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주권의 이상은 일단 개념이 적립되자마자 곧바로 모든 정치체제가 어떻게든 지켜야 할 표준이 되었다. 이것은 19세기의 진정한 신생 사물이었으며, 정치적 기대의 혁명이자 정치적 공포의 혁명이었다. 정치제도를 둘러싼 투쟁은 새로운 동력을 얻었다. 통치자의 ‘정당성‘과 그가 속한 신분집단의 오래된 권리를 어떻게 지켜낼지는 더 이상 정치의 핵심문제가 아니었다. 이제는 공동선에 관한 의사결정에 누가 참여할 수 있으며 참여해야 하는지가 정치의 핵심문제가 되었다. - P1624

영국의 법치개념은 제국이란 통로를 통해 모든 대륙으로 전파되었다. 비유럽인의 시각에서는 영국의 법치제도는 식민주의의 색채가 강하기는 했지만 현지인 통치자가 통치하는 이웃나라의 법치 상황보다 못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유권자의 범위는 단계적으로 확대되어왔다. 유권자범위의 확대는 부분적으로는 혁명투쟁의 전리품이었고 부분적으로는 위로부터의 타협의 결과물이었다. - P1635

‘잭슨 민주주의‘와 함께 미국은 1776년 이후로 다시 한번 세계 역사상 누구도 가본 적이 없는 길로 들어섰다. 19세기의 마지막 1/3시기 이전에 유럽 어디에서도 이처럼 경쟁적이며 때로는 폭력적일만큼 자유로운 논조가 가득한 ‘대중민주주의‘를 찾아볼 수 없었다. 여 여러 차례 정권교체를 경험했고 보편적 남성 투표권이 실현된 후에도각 주의 지사가 지니고 있던 권력이 아직 약화되지 않은 프랑스에도이런 형식의 민주주의는 없었다. - P1639

정치운동과 시민조직은 신분에 대한 고려에 얽매이지 않는 내부기능을 통해 민주주의를 가르치는 학교가 되었다. 이것은 미국과 영국만의 상황은 아니었다. 평등에 대한 요구는 흔히 사람들이 평등하게 모이는 소집단, 단체, 조직을 통해 표출되며 상호 제약 없는 소통을 통해 실현된다. 더 큰 규모의, 충돌이 빈번한 정치무대에서 평등에 대한 요구는 남김없이 표현된다. 이것이 사회주의와 그것과 연관된 풀뿌리 운동의 핵심이다. 예컨대, 많은 증거가 증명하고 있듯이초기의 독일 사회민주당은 오늘날의 정당과 같은 존재가 아니라 연합된 운동이었다. - P1642

19세기의 마지막 1/3시기 이후로 민간경제 부분에서 점차로 국가관료제도를 대규모로 복제하기 시작했다. 관료제도는 프로이센과나폴레옹시대 프랑스의 흔적이 분명하게 남아 있는 유럽의 발명품이었다. 그러나 유럽 이외에 중국, 오스만제국, 일본에도 관료제도의전통이 있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으며 이들의 관료제도는 ‘전근대적‘ 이라거나 ‘세습적‘ 이었다고 서둘러 평가절하해서도 안 된다.
19세기에 이들의 전통은 서방의 영향과 충돌하면서 다양한 결과를낳았다. - P1649

영국의 (인도) 식민지 관료제도는 국가기없는 정치지평에서 어느 날 갑자기 솟아오르지 않았다. 무굴제국과그것을 계승한 역대 정부의 핵심은 중국과 베트남 같은 관료조직이아니었다. 그들은 문관의 다양한 위계와 성숙한 문서제도를 갖추고있었지만 엄격하고 세밀한 공무원 관리체계를 갖지 못했다. 인도문관제도(ICS)는 그러므로 당시에 존재하던 기반 위에서 제한적으로수립될 수밖에 없었다. 인도문관제도는 동인도회사의 관리체계를직접 이어받았다. 동인도회사는 18세기에 세계에서 가장 복잡한 조직구조 가운데 하나였지만 여러 면에서 현대적인 특징을 갖추고 있었다. 직위의 분배는 객관적인 업적평가를 바탕으로 하지 않고 여전히 후견제도(Patronage)를 지키고 있었다. - P1651

중국(또한 베트남)의 관료제도는 완전히 ‘전현대적‘ 이지는 않았다. 중국의 관료제도는 두 가지 측면을 결합한 것이었다. 하나의 측면은 가족관계 또는 후견관계를 초월한 비인격적 원칙을 지킴으로써 고도의능력위주 인재선발방식을 실현했다는 것이다. 조선의 경우는 더 나아가 이런 원칙과 세습귀족의 지속적인 고위 행정직 점거 현상이 상호 용납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 P1655

