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 시절의 그에게는 철학이 모든 것이었다. 부모도 없고 돈도 없고 명예도 없는 청년에게, 철학이란 모든 것을 갚고도 남을 꿈을 보여주는 단 하나의 것이었으리라. 또는 양반과 종놀음으로 헤아릴 수 없는 세월살아온 고장에서, 꿈을 이룰 엄두조차 내지 못할 사회에서, 철학이란, 양심의 마지막 숨을 곳이었으리라. 아니면 그 신분이 임금이건 종이건 사람이 산다는 일에 놀라움을 느끼고, 그 뜻을 캐보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마음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어느 것이든 좋고, 철학이란 그 모든 것을 다 뜻한다. 어쨌든 그는 철학의탑 속에서 사람을 풍경처럼 바라보았다. - P106

타지 않기는 명준의 심장뿐이었다. 그 심장은 두근거림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 남녘에 있던 시절, 어느 들판 창창한 햇볕 아래서당한 그 신내림도, 벌써 그의 몫이기를 그친 지 오래다. 그의 심장은 시들어빠진 배추 잎사귀처럼 금방 바서질 듯 메마르고, 푸름을잃어버린 잿빛 누더기였다. 심장이 들어앉아야 할 자리에, 그는 잿빛 누더기를 담아 안고 살아가는 사람이 돼 있었다. 그 누더기는 회색 말고는 어떤 빛도 내지 않았다. - P124

인류는 슬프다. 역사가 뒤집어씌우는 핸디캡. 굵직한 사람들은 인민을 들러리로 잠깐 세워주고는 달콤하고 씩씩한 주역을 차지한 계면쩍음을 감추려 한다. 대중은 오래 흥분하지 못한다. 그의 감격은 그때뿐이다. 평생 가는 감정의 지속은 한 사람 몫의 장에서만 이루어진다. 광장에는 플래카드와 구호가 있을 뿐, 피묻은 셔츠와 울부짖는 외침은 없다. 그건 혁명의 광장이 아니었다. - P158

에덴 동산에서의 잘못에서 법왕제에 이르는 기독교의 걸음걸이는, 그대로 코뮤니즘의 낳음과 자람의 걸음에 신기스럽게 들어맞는 것이었다. 그들은 쌍둥이 그림이었다. - P184

명준의 눈에는, 남한이란, 키르케고르 선생식으로 말하면, 실존하지 않는 사람들의 광장아닌광장이었다. - P186

중립국, 아무도 나를 아는 사람이 없는 땅. 하루 종일 거리를 싸다닌대도 어깨 한번 치는 사람이 없는 거리. 내가 어떤 사람이었던지도 모를뿐더러 알려고 하는 사람도 없다. - P192

총구멍에 똑바로 겨눠져 얹혀진 새가 다른 한 마리의반쯤한 작은 새인 것을 알아보자 이명준은 그 새가 누구라는 것을알아보았다. 그러자 작은 새하고 눈이 마주쳤다. 새는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눈이었다. 뱃길 내내 숨바꼭질해온 그 얼굴 없던 눈은 그때 어미 새의 목소리가 날아왔다. 우리 애를 쏘지 마세요! 뺨에 댄 총몸이 부르르 떨었다. 총구에는 솜구름처럼 뭉실한덩어리가 얹혔을 뿐. 마스트 언저리에 구름이 옮겨왔다. 망가진 기계가 헐떡이듯, 밖으로 나갔던 몸을 간신히 창 안으로끌어들이면서, 총을 내린다. 거울 속에 비친 얼굴에는 굵다란 진땀이 이마에 솟고, 볼때기가 민망스럽게 푸들푸들 떨린다. - P203

그는 지금, 부채의 사북자리에 서 있다. 삶의 광장은좁아지다 못해 끝내 그의 두 발바닥이 차지하는 넓이가 되고 말았다. 자 이제는? 모르는 나라, 아무도 자기를 알 리 없는 먼 나라로 가서, 전혀 새사람이 되기 위해 이 배를 탔다. 사람은, 모르는사람들 사이에서는, 자기 성격까지도 마음대로 골라잡을 수도 있다고 믿는다. 성격을 골라잡다니! 모든 일이 잘될터이었다. 다만한가지만 없었다면. 그는 두 마리 새들을 방금까지 알아보지 못한 것이었다. 무덤 속에서 몸을 푼 한 여자의 용기를, 방금 태어난아기를 한 팔로 보듬고 다른 팔로 무덤을 깨뜨리고 하늘 높이 치솟는 여자를, 그리고 마침내 그를 찾아내고야 만 그들의 사랑을. - P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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