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런티어라는 개념은 19세기 사회에서 굉장히 중요한 개념이었다.


인종과 계급의 출발점, 인디언의 역사, 이민의 역사, 그리고 나아가 개척과 개발 논리에 밀린 자연과 동물의 부르짖음까지.

19세기에 들어온 이후로 도시에 대칭되는 극단은 더는 ‘농촌’이 아니라 ‘프런티어’이다. 프런티어는 공간적으로 끊임없이 외부를 향해 확산된다. 프런티어는 확장자가 스스로에게나 타인에게 말하듯 그렇게 비어 있는 공간이 아니다. 이동영역이 자기 쪽으로 접근하여 오는 모양을 지켜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프런티어는 침략자의 창끝이다. 창끝이 다가왔을 때 모든 것은 옛 모습을 잃고 만다. - P945

2차 대전 이후, 특히 탈식민화가 시작되면서 백인이 이 세계에 선을 전파했다는 주장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었다. 역사학자들이 민족학에 관심을 가지면서 식민 확장 과정의 피해자들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아메리카 원주민, 브라질 인디언,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이 받았던 부당한 대우가 학계와 대중의 시야에 들어왔다. 초기 역사서에서 영웅으로 추앙받던 개척자들이 한 순간에 잔인하고 음험한 제국주의자로 변했다. 이렇게 시작된 것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 P947

가장 놀랍고도 가장 성공적인 프런티어 개발은 대서양 해안에서부터 시작된 유럽인의 북아메리카 정착이었다. 전통적인 미국 역사학계는 ‘서부획득’이라 부른다. 이 거대한 과정의 이름 자체가 미국에서 나왔다. 젊은 역사학자 프레더릭 잭슨 터너가 1893년 한 강연에서 이 용어를 만들어냈다. 터너는 이때의 강연에서 ‘프런티어’란 개념을 처음 제시했다. 그가 상정한 프런티어란 동쪽에서 시작하여 서쪽으로, ‘종결’상태에 도달할 때까지 끊임없이 옮겨가는 것이었다. 그곳에서 문명과 야만이 세력과 역사적 권리의 비대칭적 배분 속에서 만났다. - P950

침략자는 상황에 따라 다음 세 가지 논리를 들고 나와 자기행위를 변호했다.
1. 정복자의 특권. 기존 토지소유권을 무효화할 수 있는 권리다.
2. 17세기 청교도의 ‘무주지’ 원칙. 수렵자, 채집자, 목축자가 거주하는 토지는 ‘주인이 없는 땅’으로 간주하며 경작할 필요가 있을 때는 망음대로 차지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3. ‘야만인’에게 문명을 전파한다는 종교적 사명. 이 논리는 소유권의 강제적 탈취를 합법화하는 이념으로 변신한다. - P954

프런티어에서 ‘국가’는 상대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다. 제국의 경계가 전형적인 프런티어이다. 제국이 확장을 멈추는 순간 프런티어도 더 이상 잠재적인 병합의 대상이 아니라 외부 위협을 막아내는 노출된 측면으로 바뀐다. 프런티어는 제국의 방어선 바깥에 있는 통제되지 않는 공간, 마지막 초소 넘어 저쪽의 게릴라와 비적이 수시로 출몰하는 위협적인 공간이 된다. - P955

1800년 무렵에 제퍼슨은 미국의 미래는 서부대륙이 결정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제퍼슨의 예언 말고도 19세기 40년대에는 ‘명백한 운명’이란 논리가 등장했다. 이 표현은 훗날 미국의 침략적 외교정책을 미화하는 상투어가 되었다. 바로 이 논리를 바탕으로 일부 역사학자들은 미국의 태평양 진출을 두고 프런티어가 해양으로 확장된 것이라고 해석했다. 과거에는 물론이고 현재도 서부개발은 북아메리카 특유의 민족형성 방식으로 인식되고 있다. - P965

인디언 종족들 사이에는 접촉이 거의 없었다. 그들 사이에는 동류의식이나 연대감, 침입에 대항하는 통일된 전선이 없었다. 심지어 혈연관계가 있는 이웃부락 사이에 잔혹한 전쟁이 흔하게 벌어졌다. 백인들이 인디언을 동맹으로서 필요로 하는 동안에는 인디언은 때때로 백인들 사이의 갈등을 이용해 어부지리를 취했다. 그러나 1812년의 영 미 전쟁 이후로 이런 수법은 통하지 않게 되었다. 미래의 모든 인디언전쟁에서 변절한 인디언들이 유럽계 아메리카인 편에 서서 후방 보급지원을 담당했다. - P968

들소를 사냥할 때 부락 전체의 남녀노소가 동원되어 사냥감을 깊은 계속으로 몰아넣는 방식은 말을 탄 민첩한 청년들의 작은 무리가 들소를 사살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 P970

