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

19세기 중반 과학자들 사회에서 과학의 엄격한 보편성, 무조건적 필요성, 절대적인 진리성을 버리고 지식의 자성적 특징, 유효조건, 상호주관성, 독립성을 강조하는 과학의 새로운 개념이 확산되었다. - P2080

중국에는 언어훈련을 받은 인재가 전혀 없었고, 이것이 중국과 서방의 불균형한 관계에서 중국 측 열세의 한 요소였다. 황실은 오랫동안 왕조의 전통을 지키느라 ‘오랑캐’가 중국어를 배우는 것을 강력히 막아왔다. - P2088

메이지 시기에 보다 집약적으로 서방 지식의 수입이 가능했던 이유는 서방의 전문가를 초빙했을 뿐 아니라 번역인재를 체계적으로 양성하는 제도가 수립되었기 때문이다. - P2089

유럽 각 민족은 언어공동체로 간주되고 또 그렇게 선전되었다. 고상한 문어는 모든 민족의 핵심적인 성취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여러 지역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말하는 언어는 그 지역의 풍속과 강고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 P2093

19세기의 가장 중요한 문화적 진보 가운데 하나는 문해력의 대규모 확산이었다. 대중적인 문해력의 보급은 하나의 과정이었다. - P2095

엘리트들이 문해력 보급에 대해 보인 반응은 이율배반적이었다. 한편으로는 이성적인 읽기와 모범적인 문화생활을 통해 ‘보통사람’을 계몽시켜 미신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른 한편으로 읽고 쓰는 능력의 대중화는 일반적으로 명예와 권력의 등급질서의 변혁을 유발하거나 현존질서를 건드릴 수 있었다. - P2099

현대 이전 사회에서 기타 국가와 비교할 때 중국의 읽고 쓰기 교육은 높은 수준이었으나 19세기에 들어와 중국의 읽고 쓰기 교육은 거의 정체되었다. - P2104

국가가 청년의 공식교육을 독점적으로 통제한다는 구상은 19세기의 혁명적인 혁신이었다. - P2109

몇몇 국가에서는 대학생들의 정치적 행동이 관심을 불러일으킬 때라야 대학과 관계없는 사람들이 대학의 존재를 의식하게 된다. 19세기 초가 되자 ‘대학생-청년-저항’이란 연상의 고리가 형성되었다. - P2117

19세기 말이 되자 새로운 연구기관 이 생겨났지만 독일 개혁가들의 기본 구상은 연구 기능을 연구기관으로부터 대학으로 옮기고 독립적인 연구기관을 대학의 깃발 아래로 결집시키는 것이었다. - P2125

1880년부터 미국의 부는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대학을 설립하여 자신의 이름을 영원히 후세에 알리려는 부호들이 속출했다. - P2130

일본인들은 독일 역사학파가 제시한 사료비판과 실증주의를 흡수했으나 독일 역사학의 철학적 방법론과 문학적 서술 기교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 P2132

개별적인 지식의 이동성은 차이가 많았다. 어떤 지식은 다른 지식보다 쉽고 빠르게 움직였다. 유럽 지식은 내재적 우월성 때문에 자연스럽게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는 오래된 관념은 전혀 설득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지나치게 단순한 평가였다. 이런 평가는 지식의 접촉과 전파 과정이 일어난 특수한 문화적 정치적 상황을 무시한다. - P2136

언어의 관점에서 번역은 거대한 도전이었다. - P2138

일본의 회화는 유럽의 아방가르드가 당면하고 있던 문제에 해답을 제시해 주었다. 모더니즘 예술운동의 선봉에 서 있던 유럽 예술가들은 유럽의 영향을 받지 않은 일본의 예술작품에서 자신들의 노력과 일맥상통하는 방향을 발견했다. 바로 이 시기에 유럽의 일본예술에 대한 열광과 일본의 유럽예술에 대한 열광이 동시에 정점에 도달했다. - P2141

서방의 조성음악이 이국의 성소를 흡수하여 불안정해진 곳에서 아시아 음악이 깊은 영향을 미쳤다. - P2142

아무런 구분 없이 구원종교의 발생지로 인식되던 ‘아시아’는 비이성주의의 상징이 되어 서방의 이성주의와 논쟁적으로 맞서게 되었다. - P2143

과학의 제도적 확장은 자연과학과 의학 영역뿐만 아니라 인문학과 사회과학 영역에서도 일어났다. 이런 개념은 19세기 말에 새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이미 있어왔지만 이 시기에 과학계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 P2145

유럽에서만 동방학이 형성되었을 뿐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는 20세기 말이 되어서야 서방학의 싹이 나왔다. - P2151

당시에 문자 체계를 갖추지 못하고, 자위능력을 갖춘 국가를 형성하지 못했으며, 도시생활이 극히 일부이거나 아예 없는 유럽 이외 지역의 사회에 대해서는 동방학의 어문학 연구방법을 적용하여 연구할 수가 없었다. 이른바 ‘미개민족’ 또는 독일어로 ‘원시민족’에 대해서는 19세기 60년대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새로운 과학인 민족학이 주도하여 연구했다. - P2153

19세기 서방의 타자 연구의 학문적 발전은 그 속의 불쾌한 교만에도 불구하고 비유럽 문화의 역동적인 학문 활동에 대한 제국주의의 파괴적인 침입이면서도 동시에 그 시대의 세계화된 인문학의 기초를 놓은 동력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 P2156

모든 학과 가운데 지리학은 서방의 제국주의적 확장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 P2157

미슐레와 릴은 같은 시기에 현재와 과거의 사회 저층의 생활을 묘사했다. 그들의 작품에서 흘러나오는 사회 저층에 대한 동정심과 극히 사실적인 기술 방식은 당시로서는 보기 힘든 것이었다. 릴은 독일에서 ‘민속학’이라 불렀던 학문분야를 창시했다. - P2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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