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중지 3장 - 선택의 애통함

임신한 여성을 아이의 어머니로 고정시킴으로써 임신중지는 문제적이며 해로운 것으로 관철시키는 입장

태아중심적 애통함은 다양한 담론장을 가로질러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이 감정이 중요한 까닭은 임신한 여성을 이미 자궁 안에서부터 자율적인 ‘아이’의 어머니로 만들고, 임신중지를 여성에게 도덕적으로 문제적이며 해로운 것으로 지칭하기 때문이다. 태아중심적 애통함은 반임신중지의 수사가 숨어들어 그 규범적 효과를 증폭시킨 강력한 수단이다. 이때 정치는, 임신중지에 무엇이 뒤따르며 여성이 어떻게 임신중지를 경험하는지를 말해 주는 진실로 둔갑한다.

임신을 바란 여성은 모성적 정체성을 갖고서 미래의 아이와 함께하는 세계를 상상하기 시작한다. 따라서 유산에 대한 그들의 경험은 원치 않은 임신을 자발적으로 끝낸 여성의 경험과 매우 다르다.

임신중지 법이 자유화되기 전에는, 임신중지가 여성에게 신체적으로 해를 끼친다는 문화적 기대가 있었다. 그래서 임신중지 이후 재생산 건강에 문제가 생기면,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전부 임신중지 탓으로 돌렸다. 바버라 베어드는 이런 유의 경험을 ‘체현된 일탈’이라 불렀다. 이는 "일탈적인 사회적 행위가 신체의 물성으로 나타난다는 (···) 역사적ㆍ문화적으로 구체화된 신념"을 일컫는다.

연구자들은 임신중지가 단기적ㆍ장기적으로 여성에게 불가피하게 미치는 심리적 영향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보다 대중적인 포럼에서 임신중지 심리적 영향은 계속 토론의 주제가 되고 있다.

임신중지의 심리화는 임신중지를 임신한 여성의 건강이나 심리적 복지 차원에서 바라보는 법에서 점차 뚜렷해졌다. 임신중지가 여성에게 돌이킬 수 없는 트라우마를 안긴다는 주장은, 임신중지가 여성에게 심리적ㆍ감정적으로 이로울 수 있다는, 법으로 공식화된 주장과 부딪혔다.

1980년대 중반, 미국의 반임신중지 운동에서는 임신중지의 심리적ㆍ감정적 효과를 둘러싼 여러 주장을 PAS라는 진단명으로 집약했다. PAS는 1988년 WEBA와 RTL이 오스트레일리아의 반임신중지 커뮤니티에서 공동 컨퍼런스를 조직하며 유명세를 얻었다.

여성의 심리적 복지를 근거로 임신중지에 반대한다는 주장은, 1980년대 초 ‘여성중심적’ 반임신중지 활동 단체가 만들어지며 탄력을 받았다. ‘임신중지 피해자Victims of Abortion’와 WEBA Women Exploited by Abortion(임신중지로 착취당한 여성)가 여기 들어간다. 미국 WEBA의 창립자가 1983년 대회를 연 뒤로 오스트레일리아에서 RTL 구성원들이 WEBA를 설립했다. WEBA의 목표는, "임신중지가 산 사람을 죽인다는 진실", 그리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기 아이를 죽게 한 여성의 마음에 트라우마를 남긴다는 진실"에 관하여 ‘침묵의 공모’를 끝낸다는 것이었다. WEBA 회원들은 임신중지를 겪었다고 주장하며, 개인적 경험에 의거해 반임신중지 정치를 정당화하려 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거기 있었다"고 계속 강조했다.

1991년 WEBA는 WHBA로 단체명을 바꿨다. 즉 ‘임신중지로 착취당한exploited 여성’에서 ‘임신중지로 상처 입은hurt 여성’이 된 것이다. 많은 여성이 임신중지를 자유롭게 선택하지만 반드시 그 뒤에 애통함을 느끼게 된다는 전제에서였다.

반임신중지 정치는 정부의 재정 지원과 공동체의 공감을 얻었고, 점점 더 많은 단체가 여성의 임신중지 접근권을 제한하겠다는 의제를 숨긴 채 등장했다. RTL의 태아중심 정치는 단체명에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WHBA가 초기에 세웠던, 태아의 생명을 구하겠다는 목표는 임신중지 여성에 대한 관심 뒤로 점점 숨어들었다. 그러나 WHBA는 태아중심적 의제를 겨우 감췄을 뿐이다. 아이와 엄마의 이미지는 단체 뉴스레터 곳곳에 가득했다.

