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우리 주위 사물의 부동성은 그것이 다른 어떤 것이아니라 바로 그 사물이라는 확신에서, 그리고 그 사물과 마주한 우리 사유의 부동성에서 연유하는지도 모른다. - P20
습관! 능숙하면서도 느린 이 조정자는, 잠시 머무르는 숙소에서 몇 주 동안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다가, 우리가 찾아내면 행복해지는 그런 것이다. 습관의 도움 없이 정신이 가진 수단만으로는 우리의 거처를 살만한 곳으로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 P24
우리의 사회적 인격은 타인의 생각이 만들어 낸 창조물이다. "아는 사람을보러 간다."라고 말하는 것 같은 아주 단순한 행위라 할지라도, 부분적으로는 이미 지적인 행위다. 눈앞에 보이는 존재의 외양에다 그 사람에 대한 우리 모든 관념들을 채워 넣어 하나의 전체적인 모습으로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전체적인 모습은 대부분 그 사람에 대한 관념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관념들이 그 사람의 두 뺨을 완벽하게 부풀리고, 거기에 완전히 부합되는 콧날을 정확하게 그려 내고, 목소리 울림에 마치 일종의 투명한 봉투처럼 다양한 음색을 부여하여, 우리가 그 얼굴을 보거나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발견하는 것은 바로 그 관념들인 것이다. - P43
내가 언제나 슬픈 마음으로 올라가는 이 가증스러운계단에서는 바니시 냄새가 났다. 이 냄새는 내가 매일 저녁마다 느끼는 그 특별한 슬픔을 흡수하고 고정해, 이런 후각적인것에 대해 별 볼일 없는 내 지성보다는 내 감성에 더 잔인하게느껴지는 것이었다. 마치 잠을 자면서 느끼는 치통을, 우리가이백 번이나 계속해서 구하려고 애쓰는 물에 빠진 소녀라고지각하거나,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몰리에르의 시구절로 지각하다가, 잠에서 깨어나면 우리 지성이 치통이라는 생각으 - P58
로부터 모든 영웅적인 행위나 시 운율에 대한 속임수를 제거함으로써 커다란 안도감을 주는 것과도 같다. 그런데 이런 안도감과는 반대로, 내 방에 올라가야 한다는 슬픔은 계단 특유의 바니시 냄새를 흡입함으로써 정신적인 침투보다 더 독성이 강한 - 아주 빨리, 거의 순식간에, 갑작스럽고도 엉큼하게 내 몸속으로 들어왔다. - P59
나는 켈트족의 신앙이 아주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그 신앙에 따르면 우리가 잃어버린 영혼은 어떤열등한 존재나 동물,식물 혹은 무생물 속에 갇혀 있어, 우리가 우연히 나무 곁을 지나가거나, 그 영혼의 감옥인 물건을 손에 넣는 날까지는 많은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은 아니지만 우리에게는 잃어버린 존재가 된다. 그러다 그날이 오면영혼은 전율하고 우리를 부르며, 우리가 그것을 알아보는 순간 마법이 풀린다고 한다. 우리 덕분에 해방된 영혼은 죽음을정복하고, 우리와 더불어 살기 위해 돌아온다. 우리 과거도 마찬가지다. 지나가 버린 과거를 되살리려는노력은 헛된 일이며, 모든 지성의 노력도 불필요하다. 과거는우리 지성의 영역 밖에, 그 힘이 미치지 않는 곳에, 우리가 전혀 생각도 해 보지 못한 어떤 물질적 대상 안에 또는 그 대상이 우리에게 주는 감각 안에 숨어 있다. 이러한 대상을 우리가 죽기 전에 만나거나 만나지 못하는 것은 순전히 우연에 달렸다. - P85
정신이 진실을 발견해야 한다. 그러나 어떻게? 매번 정신은 스스로를 넘어서는 어떤 문제에 직면할 때마다 심각한 불안감을 느낀다. 정신이라는 탐색자는 자기 지식이 아무 소용없는 어두운 고장에서 찾아야만 한다. 찾는다고? 그뿐만이 아니다. 창조해야 한다. 정신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어떤것, 오로지 정신만이 실현할 수 있고, 그리하여 자신의 빛 속으로 들어오게 할 수 있는, 그 어떤 것과 마주하고 있다. - P87
