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기 중국군에 대한 이승만의 인식과 대응
북한 시에 나타난 중국 인민지원군 재현의 맥락

이승만은 중국 내전을 바라보며 주로 공산주의에 대한 유화 정책, 타협 정책을 비판하는 데 초점을 놓고, 남한과 우방국인 미국이 비타협적인 반공 정책을 견지하기만 하면 한국은 중국처럼 되지 않을 것이라 자신했다. 1949년 10월중국공산당군이 중국 본토를 석권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한 이후에도, 이승만은 중국이 완전히 ‘공산화될 가능성을 인정하면서도 "우리는 우리의현 사태를 유지하고 통제할 수 있다"며 자신감을 피력했다. 특히 남한이 북한에 있는 공산정권을 처리하고 "만주와의 자연경계로써 유지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안보를 유지하기가 훨씬 쉬울 것이라 낙관했다. - P228
이승만은 중국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뒤바뀌는 상황에서도 쉽게 중국군을 압록강 북쪽으로 몰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낙관하였다. 이는 남한의 군인과 시민들의 사기를 생각하여 자신감을 보인 측면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중국과 중국군의 능력을 낮추어 보는 시각이 반영된 것이기도 했다. - P233
이승만은 정전의 최소한의 조건 중 가장 우선적이고 중요한 것으로 중국군의한반도로부터의 철수를 거듭 강조하였다. - P234
이승만은 종종 "적색 제국주의", "공산 제국주의"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소련을 무력과 사상을 내세워 다른 나라를 속국(國)으로 만드는 존재로 묘사하였다. 즉 그는 냉전을 자유주의와 공산주의의 대립, 또는 혁명과 반(反)혁명이라는 이념적 측면보다는 침략적인 제국주의 국가 소련과 독립을 수호하려는 국가의 대립으로 규정하는 경향이 있었다. 자유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의 동서(東西) 대립보다는 제국주의 국가와 독립을 보존하려는 약소국의 남북(南北) 대립의 양상으로 냉전을 묘사하는 경향이었다. 따라서 이승만에게 공산화는 소련에 의한 국화, 식민지화를 의미했다. - P236
이승만의 시각에 따르면 중국군은 소련의 명령에 복종하여, 심지어 강제적으로 동원되어 나온 군대에 불과했다. 그러니 그 자생성도, 주체성도, 군사적능력도 정치적 통치 능력도 인정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 P238
이승만과 한국 정부의 지도자들은 한국전쟁 중 중국군이 수행한 전투를 ‘인해전술(人海戰術)‘로 단순화하는 경향이 있었다. 중국군은 그들의 항일전과내전 경험을 활용하여 우회침투를 통한 포위, 매복, 유인, 미8군과 10군단의 관할 지역 사이를 파고드는 전략 등 다양한 전략, 전술을 보여주었지만 이승만은 이를 인해전술로 치부하였다. - P240
이승만은 한반도의 북진통일과 더불어 공산화된 중국대륙의 수복(收復)을언제나 강조해왔다. 이승만은 중국 내전에서 공산당군이 승리할 무렵 중국 인민이 중공 정부를 용납하거나 공산 지배에 만족하지 않을 것이므로 이는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 했다. 중국공산당 지도자들은 인민을 먹이고 입힐 힘이 없어결국 연합국 앞에 머리를 숙일 것이라 했다. - P242
여러 시편에서 6·25전쟁은 ‘성스러운 싸움’으로, 지원군은 평화의 전사로 표현되었다. 평화는 북한이 전쟁 발발의 책임을 회피하면서 전쟁에서 승리해야 한다는 전쟁의 당위와 목적으로 부상했다. - P259
영웅 칭호와 훈장을 받은 지원군은 전쟁의 비극을 영광으로 치환했다. 시집은 상징적 질서가 회복된 1958년의 시점에서 전쟁의 참상을 뒤로하고 국가의 욕망을 실현하는 레토릭을 선택한 것이다. - P265
여성으로 매개되는 북중우호관계는 여성이 전쟁을 수행하는 남성을 보조하는 역할에 머물 때 성립하는 문제점이 있다. 게다가 전장의 남성, 후방의 여성이라는 이분법은 전쟁이 가져온 적나라한 현실을 은폐하고 있다. 물리적 폭력과 파괴는 숭고한 죽음과 승리로 묘사되었지만, 전쟁의 극단적 형태들은 쟁점화되지 못했다. - P267
중국 친선과 우의의 역사적, 혁명적 전통에서 시작해 전쟁을 거쳐 철군에 이르기까지를 순서대로 풀어놓은 시집은 철군 완료 시점에서 북중 친선과 우의를 기념하는 시적 의례라 할 수 있다. - P27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