말-들소 문화는 인디언과 외부세계 시장과의 연결을 강화시켰다. 인디언은 갈수록 더 많은 일상의 수요를 교환을 통해 충족했다. - P971

서부로의 이동은 자기 주도적으로 결심한 수백만의 개인들이 만들어낸 운동이었지만 총체적으로 보자면 원대한 정치적 구상의 결과이기도 했다. 건국세대는 서부를 위대한 공간적 유토피아로 들어가는 대문으로 인식했다. 이런 꿈을 가졌던 사람들의 대변인이 토마스 제퍼슨이었다. 그는 시간이 아니라 공간적인 발전을 통해 지치고 부패한 유럽사회와 같은 몰락을 피할 수 있는 기회가 미국에 주어졌다고 생각했다. 이런 인식은, 공간은 반드시 전체의 이익 뿐 아니라 동시에 개인의 치부를 위해서도 사용되어야 한다는 이념으로 발전했다. 제퍼슨은 농민이 소규모 경영자로서 자족적 공동체 안에서 가족과 함께 살아가면서 국가사무의 민주적 관리에 참여하는 나라를 꿈꾸었다. - P974

전쟁과 폭력의 경계는 모호했다. 교전 쌍방의 살육행위와 방어수단이 없는 평민 거주구역에 대한 공격과 학살은 구분되지 않았다. 쌍방은 무장하고 있었고 폭력은 프런티어의 일상생활의 한 부분이었다. - P980

서부의 중요한 특징은 자경단주의였다. 법의 권능이 미치지 못할 때 혁명적인 무력으로서 자경단이 등장하여 국가의 역할을 대신했다. 이런 현상의 배경에는 거칠게 해석된 자위권 사상과 인민주권의 원칙이 자리 잡고 있었다. - P981

1829년 취임한 미국의 제7대 대통령 앤드류 잭슨 장군은 영국, 스페인, 인디언과의 전쟁에서 맹활약한 전쟁영웅이었다. 잭슨 대통령은 인디언 부족과 맺은 평화조약을 파기하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그는 인디언 축출 정책을 실시했으며 이 정책은 대중적인 지지를 받았고 그 효과는 강력했다.
잭슨이 보기에 재퍼슨 세대의 인디언 문명화 사명은 실패작이었다. 잭슨은 ‘팩스턴 무리‘의 정신을 숭배했다. 팩스턴 무리는 1760년대에 펜실베이니아에서 인디언을 상대로 잔인한 학살극을 벌였다. 그는 인디언 영토를 용인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그의 목표는 오늘날의 용어로 표현하자면 ‘인종청소‘의 방식을 동원하여 인디언을 미시시피강 이서지역으로 몰아내는 것이었다. - P983

인디언이 새로운 땅에 머물 수 있다는 확고한 보장을 받았더라면 잭슨의 무자비한 정책은 인디언 프런티어 개발의 마지막 단계가 되었을 것이다. 백인 개척민과 철도회사의 끝을 모르는 토지 욕심과 거친 광산노동자의 난입이 안정된 인디언공동체의 형성을 방해했다. 내전이 끝나자 전쟁 때문에 형성된 미국사회의 폭력성은 인디언에 대한 새로운 공격으로 이어졌고 인디언을 철저하게 멸종시켜야한다는 여론이 한 세기만에 다시 고개를 들었다. - P985

북아메리카 프런티어의 역사는 인디언이 끊임없이, 불가역적으로 토지를 상실해간 역사로 서술될 수 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북아메리카 원주민은 점차로 자연적인 생산방식으로부터 단절되었다. 인디언은 토지의 소유자로서도 인정될 수 없었고 노동의 원천으로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밎이 주류를 형성한 사회에서 그들의 존엄을 지킬 수 있는 자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황야는 차례차례 국립공원으로 바뀌어 갔고 그들의 마을은 인적이 없거나 민속공예품으로 장식된 자연보호구역으로 변했다. - P991

아르헨티나인의 프런티어 관념 속에는 ‘문명화된‘ 도시와 ‘야만적인‘ 농촌의 선명한 대립이 자리잡았다. 소농민을 대상으로 한 신용체계의 부재, 토지 등기제도의 미비는 소형 농업기업의 발전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엄격하게 말하자면 아르헨티나에는 개척민 프런티어는 근본적으로 존재하지 않았고, 정치적으로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거나 신화를 창조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프런티어 사회‘는 없었다. - P994

브라질의 프런티어는 근본적으로 커피 단일품목 경작지대였고 경작지는 대기업이 노예노동을 이용하거나 노예노동 없이 운영했다. 그곳에는 터너가 말한 독립심이 강한 개척자의 개성과 순박한 중산층의 분위기가 넘치는 마을, 민주주의의 야외실습장으로서의 프런티어는 없었다. - P998

남아프리카의 반투어를 사용하는 아프리카인은 전면적인 패배를 경험하지 않았다. 인구 비율로 보면 그들은 여전히 다수를 차지했고, 문화적으로는 최소한 독립성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경제적으로는 필수불가결한 역할을 했다. - P1004

