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칸‘의 타이틀과 함께 가장 큰 경제력을 확보한 원나라는 제국의 재통합을 위한 제1후보였다. 쿠빌라이는 말년까지 그를 향한 의지를 지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280년대 해양 방면의 연이은 군사적실패, 그리고 그로 인한 재정적 난관 앞에서 좌절되고 말았다. 열린시스템을 지향하는 ‘몽골제국 회복‘의 꿈 때문에 닫힌 시스템을 지켜내는 ‘중화제국 경영‘의 과제에 집중하지 못한 것을 원나라가 단명했던 큰 이유로 생각한다.
명나라는 원나라 천하를 넘겨받으면서 열린 시스템의 꿈과 닫힌시스템의 과제도 함께 이어받았다. 영락제永樂帝(재위 1402~1424) 치하의 ‘대항해시대‘가 거창하게 펼쳐졌다가 갑자기 닫혀버리는 상황, 그뒤에 왕조를 관통하게 될 해금정책의 의미도 원나라에서 넘겨받은 이 유산과의 관련 속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 P333

정화 함대는 무력 사용을 절제하면서 현지 관행에 적응하는 방침을 취한 것으로 보인다.
정화 함대의 활동이 명나라에 어떤 이득을 가져왔을까? 서방세계와의 교통로 확보가 장기적으로는 큰 가능성을 가진 사업이었을지 몰라도, 함대가 당장 가져온 것은 기린. 사자 등 신기한 동물과 진주·보석 등 진귀한 사치품이었다. 후세에 중국의 대외개방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중국의 ‘지대물박地大物博을 내세워 교역의 필요성을 부정했거니와, 실제와 부합하는 주장이다. 근대 이전의 중국은 외부로부터 필수품의 수입을 거의 필요로 하지 않는 자족성이 강한 하나의세계였다. - P346

이 시대 해적의 대명사가 된 ‘왜구‘의 성격변화가 해적업의 발전상을 보여준다. 14세기에 나타난 초기 왜구는 약탈만 하는 단순 해적이었다. 당시 일본의 권력투쟁에서 밀려난 일부 지방세력이 해적으로 나서면서 왜구가 번성하게 되었다.
초기 왜구의 주된 침공 지역은 일차적으로 한반도, 다음으로 산동성 등 북중국 해안지대였다. 그런데 15세기 들어 잦아들었던 왜구가 16세기에 급증하는데, 그 주 무대는 중국의 동남해안이었다. 이후기 왜구의 구성에는 중국인이 다수를 점했다.
후기 왜구의 활동이 남쪽으로 옮겨가고 중국인의 역할이 커진 것은 그 활동 내용이 무역관계였기 때문이다. - P356

15세기 후반에 잠잠하던 왜구가 16세기 초·중엽 가정제 시기에폭증한 이유가 무엇일까? 정치가 부실해서 암묵적으로 진행되어온해외무역의 틀이 흔들린 데 문제가 있었으리라고 우선 생각할 수 있지만, 배경조건의 큰 변화 또한 생각할 수 있다. 은銀이 중국으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19세기 초에 아편이 부각되기 전까지 중국은 대외교역에서 "은 먹는 하마"였다. 해외의 중국 상품 수요에 비해 중국의 해외상품 수요가 훨씬 작았기 때문에 막대한 양의 은이 수백 년간 계속해서 중국으로 흘러들었다. 은의 중국 대량 유입이 시작된 것이 16세기였다.
1526년에 개발된 이와미 은광이 일본의 구매력을 크게 늘려줌에따라 동남아시아 방면에서 주로 펼쳐지고 있던 중국인의 해외 활동이 일본 방면으로 옮겨오게 된 것으로 보인다. - P361

상업세력의 해상제국은 유목민의 초원제국과 마찬가지로 제국 조직의 유지에 필요한 기초자원을 생산력을 가진 주변의 정착사회로부터 취득함으로써 성립하는 것이다. 그러나 해상제국은 몇 가지 초원제국과 다른 조건을 가진 것으로 생각된다.
첫째, 자원 취득의 기본 수단이 초원제국에게는 무력인데 해상제국에게는 교역이다. 해상세력에게는 항구의 범위를 넘어 육지를 공략하고 점거하는 데 적합한 무력이 없으므로 교역의 이득을 제공해야필요한 자원을 취득할 수 있다. 해상세력의 무력은 해상의 경쟁세력을 상대로만 사용되는 것이다.
둘째, 초원제국이 한두 개 본격 제국에만 의지해 성립 · 유지되는반면 교통로가 여러 방향으로 열려 있는 해상제국은 여러 개 육상세력과의 거래관계를 나란히 유지해야 한다. 이것이 육상세력에게 교역의 이득을 제공할 수 있는 조건이기도 하지만, 경쟁의 문턱이 낮아서해상제국이 오래 지속되기 어려운 조건도 된다.
16세기 인도양의 포르투갈 해상제국이 상당 기간 유지된 것은 본국의 국력이 압도적이어서가 아니라 현지의 교역 조건에 잘 적응한성과였다. - P377

