단(조나라 수도)를 공격했으나 잘 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진왕은 무안군에게 뒤를 잇기를 요청하였지만 무안군이 말하기를 ‘한단은 쉽게 공격할 수 없고 그 곳을 공격한다면 주변에서 모두 도우러 쳐들어올 것이니 진나라 군대는 격파당할 것이다’고 말하고 병을 핑계 삼아 나가지 않았다. 때문에 왕흘로 대리자를 삼았다.
조왕이 평원군을 시켜 초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 때 평원군 수중에 부하 19명은 갖춰졌으나 1명이 갖춰져 있지 않고 있었는데 모수가 자신을 내세우며 <송곳이 주머니 속에 있어서> 그동안 쓰이지 못했으니 써달라 하였다. 평원군이 이에 받아들였다.
평원군이 초나라에서 담판을 벌이고 있었으나 잘 되지 않았다. 이에 모수가 칼을 만지작거리면서 평원군에게 협박을 하니 초왕이 평원군과 서로 합종 맹약을 맺을 수가 있었다. 모수는 상대부에 올랐고 초왕은 춘신군으로 하여금 군대를 이끌고 조나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