결국 우리가 되돌아가는 곳은 항상종탑이었고, 종탑이 언제나 모든 것을 지배했다. 종탑은 예기치 않은 뾰족한 봉우리로 마을 집들을 불러내면서, 마치 수많은 인간 속에 몸을 파묻어도 내가 결코 혼동하는 일이 없는 신의 손가락처럼 내 앞에 모습을 내밀었다. 오늘도 지방 대도시나 파리의 잘 모르는 거리에서 길을 묻는 나에게, 한 행인이가야 할 길을 알려 주면서, 성직자 모자처럼 뾰족한 끝을 추켜올리는 수도원 종탑이나 병원 탑을 마치 무슨 표지처럼 가리켜 보일 때, 거기서 내 기억이 소중하면서도 이제는 사라져 버 - P123
린 종탑 형상과 조금이라도 비슷한 특징을 찾아내기라도 하면, 나는 하던 산책이나 해야 할 심부름을 잊어버린 채 몇 시간이고 꼼짝 않고 서서는 내 마음 깊숙이에서 망각의 강으로부터 빠져나온 땅이 건조해지며 단단해져서는 건물이라도 지을 수 있다는 듯이 기억을 더듬는다. 혹시 내가 길을 잘못 들지나 않았는지 확인하려고 뒤돌아보던 행인은 이런 내 모습을 보고는 깜짝 놀랄 것이다. 그러면 난 아마도 조금 전 행인에게 길을 물었을 때보다도 더 초조하게 가야 할 길을 찾으며길모퉁이를 돌겠지만………… 그러나 그 길은 내 마음속에 있기에……… - P124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듯이, 나도다른 사람들의 두뇌라고 하는 것은 거기에 무엇을 넣든 특수한 반응을 일으킬 수 없는 무기력하고 온순한 그릇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할아버지 댁에서 새롭게 알게 된 사람의 소식을부모님의 두뇌에 넣으면서, 동시에 그녀를 소개받은 일에 대한 내 호의적인 판단도 내가 바라는 대로 부모님께 전해질 수있다고 생각했으며, 또 조금도 그 사실을 의심치 않았던 것이 - P145
다. 그러나 불행히도 부모님께서 할아버지의 행동에 대한 판단을 하려고 했을 때에는, 내가 그분들에게 암시한 것과는 전혀 다른 원칙을 따르는 것이었다. - P146
방안은 겨우 책을 읽을 정도로 밝았고, 빛의 찬란함에 대한 감각은, 퀴르 거리에서 카뮈가 먼지 쌓인 상자를 두들기는 망치 소리로 느낄 수 있었는데(카뮈는 프랑수아즈를 통해 우리 아주머니가 ‘쉬고 계시지 않으니까‘ 소리를 내도 괜찮다는 연락을 받았다.)그 소리는 더운 날이면 더욱 낭랑하게 울려 퍼져서 대기 속으로 진홍색 행성들을 멀리 날려 보내는 듯했다. 또한 빛의 감각은 내 앞에서 여름 실내악을 연주하듯, 작은 음악회에서 연주하는 파리 떼가 윙윙거리는 연주 소리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실내악은 우연히 날씨 좋은 계절에 들으면 나중에그 계절을 기억하게 되는 인간의 음악과는 아주 다른 방식으로 빛의 감각을 환기한다. 파리 떼의 음악은 보다 필연적인 관계로 여름에 연결되어 있다. 화창한 날씨에 태어나 화창한 날씨와 더불어서만 다시 태어나는 이 음악은, 그런 나날의 본질을 함유하면서 우리 기억 속에 그 이미지를 일깨우는 동시에, 그런 나날이 돌아왔다는 것을, 실제로 우리 주위에 있다는 것을, 그래서 즉각적으로 접근할 수 있음을 확인해 준다. - P151
내가 독서를 하는 동안, 안에서 밖으로 진리 발견을 향해 끊임없이 움직이는 그 중심적인 믿음 다음에 오는 것은, 바로 내 - P153
가 참여하는 행동들이 주는 감동이었다. 그런 날들의 오후는평생 동안 경험하는 것보다 더 많은 극적인 사건들로 가득 차있었다. 그것은 내가 읽고 있는 책에서 일어나는 사건들로, 그사건들과 관계되는 인물들은 사실 프랑수아즈의 말대로 ‘실제‘ 인물은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가 실제 인물의 기쁨이나 불운에 대해 느끼는 감정도 모두 이런 기쁨이나 이런 불운에 대한 이미지의 매개를 통해서만 생겨나는 것이다. - P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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