‘진정한 선택Real Choices’은 2007년 설립된 반임신중지 단체의 이름이다. 이 단체는 자신들이 "직업교육과 훈련 서비스"를 제공하는 단체이지 "로비스트나 활동가 집단이 아니"라며, "종교나 정치적 연결관계가 없다"고 주장한다. 단체가 표방하는 중립성은 임신중지가 여성에게 미치는 끔찍한 효과에 대한 메시지를 승인한다. 이런 식으로 여성에게 ‘진정한 지지와 진정한 선택’을 제공한다는 이른바 ‘진정한 정보’가 구성된다.

반임신중지 활동가들은 임신중지를 다시 범죄화해 여성의 선택을 막는 대신, 임신중지를 더 제약하는 데 집중했다. 그런 법적 제약이 여성에게 ‘정보를 갖춘’ ‘진정한’ 선택을 가능케 하리라는 전제에서였다. 예를 들어 ‘고지된 동의informed consent’에 관한 법은, 임신중지 관련해 다퉈 볼 심리적ㆍ신체적 위험성을 의사가 여성에게 경고할 것을 의무화하는 내용이다.

2017년 7월, 미국 35개 주에서 여성이 임신중지 전 상담을 받도록 의무화했다. 그 가운데 29개 주에서 상담자가 여성에게 제공할 정보의 내용을 구체화했으며, 27개 주에서 상담과 임신중지 절차 사이의 시차를 명시했다. 시차는 대개 24시간이었다. 또 25개 주에서 여성이 임신중지의 위험에 대한 정보를 받게 했는데, 여기에는 의료적으로 부정확한 정보가 포함되었다. 이를테면 임신중지가 이후 임신 가능성에 미치는 영향(4개 주), 유방암에 미치는 영향(5개 주), 그리고 여기서 가장 유의미한 증상인, 부정적인 감정적 영향(6개 주) 등이었다. 이제는 많은 주에서 여성들에게 배아나 태아의 초음파를 보게끔 하며, 2개 주에서는 의사가 초음파에서 무엇이 보이는지를 설명해야 한다.이런 법은 여성이 임신중지에 들어가기 전, 자신의 배아/태아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알 권리’가 있다는 구실로 정당화된다.

임신중지 결정 과정에 그 결과를 비롯한 정보가 갖춰져야 한다는 주장은 비교적 문제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는 사실상 새로운 방식의 가부장주의를 만들어 낸다. ‘고지된 동의’에 관한 법은 이미 의료 행위를 통제하고 있으며, 임신중지는 의료 절차에 추가 단서가 붙는 매우 드문 경우다. 여성이 나중에 후회할 선택을 하지 않도록 국가가 보호해야 한다는 전제는 여성을 취약하고, 약하고, 착취당할 수 있는 잠재적 피해자의 위치에 놓는다. 이런 조치는 "여성의 판단을 신뢰할 수 없다"는 뜻이며, 여성이 임신중지를 적극적으로 바란다기보다 수동적으로 ‘동의’하는 것이라고 전제한다. 임신중지를 고려하는

여성은 상담을 받고 국가에서 주는 정보를 받아야 한다, 반면 임신을 지속할 여성은 그럴 필요가 없다, 이런 식의 전제는 모성이 임신에서 문제없이 도출될 유일한 결과라는 규범적 관점을 반영하며, 이를 재차 말한다.

감정은 주체의 ‘진실’을 만들며, 주체에 깊이 내면화된 생각, 개인사, 미래를 향한 열망을 자동반사적으로 드러낸다고 흔히들 믿는다.

임신중지는 여성에게 감정이나 정신건강 면에서 예측할 만한 확실한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다. 앞서 유산의 애통함을 연구한 학자들이 보여 주듯, 여성이 애통해하는 것은 곧 자율적 태아의 상실을 경험하는 것이라는 전제에도 문제가 있다. 애통함이 꼭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으로 생기는 감정은 아니다. 애통함은 이상이나 신념의 상실에서도 온다. 따라서 만일 임신중지로 애통함을 경험한 여성이 있다면, 이는 임신에 대한 환상 때문일 수 있다. 그 환상에는 (어머니로서, 혹은 사랑하는 이가 있는 공동 양육자로서) 상상하던 미래가 있을 것이다. 그 환상에는 여성이 태아를 자신과 분리된 존재로 그려 보았다는, 불가피하진 않은 가능성이 있을지 모른다. 애통함은 임신과 모성에 관해 내면화된 이데올로기의 결과일 수 있다.

