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의 무당은 특무(特務)를 맡은 장관이었다. 그가 고발을 하면 고발당한 사람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바로 목숨을 잃었다. 이렇게 되면 비방이라도 할 수 있었던 시대가 그나마 나았다고 생각하게 되는 법이다. 함부로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사람들은침묵했다. 누가 어디서 듣고 있을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시기 사람들의 상태를 『사기』는, 국인이 감히 말을 못하고 길에서 눈으로 했다. 고 표현했다. 길에서 친한 친구를 만나도 서로 말을 나누지 못했다. 깊고깊은 원한을 눈빛에 담아 소리 없는 말을 주고받았다. "어떤가? 요즘에는 비방하는 자들도 사라지지 않았는가?" 이에 대해서 소공은, 백성의 입을 막는 것은 물을 막는 것보다 더 심하다. 라고 대답했다.
-> 유신 시기하고 비슷하구만. - P311
철부(哲夫, 현명한 남자는 성(城)을 이루며, - P334
철부(哲婦, 현명한 여자)는 성을 기울인다. 아아, 그 철부가효(梟)가 되고 치(鴨)가 된다. 여자의 장(長)이 있음은재앙의 시작. 이흔한 난(亂)은 하늘에서 내리는 것이 아니라부인에게서 난다. 가르쳐도 안 되고, 일깨워도 안 되는 것은바로 이 부(婦)와 시(寺). 현명한 여자는 효와 치(모두 올빼미로 좋지 않은 소리로 우는 새)와 같아서그 장설(말이 많음)은 재앙의 씨앗이라는 것이다. 난은 하늘에서 내리는 것이 아니라 부인에게서 나온다는 말은 약간책임을 회피하려는 것처럼 느껴진다. 아무리 정성껏 가르치고 일깨워도효과가 없는 것은 여자와 시인(詩人)이라는 것이다. 시인이란 거세하고 후궁에서 일하는 자, 즉 환관을 일컫는 말이다. 이 시의 앞부분이 유왕을 말하고, 뒷부분이 포사에 대해 읊고 있다는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 나라의 멸망이 포사 한 사람에게 가 있지는 않았겠지. 멸망의 구실을 꼭 뱀, 표독스러운 여인, 악독한 여인에게 모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 P335
나는 왕이다. 라고 주의 환왕은 생각했다. 왕은 우리 집의 보좌를 받아 간신히 존재하고 있다. 정의 장공은 자신이 보고 들은 사실에 따라 그렇게 믿고 있었다. 환왕 재위 3년에 정의 장공이 입조했는데 대우가 좋지 않았다. 3년 전에 - P343
정나라 사람들이 왕의 영토에 침입해서 수확물을 가져갔기 때문이었다. 나를 이런 식으로 대우하다니! 라며 정의 장공은 화를 냈다. 확실히 3년 전에 그런 일이 있었다. 그러나지금까지 주의 왕실은 누구 덕분에 유지되어 왔는가? 그 공로를 생각한다면 수확물의 탈취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적어도 정의 장공은 그렇게 생각했다. 현대 사회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들을 여기저기서 볼 수 있다. 2대째의사장, 혹은 주나라처럼 한 세대 건너서 자리를 물려받은 후계자는 회사전체가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는 창업의 고통 따위는 알지도못한다. 그러나 중역의 입장에서 보자면, 회사를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신임 사장의 태도는 불쾌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특히 주의 처지는 도산한 회사나 같았다. 도산한 회사를 되살린 것은대부분 중역의 힘이었다. 그런데도 후계 사장은 중역의 사소한 월권행위에 두 눈을 부릅뜨고 있다.
