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부 좁아지는 세계의 초국적 흐름

19세기 말 교통, 통신, 금융, 통상에 혁명이 일어나 충성심과 감수성에 변화가 일어나고, 공간적 거리에도 한계가 생기다 못해 심지어 거리 자체가 소멸된 현상은 19세기 중엽에서 20세기 중엽에 이르는 동안 전 세계, 갈수록 몸집이 불어난 국제적이고 초국적인 네트워크들의 탄생을 불러왔다. 지금은 주로 세계화로 불리는 현상으로 향해 가던 그 국면에 크리스토퍼 앨런 베일리는 적절하게도 ‘대가속‘이라는 호칭을 부여했다. 베일리는 자신보다 앞서간다수의 역사가가 이 시대와 당대의 ‘근대‘를 연 것이 유럽인이고, 싫든 좋든근대의 특징을 제국, 교역, 문화적 패권의 새로운 구조들을 통해 다른 지역들 - P923

로 전해 준 것 역시 유럽인이었다고 주장한 것과 달리, 지금의 세계를 "지구전역에 도달하는 중첩된 네트워크들의 복합체인 동시에 네트워크들 속에재된 거대한 힘의 차별성도 인지한 복합체로도 인식했다. 그러면서 그는럽인들이 "기존의 범세계적 네트워크"를 종종 "자신들의 뜻에 굴복시킬 수는 있었지만, "그들에게 그럴 수 있는 힘, 결속력, 활용성, 광범위에 걸친 실효성 있는 네트워크와 열망을 갖게 해 준 것"은 "서구의 지배와 힘에 내포된 기생적, ‘네트워크화된‘ 특성이었다."고 썼다. - P924

국제주의의 수사에는 그것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편협한 민족주의를 넘어 진보적 보편주의를 수용하게 되고, 그리하여 종국에는 민족국가들을 대체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 암시돼 있다. 자칭 국제주의자들 또한 극단적 혹은호전적 민족주의적 특징을 가진 요소에 비난을 퍼붓기 일쑤였다. 그런데 문제는 국제적international이라는 용어에 이미 ‘국가적 national‘이 ‘국제적‘의 한 요소임이 암시돼 있고, 대부분의 국제주의자 또한 국경을 가진 나라들, 다시 말해유럽식 모델에 따라 세워진 국가들 간의 협력적 포럼과 규제 제도를 만들었다는 데 있었다.
이것으로 알 수 있는 것은 국가와 제국의 경계를 강화하는 조치가 국제주의에 대한 선결 조건이나 그것에 반대해서가 아닌, 국제주의에 필요한 부수요건으로 생겨났다는 것이다. - P935

전 세계의 식민지인들은 재빨리 자신들의 국가적 여망을 달성할 수 있는슬로건으로 채택한 모호한 개념, 곧 ‘민족자결주의‘였고, 다른 하나는 국제연맹으로 구체화될 개념, 곧 ‘집단 안보‘였다. 이것으로도 알 수 있듯 윌슨의 견해는 최초의 연맹(국제연맹)에서 개진될 개개의 자결적 국가의 관점으로 미래에 등장할 세계를 구상하면서, 전쟁 전에 그리도 많은 국제주의의 흐름을 들뜨게 했던 열망에서 나온 것이었다.
어찌 보면 윌슨은 공개된 협약, ‘승리 없는 평화‘, 민족자결주의, 민주국가들 간의 집단 안보에 근거를 두었다 하여 "새로운 외교"로 불리게 된 개념과는 어울리지 않는 산파와도 같은 존재였다. 프린스턴 대학 총장을 지낸 초연한 지식인으로, 멕시코로 군대를 보내고, 아이티에 미군정을 수립하며, 도미니카 공화국에 대한 미국의 군사적 통제를 강화하고, 니카라과에 미 행정부를 이식한 인물이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그는 남북전쟁 이후 최초의 남부 출신 대통령이었으면서도 나라의 수도로까지 인종차별을 들여와, 남부의 민주당 인종차별주의자 여러 명을 고위 외교관으로 임명했다.
그런 반면 윌슨은 노동권, 페미니즘, 반제국주의는 물론 심지어 사회주의도 옹호하는 국제사회와도 깊은 유대를 맺고 있었다. - P951

제국들이 진행한 사진 프로젝트의 대다수는 영토, 동물, 토착민들 위에군림하는 지배자의 모습을 투영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개중에는 순전히 자국민들에게 새로운 영토와 제국주의 제도의 교화적 역할을 알리기 위해 계획된것도 있고, 오락에 주 목적을 둔 몇몇 프로젝트도 있었다. 하지만 어느 쪽이됐든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사진에서 문화적 차이를 느끼고 반응하도록 유도한 면에서는 같았다. 이국적이고 때로는 성적 매력이 흘러넘치는 여성이 묘사된 엽서가 인기를 끌고, 백인 여성이 동물 트로피를 들고 있는 사진이 백인의용맹함은 토착민의 남성성마저 압도할 수 있다고 이해된 것이 좋은 예다. 전통적 생활 방식에 자동차, 카메라, 전축 등의 현대적 기기를 대비시킨 것도 시대를 초월하여 인기를 끈 사진이 되었다. 그와 같은 시기에 수립된 국제 제도들에도 반영되었듯, 세계가 점점 ‘하나‘가 될수록 인종, 젠더, 지역과 같은 세계가 지닌 여러 다름의 위계도 점점 더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 P969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부터 영향력을 갖게 된 본국에 대한 디아스포라들의 충성은 디아스포라의 인구 밀집도와 제휴하는 집단들이 가진 힘에 따라 지역적 특성이 뚜렷하고 다양한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 P983

하지만 범인종적 혹은 범민족적 운동도 성격이 모호하거나 심할 경우 기만적인 것으로도 드러났다. 범아메리카주의(범미주의)와 범아시아주의(아시아연대론)만 해도 광범위한 지역적 정체성의 구축을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팽창주의적 국가의 도구가 될 소지를 보였다. (1880년대 이후의) 미국과 (특히 1930년대의) 일본이 그들 주변 지역에서 세력권을 구축하려 한 시도도 알고 보면 지역이라는 가상의 탈을 쓴 고도의 국가주의적 행위일 뿐이었다. - P984

19세기 무렵에는 종교적 연대가 민족국가 건설 사업과 경합을 벌이거나 심할 경우 억압받을 수도 있는 것으로상황이 바뀌었다. 과학적 방법, 진화적 사고, 세속주의, 마르크스주의의 영향력이 커짐에 따라 종교적 지식 체계가 위협을 받게 된 것도 문제였다. - P985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급속한 확산은 힌두교, 불교, 유교에도 개혁 운동을 촉발해 전통을 개조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슬람에서처럼 그 종교들의개혁가들도 외부의 제국주의 세력에 좀 더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근대성과 조화해도 무리가 없을 요소에 주안점을 둔 전통으로 복귀할 것을 주장한 것이었다. 그 결과 물론 어느 정도는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가진 호소력에맞서기 위한 목적도 있었을 테지만, 그 종교들도 교리, 의식, 편제의 면에서한층 조직화를 이루게 되었다. 그것도 모자라 그 종교들은 전향적 특성을 띠기도 하고, 민족적 혹은 원시 민족적 요소와도 손을 맞잡았다. - P99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