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론정치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걸쳐 재정과 국방 문제라는 국내외의위기가 감지되었을 때, 그 해결책으로서 일본인들이 주창한 주요한 캐치프레이즈 중 하나가 언로통개(言路洞開)였다. 즉 정부는 사회적 지위나 권력의 고하에 얽매이지 않고, 능력 있는 자의 정치적 의견 표명을허용, 권장하고, 이에 기반을 둔 정치를 운영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언로통개의 주장은 19세기에 들어서자마자 급격히 확산되기 시작해, 점점 어떤 정치세력도 그 정당성만은 부정하기 어려울 정도가 되어 갔다.
언로통개가 정당성을 갖게 되자 그것은 상서, 회의라는 형태로 정치현장에서 실현되었다. 상서의 활성화로 번 정부는 여론의 동향에 주의하기 시작하고, 관계된 몇몇 역인만으로 정책을 결정하던 관습은 수정되어, 정책을 둘러싼 토론이 행해지는 ‘회의‘가 정책 결정의 기구로 기능하기 시작한다. - P186

‘토의정치‘의 형성에는 그것을 뒷받침하는 미디어나 토의 공간의 존재가 불가결하다. 이 시기 ‘토의정치‘의 형성을 뒷받침하는 미디어로서는 봉서(封書), 상서 등을 들 수 있겠고, 토의 공간으로서는 정부 내 회의, 어전회의 같은 회의 공간이나 번교, 사숙, 향교 등학교 기관, 그리고 종교 기관 등을 꼽을 수 있다. 이 중에서 필자가 주목한 것이 봉서, 상서 등의 미디어와 사숙, 향교, 사·사(社·祠)라는 토의실행 · 여론 형성의 장(場)이다. - P221

미토번 남상운동은 앞서 살펴본 구마모토번과 사쓰마번의 경우와비교할 때 장기간에 걸쳐 지속되었다는 점, 죠카마치의 번교, 사숙뿐아니라 지방의 향교가 큰 기반이 되었다는 점, 따라서 번사 이외의 상층 민중이 학적 네트워크‘에 포섭되고 정치화되어 가는 과정을 잘 보여 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 P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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