명나라에게 북로는 ‘심복지환‘이 아니었다. 잘못 다루면 찰과상을 입을 수 있고 심해야 골절 정도에 그치는 외과적 문제였다. 정말
‘심복지환‘에 가까운 것은 경제체제의 혈액이라 할 수 있는 화폐 문제였고, 북로보다 남왜南倭가 이 문제에 깊숙이 연루되어 있었다. - P401

명나라 후기의 동전은 모두 시중에서 액면가의 절반 이하로 통용되었다. 어쩌다 마음먹고 품질 좋은 동전을 만들어도 동전을 천시하는 풍조에 휩쓸려 가치를 발휘하지 못하다가 구리의 재활용을 위해가마에 들어가기 일쑤였다. 가치 보존의 기능으로서는 은이 절대적이었고, 교환 수단의 기능도 점차 은이 중심이 되었다. 중국의 은 수요가 거의 무제한으로 확장될수있었던 것은 ‘부의 축적‘ 수단이 되었기 때문이었고, 축적된 은은 시장에 대한 지배력을 통해 국가권력의통제를 벗어난 민간권력이 되었다. - P405

명·청 교체는 1644년 청군의 북경 점령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1681년 삼번의 난이 진압되고 1683년 타이완의 정씨鄭氏 세력이 평정됨으로써 청 왕조의 중국 통치가 궤도에 올랐다고 할 수 있다.
1644년 직후 청군에 앞장서서 중국 남부를 평정하고 그곳을 분봉分封받았던 오삼계 등 삼번이 청제국의 통합성에 걸림돌로 남아 있던것은 눈에 보이는 사실이다. 이에 비해 정씨 세력의 중요성은 간과되기 쉬운데, 경제 측면에 대단히 의미가 큰 존재였다. 바다를 통한 대외관계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P406

한동안 많은 동아시아 연구자들이 ‘자본주의 맹아‘를 찾는 데 몰두한 것은 발전과 확장을 숭상하는 근대세계에서 자존감을 세우기위해서였다. 그러나 발전과 확장이 무조건 좋은 것이라는 믿음이 무너지고 있는 21세기에 와서, 문명의 역사 속에는 그와 반대되는 경향도 있었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확인할 필요가 있다. 그 경향이 당시 사람들의 행복을 늘리고 고통을 줄이는 데 공헌한 측면을 찾는다면 지금 세상에도 참고할 가치가 있을 것이다. - P411

삼번이란 운남雲南의 오삼계, 광동의 상가희와 건의 경중명耿仲明이었다. 그들은 평서왕平西王, 평남왕平南王, 정남왕靖南王의 왕호를 받고 각자의 지역을 독립국처럼 통치했다. 해상교역의 이권을 끼고 있거나(광동, 복건) 광물자원이 풍부하다는(운남) 특성 때문에 중화제국의 경제구조에 큰 영향력을 가진 지역들이었다.
오보이가 이끌던 청나라 귀족세력은 중앙집권화를 꺼리는 입장에서 삼번의 분권화를 방조했다. 강희제는 오보이 제거 후 삼번에 대한 통제를 서서히 강화해 나갔다. 1673년 70세의 상가희가 은퇴와 함께 번국을 아들 상지신에게 물려줄 것을 청하자 은퇴는 허락하되 세습은 불허했다. 그 2년전경중명의 손자경정세
의습을 허락한 것과 다른 조치였다. 이 변화에 경계심을 품은 번왕들이조정을 떠보기 위해 짐짓 번의 철폐를 주청했다가 이를 받아들이려하자 반란에 나섰다.
한나라가 창업 근 50년만에오·초7국의 난을 제압하고 제국의본궤도에 오른 것처럼 청나라는 입관지 근 40년 만에 제국의 본궤도에 오른 것이라 할 수 있다. - P423