-> 예를 들면 삼성 승계 과정? - P344
제사를 치를 때는 반드시 음악이 연주되었다. 음악사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 혹은 신과 인간 사이에 서서 양는 자를 연결해주는 존재라고 여겨졌다. 신의 뜻을 가장 잘 아는 자리에 있는 음악사가 포기한 것이라면 그 나라도 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서주 말기의 왕실 음악가들은 한 곳으로 옮기지 않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제후들의 나라를 의지해서 갔는데, 서로 경쟁하지 않기 위해서 계획적으로 흩어진 것 같다. 고사(師)라고 불렸다는 데서 알 수 있듯이당시의 음악사들 중에는 맹인들이 많았다. 시각을 잃은 만큼 다른 곳의감각은 발달했다. 그 이상한 감각으로 신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고겨졌던 모양이다. 게다가 서로가 맹인이라는 단단한 유대감이 있었기 때 - P360
문에 단결력도 강했다. 모두가 상의를 해서 계획적으로 목적지를 정한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음악사들이 사방으로 흩어진 탓에 지방문화 향상에 커다란 도움이되었다. 정나라의 음악도 ‘정성(鄭聲)‘이라 불렸는데 상당히 유명했다. 그러나그다지 명예롭지 않은 쪽으로 이름을 날렸다. 왜냐하면 중국인들의 성경이라고 할 수 있는 『논어』의 「위령공편(衛靈公篇)」이라는 글 속에 다음과같은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 음반 안연(顔淵)이 방(邦)을 다스리는 것에 대해서 물었다. 공자가 말하기를, 하의 시(時)를 행하고, 은의 수레(輅)를 타고, 주의 면(冕)을 입고, 악은 곧 소무(韶舞)이다. 정성을 내몰고(放), 영인(倭人)을 멀리해야 한다. 정성은 음(淫)하고, 영인은 태(殆)하다. - P361
무왕이 천하를 잡았을 때, 주는 그다지 강력하지 않았던 듯하다. 왕, 강왕 무렵에 정력적으로 판도를 넓혔다. 의후적궤에 있는 왕의 순수 - P376
는 틀림없이 원정이었을 것이다. 판도확장은 제후에게 토지나 서민을 주기 위해서 필요했다. 대우정에는수민수(受民受疆土)라는 말이 있다. 왕은 천명을 받아 백성과 영토를 받은 것이라 여겨지고있었다. 그런데 봉건제 사회였기 때문에 이를 제후들에게 나눠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소왕이 남방에서 죽은 것은 아무래도 원정 중에 전사한 것 같다는사실을 앞에서 이야기했다. 영토 확장 사업도 그쯤에서 드디어 좌절을맛보게 된 것이다. 유왕이 견융에게 습격 받는 일 등이 있어 주는 쇠미해져 갔다. 그러나봉건 제후들의 판도는 넓어져 갔다. 약한 중앙에서 떨어져 나간다는 것은 당연했다. 이렇게 해서 ‘지방 시대‘가 찾아왔다. 게다가 천하는 더욱 넓어졌다. - P377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일들이 동시에 진행되면서 천하가 넓어졌다. 첫 번째는 예전까지는 변경이라 여겨졌던 지방으로 중원의 제후가 이봉(移封)된 경우다. 오(吳)나라의 조상이라 여겨지고 있는 의후(侯) 적(矢)이 그랬을 것이라 추측되고 있다. 두 번째는 토착세력이 중원의 문화적 영향을 받아서 중원화한 경우다. 삼묘의 후예인 듯한 초나라가 여기에 해당될 것이다. 세 번째는 제후의 변경 개척이다. 객사현 출토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연의 동북 진출이 그 전형적인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P387
초나라가 강성해질 수 있었던 것은 초나라 사람들의 용감함과 초나라땅의 비옥함이 커다란 원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 개조를 위해 쏟아부은 힘이 커다란 활력을 낳은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초나라 사람들은 고집스러운 면이 있다. 지금도 호북이나 호남에는 한번 마음먹으면 목숨까지도 거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호남 사람과는싸움을 하지 말라‘는 속담이 있다고 한다. 싸움을 하게 되면 끝까지 물고늘어져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귀찮다는 뜻이다. 이와 같은 성격을 가진 초나라 사람들이 일단 자신들을 중원화해야겠다고 생각했다면, 극단적이다 싶을 정도로 그것을 실행했을 것이라는 점은 쉽게 상상해볼 수 있다. 어설픈 행동은 하지 않는다. 그렇게 철저했기 때문에 초는 자신들의 전승까지도 스스로 버린 것이 아닐까? - P389
동쪽으로 도망한 동주의 평왕은 예전의 본거지를 진에게 맡겼다. 진은이때 처음으로 제후가 되었다. "나는 만이다"라고 큰소리치며 만이라는 사실을 간판으로 삼았던 적이 있는 초나라조차 성왕 시대에 자작을 받아 제후의 일원이 되었다. 기원전 1000년 무렵의 일로, 평왕(기원전 770년부터 재위) 시절에 봉해진 진보다 200년 이상이나 선배인 셈이다. 제후라는 입장에서 보자면 진은 신참에 지나지 않았다. 첫 번째 형태는 변경으로 이봉된 형태라고 말했지만, 진은 이전까지 제후가 아니었기때문에 이봉이 아니라 신봉(封)이다. - P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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