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를 잊어버리고 있다가, 문득 무언가를 잊었다는 것을 깨달은 느낌이 든다. 무엇인가는 언제나처럼 생각나지 않는다. 실은아무것도 잊은 것은 없다. 그런 줄을 알면서도 이 느낌은 틀림없이 일어난다. 아주 언짢다. - P26

느닷없고 짤막하면서, 풀이되지 않은 것이 풀이된 것 같아 뵈는,
그 짤막한 글월들의 힘과 그 뜨거운 여름 햇볕 아래서 겪은 어질머리 사이에는 닮은 데가 있다.
깜빡할 사이에 오는 그런 복 받은 짬은 하기는 어떤 마이너스의 마당자리에서 일어나는 꿈일 것이리라. 비록 플러스의 자리래도 좋았다. 쉴새 없이 움직이고, 쫓아가고 하더라도, 그와 같은 비치는 단단함 속에 젖어가면서 살 수 있는 삶. 명준이 찾는 삶이다.
아무 일에도 흥이 안 난다. 마음을 쏟을 만한 일을 찾아낼 수가 없다. 가슴이 뿌듯하면서 머릿속이 환해질, 그런 일이 없을까? 도낏자루 안 썩는 신선놀음 같은. - P43

아무도 광장에서 머물지 않아요. 필요한 약탈과 사기만 끝나면 광장은텅 빕니다. 광장이 죽은 곳. 이게 남한이 아닙니까? 광장은 비어있습니다. - P67

돈의 길이 삶의 길인데, 그저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거니 돈을 잊고 살아온다. 제 삶을꾸려주는 돈 말이다. 밥을 먹고, 잠자리를 받고, 학비를 타고, 책을 사고 하는 데 쓰이는 돈이라는 물건을 한번도 ‘자기‘라는 것의살갗 안에 있는 것으로 느껴본 적이 없는 그였다. 젊고 가난한 철부지 책벌레다. - P73

사람이 사람을 안다고 말할 때, 그건얼마나 큰 잘못인가. 사람이 알 수 있는 건 자기뿐. 속았다 하고 때었다 할 때, 꾸어주지도 않은 돈을 갚으라고 조르는 억지가 아닐까. ‘사랑‘이란 말 속에, 사람은 그랬으면 하는 바람의 모든 걸 집어넣는다. 그런 잘못과 헛된 바람과 헛믿음으로 가득 찬 말이 바로 사랑이다. 어마어마한 그물을 읽어낸 철학자가 늘그막에 가서 속을 털어놓는 책을 쓰는데, 그 맺음말에서 ‘사랑‘을 가져온다.
말의 둔갑으로 재주놀이하는, 끝없는 오뚝이 놀음, 철학이란 그렇게 가난한 옷이었다. - P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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