"중국의 과학기술이 15세기까지 유럽보다 높은 수준에 있었다면 왜 그 후의 과학혁명과 산업혁명이 중국에서 일어나지 않고 유럽에서 일어나게 된 것인가?"
니덤의 수수께끼가 1960년대에 제기될 때는 학술적 연구주제라기보다("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일을 역사학에서 따질 필요가 있는가?") 뜻밖의구 성과가 일으킨 충격의 한 표현일 뿐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 떠오른 ‘유럽의 기적‘European Miracle의 주제가 1990년대에 ‘대기‘GreatDivergence로 이어진 것은 제3세계의 경제적 발전에 따라 유럽의 우위를 하나의 역사적 현상으로 상대화해서 보게 된 결과였다. 지금은1970년대 이후의 세계적 변화(경제적 격차 축소)를 ‘대기‘와 대비되는
‘대수렴‘Great Convergence으로 보는 연구자들이 있다. ‘수렴‘의 단계에접어들었기 때문에 앞 단계의 ‘분기‘를 당연한 사실이 아니라 설명을필요로 하는 역사적 현상으로 보게 된 것이다. - P434

아이누 지역과 유구의 합병은 일본열도의 국토 정비 차원에서해할 수 있다. 타이완과 조선의 탈취까지도 제국주의 경쟁 속에서 자위 성격으로 (강점당한 입장이 아니라 당시 일본 입장에서 볼 때) 인정의
할 수 있다. 그에 비해 만주의 식민지 경영은 제국주의 경쟁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일이었고, 이에 따라 일본의 국가 성격까지 크게 바뀌게 - P451

된다. 정치의 변화만이 아니라 경제·사회·문화 모든 면에서 ‘대일본제국‘의 꿈이 부풀어올랐다.
이 꿈을 대표한 표현이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이었다. 군국주의자들만의 꿈도 아니었고 일본인만의 꿈도 아니었다. 일본의 많은자유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도 이 꿈에 동참했고, 서양인의 침략과지배에 시달리던 중국과 동남아시아의 민족주의자들 사이에도 큰 공명을 일으켰다. 만주국은 이 꿈을 키워내는 온상이 되었다. - P452

중국에는 독자적 문화를 가진 많은 종족이 있었고 중국인들은 그들에게 개별적인 관심을 크게 갖지 않았다. 중국의 전통적 원주민관을 바클리는 일본의 타이완 연구 개척자 이노 가노리能嘉矩(1867~1925)의 말로 설명한다.
(중국인들이 타이완 원주민의 존재를 처음 알았을 때ㅡ인용자) 자기네와 다른 언어와 풍속을 가진 다른 사람들로 인식했을 뿐, 따로 이름을붙이지 않았다. (…) 명나라 때 ‘동번東蕃이라는 이름이 쓰였고 (..…)청나라가 타이완을 점령한 후 정치적 복속 여부에 따라 ‘생번’生蕃과 ‘숙번’熟蕃으로 크게 구분했다. (…) (그러나인용자) 종족을 따져살피지는 않았다. (191쪽)
‘번‘이 중국인에게는 여러 변경에 널려 있는 익숙한 존재였던 반면 일본인에게는 새로운 존재였다. 종래 경험한 이질적 존재는 아이누와 유구인 정도였는데, 아이누는 ‘숙번‘의 범주에 들고, 유구인은더 높은 수준의 문명을 누려온 사람들이었다. 일본이 열도를 넘어
‘제국‘으로 나아가는 초입에서 타이완 원주민은 이질적 존재를 상대하기 위한 첫 숙제가 되었다(일본에서 ‘족‘이란 말이 나쁜 뜻으로 흔히 쓰이는 것도 이질적 존재와의 공존 경험이 적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일본인이 타이완 원주민에게 큰 관심을 가진 또 하나 이유는 개발의 필요에 있었다. 중국에게는 타이완의 자연환경이 그리 특별한 것이 아니었던 반면, 일본에게는 유일한 아열대 지역 영토로서 사탕수수·고무 등 전략적 가치를 가진 자원의 개발이 절실했다. - P462

스탈린은 영역, 언어, 생산양식, 문화의 네 가지 공유자산을 가진 집단이 민족이라고 정의했다.
이 정의는 자본주의체제를 전제로 성립하는 것으로, 중국의 많은 소수민족에게는 적용되기 어려운 것이다. 운남성 조사단장 린야오화林耀华(1910~2000)는 이 울타리를 넘어서기 위해 ‘종족 잠재성‘ethnicpotential(멀레이니의 표현)이란 개념으로 ‘민족‘의 정의를 확장했다. 스탈린의 4대 공유자산을 지금 갖추고 있지 않더라도 장차 갖추기 위한잠재성을 확인할 수 있으면 ‘민족‘으로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 P465

배경의 국가권력이 조사단의 설득력을 뒷받침해주었기 때문에 피조사자의 인식을강압적으로 바꾼 측면이 분명히 있었다. 멀레이니가 인정하는 ‘타당성‘은 1954년 당시에 곧바로 확립된 것이 아니라 그 후 국가의 꾸준한 교육과 언어를 포함하는) 문화정책을 통해 56개 민족의 다민족국가를 ‘현실‘로 정착시키는 과정에서 구축된 것이다. - P4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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