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사록당’을 통해 본 ‘학당’의 특징
- 소라이학과 한당 훈고학을 배척하고 주자학을 숭상
- ‘학당’의 상대는 또 하나의 당파가 아닌 번의 기성체제
- 회독이라는 학습 방법을 채택
- 결사성

1847년(弘化4)경이 되면 겐모쓰 자택의 학습회는 이미 죠카마치(城下町)에서 유명해져 문벌의 청년 사무라이들이 다수 참여했을 뿐 아니라, 향당(鄕黨)들도 연계되었다. "쓰보이, 교마치의 향당들이 크게 분기하여 실학을 제창했다"는 말이, 이들이 겐모쓰 자택 학습회에 참석했다는 것인지 아니면 앞에서 본 것처럼 쇼난 사숙에 참석한 것을 이렇게 표현한 것인지 분명치 않으나, 어쨌든 고카(弘化) 연간(1844~1847)이 되면 겐모쓰 자택 학습회에 동조하는 문벌, 향당 세력이 적지 않게존재했다고 볼 수 있다. - P146

번교 바깥의 학습회가 활성화되자 학생들은 자연히 번교출석과 번교에서의 학습을 소홀히 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번교 내 교원들의 불만과 반발이 생겨났다. - P148

학문과 경국(經國)의 관계를 강조하는 것이었다. 야심에 찬 학문 리더들은 경국에 무관심한 채 자구 고증이나 사장적 경쟁 또는 박람강기(覽强記)를 존중하는 풍조를 비판하면서, 그 대신 몇몇 제한된 텍스트민을 중시하고 그 속에서의 복잡한 언설 체계를 간단명료하게 제시한 후이를 곧바로 정치문제와 연관시키는 학습 방법을 택했다. 이는 젊은 시무라이들을 매혹시켰다. 이들이 자신들과 다른 학문 방법을[특히 번ㅠ의] 강하게 비판하고 당파성을 강화해 나가면서 정치적 발언을 하기 시작할 때 ‘학당‘은 형성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 P150

이 시기 등장하는 학당‘은 당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던 정치체제에서 한쪽의 정치세력이 초기적으로 당을 형성해 나가는 성격의 것이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 점은 사쓰마번에서도 근사록당(近思錄黨)은 결당의 이름으로 비판받고 있는 데비해서, 근사록당은 타 세력을 당(黨)으로 지칭하고 있지 않은 점에서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1850년대 이후 정치세력들이 자신을 ‘정의당(正義黨)‘, 상대방을 속론당(俗論黨)‘으로 이름 지어 상호 비난하는 것과는 다른 상황인 것이다. - P150

‘근사록당‘은 이어 자신들의 스승인 기도 다케키요의 가격(家格)을 높여 준 다음, 야마모토를 대신해 어전강의를 담당케 했다. 즉 1808 년(文化5) 정월 18일 기도가 처음으로 어전에서 『태극도설』을 강의하기 시작해 이로부터 3일 혹은 5일 간격으로 강의가 계속되었다. ‘근사록당‘의 핵심인 구마모토도 어전에서 『태극도설』 수장을 강의했다. 그리고 이어 정월 21일 야마모토가 공식적으로 면직되어 번교조사관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근사록당’은 권력을 잡은 지 4년 만인 1808년 시마즈 시게히데의 반격을 받고 권력의 자리에서 일제히 쫓겨났다. 수십 명이 면직된 것은 물론 중심인물인 지치부와 가바야마는 할복했다. - P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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