임신중지의 애통함은 태아의 사망을 중심으로 발생하며 여성의 아이가 사망했다는 프레임으로 둘러싸여 있다. 따라서 이 경험에는 오직 하나의 각본, 하나의 설명만 제공된다. 레이스트와 임신중지 반대론자들은 ‘슬픔에 언어를 주는’ 대신, 슬픔에 거의 언어를 주지 않았다.

트라우마를 가지고 설명할 때, 임신중지는 "기억된 과거, 살고 있는 현재, 기대되는 미래 사이를 연결해 주는 진행 중이던 서사를 끊음으로써 자아를" 분열시키는 행위가 된다. 따라서 모성은 임신중지가 끊어 놓은 자아감과 기대된 미래가 거주하는 공간으로서 자연화된다.

과거를 떨칠 수 없는 멜랑콜리아의 속성, 또 그게 일상생활에 자꾸만 침입하는 현상은 프로이트가 정의한 트라우마와 유사하다. 그런데 멜랑콜리아가 일상적인 상실에서 비롯할 수 있는 반면, 트라우마는 대체로 "인간 경험치를 벗어난 사건"에서 비롯한다. 임신중지는 여성 세 명 중 한 명이 경험하는, 예외적이기보다 일상적인 사건이다.

임신중지가 본질적으로 애통하고 트라우마적이라는 설명은 다음의 순환논리를 만든다. 임신중지 여성은 태아의 어머니다, 따라서 임신중지는 본질적으로 트라우마적이다, 임신중지의 애통함과 트라우마를 인식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따라서 임신중지 여성은 어머니일 수밖에 없다.

한쪽에는 여성의 자유에 관한 포스트페미니즘 담론이 있다. 그 자유는 ‘선택’을 통해 활성화된다. 다른 한쪽에는 엄격히 제한된 젠더규범이 있다. 그 규범은 모성을 여성의 정박지로 고정한다. 따라서 태아중심적 애통함의 주된 기능은 ‘복구’다.

애통함은, 에릭 실의 말마따나 "아기를 낙태시키는 결정에서 큰 역할"을 한 것만이 아니라, 책임감 있는 행동에 실패한 데 대해서도 속죄 혹은 처벌로 작동한다. 따라서 "애통해하는 임신중지 여성"은 "타락한 여성"의 현대적 각색일지 모른다. 성적으로 도덕적으로 품행이 단정치 않은 결과, 끔찍한 삶을 대가로 얻은 여성 말이다.

모성적 프로초이스 지지자들은 임신한 여성에게 태아를 ‘행복의 대상’으로 구체화하고, 태아의 생명을 임신중지 정치에서 유일하게 시급한 도덕적 이슈로 보는 관점을 강화한다. 이들은 태아중심적 애통함이 임신중지에 대한 불가피한 반응일 뿐 아니라, 종종 단 하나의 윤리적 반응이라고 본다.

울프가 묘사한 임신중지는 PAS가 재현되는 방식과 유사한 데가 있다. 모성 욕망이 자연화되고, ‘태어나지 않은 존재’라는 인물이 등장하며, 임신중지의 애통함과 트라우마가 되새겨지고, 추모와 기념은 임신중지를 속죄하는 유일한 방법이 된다.

1995년 나오미 울프의 기고는 오스트레일리아 언론에서 임신중지 경험을 성찰하고 논쟁할 기회를 주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프로초이스 평론가들은 울프가 임신중지를 묘사하는 방식이 윤리적ㆍ도덕적으로 의심스럽다며 강하게 반박했다. 그렇다고 해서 임신중지가 여성에게 주는 이로움을 칭송하진 않았다. 대신에 이들은 울프가 단언한, 여성이 임신중지를 애통해해야 한다는 주장과 반대로, 레슬리 캐널드의 말처럼 임신중지가 이미 그리고 피할 수 없이 ‘여성에게 크나큰 애통함과 고통’을 유발한다고 주장했다.

저명한 페미니스트인 저메인 그리어와 나오미 울프가 캐널드의 『임신중지 신화』와 더불어 임신중지 이슈를 다시 꺼낸 일은, 1990년대 후반에 모성과 태아중심적 애통함이 서로를 강화하는 서사가 공적 담론과 프로초이스 정치를 지배했음을 보여 준다.

태아중심적 애통함은 프로초이스와 반임신중지를 잇는 가교 역할을 했다.