오스만제국에서 (유럽이나 중국과 마찬가지로) 수백 년 동안 통용되었던 후견관습이 하루아침에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기준을 따르는 인사정책으로 대체되지 않았다. 두 가지 조류와 관념은 충돌하면서 동시에 서로 영향을 주었다. 1839년 이후의 탄지마트(Tanzimat) 개혁은 새로운 관료계층을 제국의 핵심적인 엘리트계층으로 만들어 놓았다.
1890년, 이 직업 공무원 집단의 숫자는 최소 3만 5,000명이었다. 백
년 전에 수천 명의 필사원은 모두 수도 이스탄불에 집중되어 있었지만 1890년이 되자 이스탄불에서 일하는 공무원은 소수의 신식 고급관원뿐이었다. 오스만 관료체제의 지방화는 19세기 후반에야 중국이 수백 년 전에 걸어간 길을 따라갔다. - P1656

일본은 독특한 관료제도의 현대적 형식을 찾아냈다. 그러나그것은 절반의 현대성이었다. 메이지시대의 정치질서에서 개인의자유와 인민주권은 낮선 사상이었다. 일본에서 통치자와 피통치자의 계약관계라는 유럽적 관념은 존재한 적이 없었다. 이리하여 군주가부장제는 합리적 관료체제의 시대에도 지속될 수 있었다. 일본의1889년 헌법은 천황은 만세일계(萬世一系)이며 ‘신성불가침‘의 존재로서 통치권을 독점한다고 규정함으로써 유럽 모형을 이탈했다. - P1658

19세기와 20세기에 각양각색의 경찰제도가 전파되면서 세계적인 범위에서 경찰력이 확대되었다. 경찰제도는 종주국의 수도에서 식민지로, 때로는 샴과 일본 같은 국가의 도입에 의해, 나아가 각 제국 내부에서도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전파되었다. - P1672

역설적이게도 (파가론 연구에서 이론화가 부족했던) 권력의 집적이 다른 영역 —— 민족주의 강령 —— 에서는 긍정적으로 수용되었다. 아무리 반동적인 군주라도 이제는 ‘짐이 곧 국가‘라고 말 할 수는 없었지만 국가가 곧 민족이란 관념은 널리 퍼졌다. 국가에 유익한 것이라면 민족에게도 유용했다. 이렇게 국가권력 합법성의 기반 개념이 바뀌었다. 민족국가는자기 고유의 존재이유를 갖게 되었다. 그 존재이유는 역사에 깊이 뿌리내린 왕조의 합법성이나 정치적 실체로서의 유기적 조화가 아니라 ‘민족이익‘ 이었다. 누가 민족의 이익을 정의할 것이며 나아가 그것을 정치로 전환시킬 것인지는 부차적인 문제였다. - P1691

달리 말하자면 국가의 강성은 결코 인류 진화의 결과가 아니라 세계적 재배치의 불균형한 결과였다. 다른 국가 보다 약하거나 낙후한국가는 쉽게 공격을 받았다. 약한 국가는 잠식당하거나 정복당할 위험을 안고 있었다. 근대 초기 유럽인의 상상 속에서 ‘동방‘국가는 모두 백성을 지푸라기로 아는 ‘폭정‘의 국가였다. 물론 사실은 전혀 달랐다. 방대한 관료기구를 가진 중국도 그렇지 않았다. 역설적이게도19세기에 아시아의 통치자들은 유럽 민족국가가 강력한 관료기구와중앙집권제를 건설한 방식을 빌려와 자신의 약점을 보완하려 했다. - P1692

제도 설계의 기본 의도는 정치 메커니즘의 단순화였다. 영국의 계몽사상가이자 공리주의 (功利主義) 학설의 창시자 제레미 벤덤(JeremyBentham)은 민주주의 이념에 관해 말하면서 현대사회에서 책임통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중간권력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가장 명쾌하면서 모든 민주정치의 강령이되는 기본 사상이다. 인민과 통치자는 가능한 한 중간 고리를 줄이고 직접 대면해야 한다. 그들을 연결시키는 것은 대의제도라야 한다. 대의제도는 선거와 대표 파견의 과정일 수도 있고, ‘신비한 연합‘ (unio mystica) — 군주 또는 독재자가 국가를 대표한다고 주장할 때 ‘인민‘이 박수를 치든지아니면 ‘사실상의‘ 의사표시를 통해 지지를 보내는 방식을 통해구현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원칙적으로 민족국가의 정치제도는 민족적 동질성과 헌법구조의 단순성을 기반으로 한다. - P1694

최소한의 기대치는 있었다. 모범시민은 개인이익의 추구와 민족 전체를 위한 희생 사이에서 훌륭한 균형감각을 가진 사람이어야 했다.
세기가 바뀔 무렵 많은 국가의 공적영역에서 사람들이 생각한 문제는 시대와 함께 나아가는 문제였다. - P16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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