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론과 화해하기
페미니즘 물리학의 도전
21세기 사이보그의 형상
인류세의 위기에 맞서기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시몬 드 보부아르의 유명한 말은 여성을 태어나는 존재로 여겨 온 현실을 겨냥한다. 여성이 어떤 몸으로 태어났는지 설명하는 생물학은 과학적사실을 기술한다는 명목으로 여성의 몸에 대한 사회적 가치를 재생산하고 강화한다. 그러나 페미니즘과 생물학이 충돌하는 진짜 이유는 생물학 지식이 성차별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서가 아니다. 그보다 더 깊은 뿌리에 인간의 가능성을 선천적 자질에제한하는 생물학적 결정론에 대한 페미니즘의 우려가 있다. - P128
왜 강간과 같은 성폭력 가해자는 주로 남성일까? 남성만 연구 대상으로 보는 생물학이 문제일까, 남성중심적 사회가 문제일까? 강간을 진화의 산물로 설명하는 진화생물학 연구가 있다. 페미니즘은 이러한 과학이 실제 성범죄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쓰인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페미니즘의 우려 섞인 주장 역시 과학적 사실과 사회적 가치를 뒤섞어 보는 자연주의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 P130
미국진화론자 바버라 스머트는 다른 영장류 사회에 비교해 인간 사회에서 남성이 여성의 성애 활동, 예를 들어 자신이 아닌 다른 남성과 관계 맺는 행위를 통제하는 경향이 더 극단적으로 나타난다고 짚었다. 이는 인간 종이 다른 어떤종보다남성연합이 강하고 여성 연합이 약하기 때문이라는 가설로이어진다. - P133
과거의 다윈주의 페미니스트와 가까운 오늘날의 페미니스트 진화론자들은 페미니즘과 진화론의결합이 서로에게 유용한 자원이 될 가능성을 알고있었다. 진화론이 발견한 지식은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를 반박하는 강력한 증거로 페미니스트 정치의 자원이 될 수 있다. 한편 페미니즘은 진화론 연구가 남녀와 인간 사회의 가능성을 제한하는 결정론의 논리에 오용되지 않도록 학계와 현실 사이의 균형을 맞춰줄 것이다. - P137
강간을 생물학의 문제로 보자는 제안은 강간을 남성의 본능으로 인정하자는 주장과 다르다. 강간을 예방하기 위해 신체적 개입을 고려하자는 주장으로도 나아갈 수 있다. 그렇다고 진화론이 강간을 정당화한다고 우려하는 이들을 사실과 가치를혼동하는 어리석은 사람으로 깎아내릴 일도 아니다. 현실은 사실과 가치가 말끔히 분리되기보다는 뒤섞여 있다. 그렇다면 강간의 진화론은 성폭력을 두려워하는 여성을 보호하자는 지향을 적극적으로 추구해야 한다. - P138
과학을 거대한 사다리에 비유하면 가장밑에는 심리학, 고고학, 인류학 등 사회 과학으로여겨지는 분과가, 그 중간즈음에는 생물학이나 의학이, 그 위로는 화학이나 지구과학이 배치될 것이다. 물리학, 천문학, 수학 등은 사다리의 꼭대기에가깝게 배치된다. 사다리 위쪽에 있는 분야는 보통사회적 영향을 덜 받는 과학이라고 간주된다. - P141
만약 자연을 하나의 기계로 보는 시각이 사람들 사이에 공유되지 않았다면 근대 물리학은 세계를 설명하는이론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것이다. 자연에 대한 과학적 설명이 참된 지식으로 수용되려면 사람들 사이에 먼저 사회적으로 익숙하고 합의된 자연의 상이 있어야 한다. - P143
덴마크 교육인류학자 카트리네 하세는 물리학의 양식이 남성화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그가 말하는 과학의 양식이란 특정 과학을 교육받고 연구하는 데에 투여되는 감정과 상상, 경험 등을 아우른다. 물리학과 학부 교육 현장을 연구한 하세는남학생들은 수업 중 여학생들보다 수업을 방해하는 농담이나 장난을 더 많이 치지만 보통 그 행동이 용인된다고 분석했다. 교수의 의도를 거스르는남학생들은 예의 없고 면학 분위기를 해치는 질타의 대상이 되기보다 창의적이고 실험적인 사람, 더나아가 유망한 물리학자가 될 잠재적 특성을 지닌인물로 여겨졌다. 남학생들의 돌발 행동이 물리학과의 중심 문화가 된다면 주로 수업 자체에 집중하는 여학생들은 자신의 능력과 물리학자로서의 진로를 회의하다가 학계를 떠날지 모른다. - P147