1980년대부터 반임신중지 운동은 전략을 바꿔 태아에서 여성으로 중심을 옮겨 갔다. 그리하여 안티초이스와 프로초이스 지지자들은 계속되는 애통함과 트라우마를 임신중지의 불가피한 결과로 재현하는 데 골몰했다. 임신중지의 애통함과 트라우마는 뚜렷한 정치 의제 없이도 지배적인 설명이 되었고, 개중엔 경험담이 많았다. 중립성을 가장해 임신중지가 여성에게 ‘정말로 어떠한지’를 묘사하면서 자신들의 주장을 강화한 것이다.

임신중지 뒤 끔찍하게 고통받는 여성의 이야기는 지난 30여 년간 신문에서 다뤄졌다. 임신중지에 대한 특정한 감정이 공론장에 할애되는 양상은 정치적 성격을 띤다. 태아중심적 애통함은 단연 반임신중지 정치다.

논설에서 임신중지가 부정적 경험이 될 수 있다고 한 말에는 어떤 경우 그렇지 않을지 모른다는 함의도 있다. 그러나 임신중지에 계속 부정적 정서가 따라다니면서, ‘될 수 있다’에 깃든 불확실성은 가려졌다.

행복과 불행의 원인을 대상에게 돌리는 일은 단순히 특정 감정상태를 설명하는 것 이상의 역할을 한다. 여기엔 그 대상이 우리에게 좋은가 해로운가 하는 판단이 들어 있다. 쾌락을 극대화하고 고통을 최소화하는 공리주의적 윤리는 어떻게 ‘좋은 삶’을 살 것인가라는 일상의 주문이 되었다.

임신중지의 애통함과 트라우마는 2006년과 2008년 연방의회 토론과 빅토리아 주 의회 토론에서 눈에 띄는 주제였다. 법안 지지자들은 이 감정 각본을 인용해, 입법의 맥락과 별개로 여성은 임신중지가 일으킬 끔찍한 효과 때문에 그 조치를 피할 것이므로, 임신중지에 더 잘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애통한 임신중지’와 ‘즐거운 모성’이라는 감정경제는 아이를 갖지 않은 여성을 ‘아이 없는childless’ 여성으로 부르는 식의 담론을 통해 힘을 얻는다. ‘아이로부터 자유로운childfree’이라는 대안적 명칭과 비교했을 때, ‘아이 없는’이라는 말에는 아이 없이 사는 삶이 상실과 불완전에 가깝고, 아이가 있어야 완전함이 가능하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아이 없는’은 남성보다는 여성에게 붙는 형용사인데, 완전함에 관한 전제가 특별히 젠더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아이로부터 자유로운’이라는 형용사는 양육할 때 생기는 시간ㆍ돈의 제약 조건을 인지하면서, 모성을 (이를테면 이전의 독립성에 대한) 상실로 다시 상상할 여지를 준다. 단언컨대 모성에 대한 후회나 상실은 사실상 입 밖에 낼 수 없는 감정이다.

임신중지를 애통해하는 여성이 후회하지 않는 여성보다 대중적 관심을 많이 받는다. 마찬가지로, 한 번도 가져 보지 않은 아이를 갈망하는 여성은 아이를 낳지 않고 가임기를 마무리한 여성 가운데 가장 두드러지는 인물형이다. 생물학적으로, 그러니까 보편적이며 몰역사적으로 그려진 아이에 대한 욕망은 두 서사에 모두 힘을 싣는다.

오늘날 모성은 임신중지를 선택한 여성에게조차 여성이 선택한 결과가 되었다. 모성적 행복과 임신중지의 애통함이라는 감정은 여성의 임신중지 경험에서 생겨나지 않았다. 도리어 사실(수많은 여성이 임신중지를 한다는 사실)을 이상ㆍ이데올로기(모성과 모성 욕망의 자연화)를 통해 담론적으로 복구했다. 이렇게 모성 욕망이라는 이데올로기는 여성들의 삶과 욕망의 이질성에도 불구하고 문화적 정당성을 얻을 수 있었다.

임신중지 선택의 감정경제는 임신과 임신한 주체에 대한 특정 시각에 바탕을 둔다. 그리하여 성취 혹은 파괴를 약속하며, 임신중지에 관한 선택으로써 여성에게 모성적 정체성을 부여한다. 여성은 모성적 행복이라는 환상을 벗어날 수 없다. 그 환상은 여성에게 용인되는 척도를 타인중심적 정체성과 모성중심적 열망으로 좁게 한정한다. 임신중지는 살면서 한 번이라도 어머니가 되지 않기를 선택하는 행위인데, 이마저 규범적 프레임 안에 들어온다는 것은 모성적 행복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유연하고 강력한지를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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