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대추세가 지역에따라 표출되는 강도가 달라지고 정치형태에 투영되는 방식도 또한다른 이유는 무엇인가?
서유럽 국가가 역사적 표준이 아니라고 한다면 문제는 명쾌해진다. - P1586

물리력의 독점은 ‘현대’ 국가를 정의하는 자연스러운 속성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시도하여 획득한 역사발전의 예외적 상황일 뿐이다. 혁명의 시대에 폭력의 독점은 빠르게 와해되었다. - P1587

독재자에게 자신의 통치하에서 우대받는 군대와 경찰을 장악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이다. 일생의 분투를 통해 올라온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독재자는 자신이 통치자의 지위에 오를 수 있었던 특수한 상황을 어떤 방법을 쓰든—쿠데타이건 박수와 환호 속의 표결이건— 확고한 제도로 변환시켜야만 한다.

-> 한국사에도 독재자의 모습은 여럿 있었다. 특히 현대사에서 이승만은 경찰을 수시로 동원했던 모습이 있다. 박정희는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했다. - P1590

정치가가 권력을 위임받기 위해 유권자나 추종자들을 직접 만나 그들의 의견을 듣는 일은 19세기에 나타난 새로운 현상이었다. 이런 정치형식은 미국의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 임기 중에 처음 생겨났다. 그 후 앤드루 잭슨 대통령의 이름을 딴 잭슨 혁명과 함께 유행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건국의 아버지들의 엘리트주의를 배격하는 대중주의적 또는 ‘풀뿌리’ 정치 관념이 생겨나 ‘분파주의’라 비난받던 정당 간의 경쟁을 지지하는 흐름이 형성되고 있었다. 선출직 공직이 급격히 늘어났고 어떤 지역에서는 법관까지도 선거로 뽑았다. 유럽에서 민주주의의 실천은 오랜 시간이 걸렸을 뿐만 아니라 과두정치적 색채가 짙었다. 영국에서도 이런 상황이 1867년까지 지속되었다. 영국의 선거법은 미국에 비해 여러 가지 제한이 많았다. - P1595

겨우 수천 명을 다스리는 통치자가 있었는가 하면 수억의 신민을다스리는 통치자도 있었다. 어떤 전제군주는 직접 통치했고 의례적인 통치자의 지위에 만족할 수밖에 없는 군주도 있었다. 히말라야 산속과 남태평양의 작은 섬나라의 왕이건, 아니면 런던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면류관을 쓴 국가원수이건 그들에게는 두 가지 공통점이있었다. 하나는 국왕 또는 황제의 계승권을 보장해주는 왕조의 합법성이고 다른 하나는 군주의 개인적인 품성과는 관계없이 기본적인 존경과 숭배를 요구할 수 있는 왕관의 권위였다. - P1597

군주제 자체는 어떤 비판도 초월한 것이었지만 왕위에 있는 자는 반드시 통치능력을 증명해야 했다. 군주제는 백성의 다양한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각양각색의 책임과 사명을 완수해야 했다. 그러므로 식민혁명에 의해 군주제가 폐지되었을 때 아시아사회를 긴밀하게 교직(交織)해온 사상의그물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과거와의 연결을 상징하는 군주제가완전히 사라진 곳에서, 식민통치가 끝난 뒤 그나마 남아 있는 국가통합의 도구가 군대와 공산당뿐인 곳에서 과도기는 특히 험난했다. - P1603

19세기에 –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 의회가 의원들 가운데서 정부의 수뇌를 선발했고 정부 수뇌는 의회 다수의 지지를 받았기 때문에 자신 있게 군주를 대면할 수있었다. 동시에 내각 구성원 전체는 의회에 대해 책임을 졌다. 군주는 의회를 제치고 수상이나 내각 구성원 가운데 어느 한 사람도 해임할 수 없었다. 내각은 의회에 대해 집단 책임을 져야 하고 의회의 다수결은 모두에게 구속력이 있었다. 각료는 동료의 의견에 동의하지않을 때 내각 회의에서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할 수 있었지만 공적인상황에서는 내각 기율의 제약을 받았다. 이렇게 내각은 가장 중요한권력과 직능을 장악한 국가기구가 되었다. 유럽대륙 국가들의 헌법발전과정에서 등장한 전형적인 의회-군주 ‘이원제‘ 문제는 내각제라고 하는 상상력이 풍부한 방안을 통해 해결되었다. 내각제 정부는19세기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혁신 가운데 하나였다. 20세기에 들어와 이 혁신은 영국 문화권 밖으로 전파되기 시작했다. - P1607

영국제국의 속국에서 군주제의 응집력은 본국만큼 강하지는 않았으나 영연방의 지속적인 존재는 지금까지도 영국 왕실에대한 호감을 바탕으로 하여 유지되고 있다 — 군주정체의 사상이 국경을 초월하는 안정성(과 적응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유럽에서 두 번째로 큰 식민제국 프랑스의 제3공화국은 영연방처럼이전의 식민지가 자발적으로 ‘모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이어가도록만드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중략)
각자의 방식은 달랐지만 나폴레옹 3세는 메이지 천황처럼 혁명의 수51혜자였다. 메이지 천황이 유신의 엘리트들과 동맹을 맺었다고 한다면 나폴레옹 3세는 개인적인 노력을 통해 정권을 탈취했다. 나폴레옹 3세는 먼저 1848년 12월에 선거를 통해 공화국의 대통령이 되고 3년 뒤에 쿠데타를 일으켰으며 다시 1년 뒤에 세습 제국을 건설했다. 그러므로 나폴레옹 3세는 맨손으로 일어난 자수성가형 황제였던 반면에 16년 후의 무쓰히토 천황제라는 제도의 연속성에 의존하여 자신의 지위를 확보했다. - P1616

유럽의 궁정에서는 (동방의 궁정생활과 가장 큰 차이점이기도 하지만) 황실 또는 왕실의 공식적인행사에 군주 부부가 같이 출현했다. 일본이 이러한 서방을 상징하는의식을 받아들였다는 것은 현대 세계로 진입하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었다.61) 중국의 최고 통치계층은 이처럼 시범적인 부르주아 생활방식을 수용하려는 의지가 없었고, 이것은 중국 군주제의 부패와 무능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했다. 중국의 궁정에서는환관과 후궁제도가 왕조가 끝나는 날까지 유지되었다. - P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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