「사이보그 선언문」의 핵심 단어는 ‘모순‘이다. 해러웨이는 냉전에 복무하는 우주 전사를 상징했던 사이보그를 기술과의 결합을 두려워하지 않는여성의 상징으로 바꿨다. 여성은 과학기술에 충실한 동시에 배반하는 모순의 전략을 택할 수 있다고본 것이다. 이러한 전략은 억압 아니면 해방의 언어로 기술되어 온 여성과 기술의 경직된 관계를 전복할 가능성을 열어 준다. 여성이 기술을 변화시키는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인식은 기술의 소비와 생산에 대한 여성의 적극적인 개입을 촉구했다. - P157
현실의 사이보그는 선언과 선택만으로만들어지지 않는다. 성형 기술의 실제 작동은 다른외과 수술이 작동하는 방식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성형 수술의 수행에는 의사 외에 간호 및 상담, 병원 경영 등을 담당하는 인력이 필요하며, 수술중은 물론이고 수술전후 상담 및 회복 과정에 여러 약품과 도구, 장비, 공간 등이 동원된다. 성형 수술을 받는 여성이 사이보그가 되는 과정에는 정상적인 몸을 규정하는 의학 지식체계와 외모지상주의 담론 외에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운 물질과 지식, 노동이 개입한다고 보아야 한다. - P162
여성에게 엄격한 미의 기준을 요구하는 한국 사회에서 성형 수술을 받은 여성들은 곧 동경과 비판, 희화화의 대상이 된다. 그런데 정작 성형 수술 논의에서 수술의 실제 효과에 대한 평가는 잘 다루어지지 않는다. - P163
현실의 사이보그는 기술을 통해 변화한 몸과익숙해지는 과정을 거치며 살아가야만 한다. 수술덕분에 더 예뻐졌는지, 수술결과가 내게 만족감을줬는지, 성형 후의 삶이 행복한지 등은 변화한 몸과 맺은 새로운 관계의 결과물이지 기술 자체의 결과가 아니다. 사이보그가 된다는 것은 성공과 실패 중 하나를 선택하는 객관식 문제 풀이가 아니라 성공과 실패 사이를 오가는 긴 주관식 답안을 적은 과정과 비슷하다. - P164
한때 여신에 비견되는 숭배와 경외의 대상이었던 자연은 근현대 사회를 거치면서 인간의 필요에 따라 사용 가능한 대상으로 취급받게 되었다. 한편 가부장제 사회의 모성이데올로기는 오랫동안 여성에게 출산과 양육,돌봄 등의 노동을 강요해 왔다. - P169
이것이 자연과 여성에 대한 유구한 착취의 역사다. 그러나 이는 인류와 지구를 되살릴 잠재력이 다름 아닌 여성에게 있다는 점을 역으로 시사하기도 한다. 에코페미니즘은 생명력과 창조력을 빼앗긴 채 단절되었던 자연과 여성의 풍부한 관계를 복원할 수 있다면, 여성이 자연을 관리하는 주체로 나서서 우리 세상을 지속 가능하게 바꿀 수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에코페미니즘의 주장은 20세기 말 환경 문제의 해결책으로 수용되기도 했다. - P170
지금도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사람 중에 자연과여성을 동일시하는 에코페미니즘의 주장을 여성의역할을 제한하고 남성이 지배하는 구조에 복무하는 순진한 발상으로 여기는 사람이 적지 않다. 전통적인 여성상과 모성 이데올로기를 강화할 위험이 큰 에코페미니스트들의 주장은 여성의 본질을생물학적 몸에 제한하지 않고 여성의 범주를 확장하려 한 페미니즘의 기조와 맞지 않았다. 그 때문에 최근까지도 서양 페미니즘 이론가들의 핵심 논의에서 에코페미니즘은 잘 보이지 않는다. - P172
과학기술과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에코페미니즘이 혹시 인간이 이룩한 찬란한 문명을 등지고 자연으로 회귀하자는 모호한 외침처럼 들리지 않는가? 초기 문제의식에는 분명 그런 측면이 있다. 하지만서구 근대 과학의 기계론적 세계관을 철저히 비판한 머천트도 자연과 여성의 회복에 지역 생태 및지역민의 삶에 맞는 과학기술이 필요하다는 점은받아들인다. - P176
기후 위기와 감염병 대유행의 시대에 자연과인간이 공존하려면 경쟁과 지배의 전략 대신 돌봄의 전략이 필요하다고 반다나 시바는 말했다." 경쟁과 지배를 우선하는 전략이 지질 시대를 왜곡하는 과학기술을 낳았다면, 돌봄을 기본 원칙으로 삼는 전략은 지구와 인류를 구출하는 과학기술을 만들 희망이다. - P180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은 괴짜 엔지니어가 아니라 에코페미니스트 엔지니어다. - P181
과학이 모든 지식의 꼭대기에 있다거나 사회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다는 믿음인 과학주의 과학만능주의는 과학이 신화화되었을 때 작동한다. 신비의 베일을 벗은 과학에는 그런 믿음이 통하지 않는다. - P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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