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눈앞에 벌어지는 정치는 우리들의 것이아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발상이 아니다. 그럴 때 정치는 예술가를 유혹하지 않는다. 그것은 마네킹처럼 낯설다. - P261

염치가 없거나, 천재가 있거나, 어느 쪽이어야 했으나 그는 그 어느 편도 못 되었다. 그것이 그를 초조하게 했다. 그의 의식의 밑바닥에서 늘 그를 노리고 있는 생각. 그는 비열한 인간이며, 남의 빵을 훔치고 있다는 도덕의 비난에 맞서기 위해서는, 그는 천재일 필요가 있었다. 어디까지가 순수한 창조의 욕망이고어디까지가 그런 실용을 위한 초조감인지는 물론 확실하지 않았다. 그 두가지가 모두 진실이라고 하는 편이 무난한 설명은 된다. - P265

에고는 보편의바다에 빠져서 없어진다. 그것은 해결이 아니다. 그것은 퇴화다. 보편과 에고의 황홀한 일치. 그것만이 구원이다. 어떠한 이름 아래서도 에고의 포기를 거부하는 것. 현대 사회에서 해체되어가는에고를 구하는 것, 그것이 오늘을 사는 작가의 임무일 것이다. 이광수처럼 ‘여울‘에 가야만 하는가. 허숭은 물론 가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예술가는 아니다. 그들은 흙 대신에 종이를 선택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들은 노동하지 않는 대신에 에고의 난파를 막을책임이 있다. 그리고 그 책임을 다하는 방법이 한 가지일 필요는없다. 아니, 그렇게 속여서는 안 된다. 나는 과연 누구를 무엇에서구원한다는 사랑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그런 것이 없다. 내가 소설을 쓴다는 일은 그저 쓰는 것이다. 예술을 위해서, 아니 사람을사랑할 수 없는데 예술 같은 건 아무래도 좋다. 사랑하는 길을 열기 위해서? - P271

누가 앞설지 뉘라서 알리오. 앞서지 않아도 좋다. 내가 안 하면 그만이니까. 그러니까 나는 누워 있다. 나는 뛰지 않는다. 나는 농촌계몽도 안 하고 사회 조사도 안 한다. 여울이 망하는 것보다 내가 망하는 것이 더 아프니까. 살여울이 망하는 것은 너도 망하는것이다? 그렇지 않다. 나는 망할망정 살여울의 주민은 망하지 않는다. 적어도 앞으로 올 세계에서는 그리고 살여울은 망하지도않을 것이다. 김학이 같은 사람들이 한사코 지킬 테니까. 나의 무대는 그 다음이다. 나는 회피하는 것인가. 그렇다. 회피하는 것이다. 정치의 악을 ‘에고의 사랑‘으로 해결해보겠다는 생각을 나는거부한다. - P289

우리는 지금 현지에서 사냥에 내몰린 니그로들이다.
곰을 잡기 위해서, 내가 북한에서 본 것도 마찬가지였다. 자존심의 한 조각도 없는 사대주의. 사람은 정치 속에서 살고 그 정치가남북을 통틀어 남의 다리 긁는 희극일진대, 그 속에 사는 개인은어떻게 손발을 놀려야 하는가. 여기서 국가네 민족이네를 생각한다는 것은 나무 위에 올라가서 고기를 잡자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면, 아니, 실수할 뻔했구나. 마치 애국자가 되고 싶은데 시세 탓으로 못 된다는 식으로 변명하는 것처럼, 아니다. 애국자는 싫다. 무슨 수를 쓰든지 애국자가 되는 길만은 피해야 한다. 최소한 애국자는 되지 말아야 한다. 애국자가 된다는 건 사냥의 몰이꾼이는 일이니까. 사냥꾼이 못 돼서? 아니, 사냥, 그것을 별로 탐탁해하지 않으니까. - P292

신과 영웅, 여신과 왕녀들의 시대는 갔다. 우리는 지금 저마다 신인 시대에 살고 있다. 나는 신이고 당신은 여신이다. 나는 아폴로이고 당신은 비너스이다. 저 잘난 멋에 사는 시대. 모든 사람이 왕위계승권繼承을 가지고있다. 물론 에고들 사이에 차이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질이 아니라 양의 차이다. 혈통과 신분의 차이가 아니라 주소와 직업의 차이다. 그래서 에고의 평등은 그림의 떡이 되었다. - P295

"아무튼 독고준 선생께서는 못마땅하지 않은 게 하나도 없으셔.
혁명가가 안 된게 다행이야." - P306

참으로 혈연이라는 것이야말로 신화가 아니행렬行列.
들의고 무언가. 수백 년을 두고 내려오는 유전자항렬이란 말은 그럴싸하다. 그것은 돌림자의 모자이크가 아니라서로 닮은 버릇을 가진 생식 세포들의 꾸준한 항해航海의 선열船列이다. 그 중에서 내가 차지하는 저리, 그것이 우리들의 값이었다. 항렬 속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한 이 우주에서의 나의 위치는 든든한 것이었다. - P310

OP에서도 나는 줄곧 그 따분한 공기와 햇볕과 포대경砲臺鏡 속의 적敵을 짓씹어봤다. 그러나 실은 나 자신의 살을 파먹고 있었던 것이다. 김순임을 김학을 현호성을 물어뜯었다고 생각한 것도 착각이었다. 내 살을 파먹고 있었을 뿐이다. - P334

우리 시대의 모험은 가까울수록 진짜다? 아니 어느 시대나 그렇지 않았을까. 어느 시대나. - P335

"자네가 말하는 혁명이란 뜻있는 분들이 모여서 당파를 만들고폭력으로 정권을 인수한다는 것이겠지?"
학은 웃으며,
"그게 혁명이잖아?"
"그러니까 싫어. 이것 봐. 혁명은실천하는 거 아니야? 지금 당장에 민주주의를 대신할 새 신화란 걸 생각할 수 있나? 없단 말야. 그렇다면 그건 혁명이 아니라 강제적인 정권 교체, 즉 사람을 바꾸는 것밖에 안 되는 건데, 난 새 신앙을 제시하지 않는 사람의 교체는 위험스런 일이라고 봐. 이 자네 글에 있는상황과는 달라. 자네 말처럼 상해의 권위를 장한다는 신화적인 후광이 있는 인물이나 집단인 경우라면 몰라도 지금 우리 사회에 어디 그런 인물이나 집단이 남아있나?
어느 날 이천만 민중이 홀연 인간적 모욕을 실감하고 일제히 폭동을 일으킨다면 그땐 나도 그 대열 속에 있을 거야." - P371

그는 창으로 걸어가서 유리 속을 들여다보았다.
창백한 남자가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 남자는 쌀쌀하게 말했다. 정직하게 살아. 아주 정직하게. 이 집을 나가란 말인가. 그렇게 바본 줄은 몰랐어. 그러면 그러면 나는 용기가 없었던 게 아니다. 나는 신파는 싫었을 뿐이다. 나는 절제를 하려던 게 아니다.
돈키호테를 재연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필요하다면 한다. 돈키호테인 줄 알면서 풍차를 향해 달려가는 길밖에는 이 시대에는 남지 않았다는 걸 몰라? 그리스도 없이 유다가 돼야 한다는 걸 몰라? 너는 천민을 깔보고 있다. 공주하고만 정사를 하려고 들어.
네가 신이라면 모든 사람이 신이야. 상대역이 없다고 건방지게 굴지 마라. - P38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