새로운 부의 기회를 최대한 이용하려는 열망에 휩싸인 보어인은 정치적으로 자신의 지배적 지위가 침해되지 않는 한 영국 자본가의 자유로운 활동을 허용했다. 이제 흑인 하층계급뿐만 아니라 백인 심참자도 보어인의 프런티어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요소가 되었다. 1899~1902년의 남아프리카전쟁(또는 보어전쟁)은 이런 복잡한 정세하에서 폭발했다. 이 전쟁은 최종적으로 영국제국의 군사적 승리로 끝을 맺었으나 군사적으로 만만치 않은 적수인 보어인을 꺾기 위해 지불해야 했던 대가는 매우 컸다. 보어인 10퍼센트가 이 전쟁으로 목숨을 잃었다. 장기적인 점령을 기반으로 하는 정권은 애초부터 계획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영국은 패배한 보어인과 담판을 벌이지 않을 수 없었다. 1910년에 쌍방의 희망을 반영한 남아프리카연방이 성립되었다. 이후로 남아프리카는 철저한 인종주의 국가가 되었다. - P1008

유목사회는 사회분화가 진척될수록 외부세계와의 교류와 접촉을 주도적으로 확대시켜나갔다. - P1013

세계사를 해석할 때, 13세기 초 몽고인의 정복행위가 전대미문의 상호작용과 교류의 공간을 열어놓았다는 것이 오랫동안 유지된 인식이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몽고인이 ‘중세기의 세계체제‘를 창조했다고 평가한다. 이런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본다면 아시아 국가와 문명은 몽고인이 세운 제국이 붕괴된 후 고립된 자기영역으로 되돌아가고 유라시아대륙의 중세기적 ‘세계성‘은 종결되었다. 그런데 최근의 연구는 교류통로의 개방성과 프런티어를 관통하는 관계의 다양성은 19세기가 시작되는 무렵까지 유지되었다고 지적한다. 그러므로 이 시기의 유라시아대륙은 역사적 연속성을 잃지 않았다고 보아야 마땅하다. - P1015

유라시아대륙 프런티어의 특징은 이곳이 제국의 판도였다는 것이다. 미국이나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와는 달리 유라시아대륙에서는 중앙집권적이고 계층제 구조의 제국이 주도적인 지위를 차지하는 정치체제였다. 제국은 크게 보아 두 가지 형식으로 나뉘었다. 하나는 기마 유목민이 통치하며 주변의 정주형 농업사회에 기생적인 초원 제국이다. 다른 하나는 자국 농민으로부터 직접 징세를 주요 재원으로 하는 제국이다. 우 유형 사이에 전환이 일어날 수 있다. - P1015

러시아 사학계에서는 터너보다 훨씬 앞서 세르게이 솔로비요프가 유사한 프런티어 이론을 제시했다. 19세기 치에 러시아에서는 러시아가 아시아를 향해 진보적인 유럽의 대변인의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주장이 유행했다. 이 관점에서 볼 때 북극해에서부터 카프카스에 이르는 지역은 계몽된 러시아 상층사회가 유럽문명의 전파자로서의 역할을 증명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정복하고 식민화했으며 나아가 자랑스러운 눈길로 서방을 자라보았다. 한편으로 그들은 러시아를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의 악명으로부터 떼어놓으려 했다. 이것은 미국인이 자신의 대륙확장에는 제국주의 일면이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하는 것과 같은 심리다. - P1030

프런티어는 전통의 방해를 받지 않고 ‘새로운 인류‘와 새로운 형태의 사회를 창조할 수 있는 실험장이었다. 만주의 이상적인 군사질서와 ‘아리아인종‘이 지배하는 동유럽 점령지가 그래서 나왔다. 독일의 ‘피와 대지‘란 이념은 이런 사상의 극단적인 표현이었으며 대규모 인종청소와 대학살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개척민은 이런 잔혹한 계획의 집행자로서 선발되지는 않았으나 그들이 개별적인 사례에서 맡은 역할은 국가정책의 도구와 같았다. 국가는 그들을 중대한 민족적 사명을 수행하고 있다고 믿도록 세뇌했고, 일상생활에서 겪는 여러 가지 고통은 ‘민족 전체‘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극복하라고 강요했다. 그들에게는 터너가 말한 개척자의 핵심적 특징인 자유와 자립이 결핍되어 잇었다. - P1034

이민 식민지는 프런티어 식민화의 특수형태이며 고대 그리스(와 그보다 앞서 페니키아)에서 처음 등장했다. 지중해의 맞은편 해안에 군사력을 동원하기 어렵거나 군사력을 동원해 통치할 필요가 없는 지역에 ‘식민도시‘가 세워졌다. 고대뿐만 아니라 근대 초기에도 ‘식민도시‘와 기타 프런티어 식민화 사이의 핵심적인 차이는 여전히 지리와 교통이었다. 바로 이런 조건 때문에 진정한 식민지가 등장할 수 있었다. 이때의 식민지는 프런티어 개척지일 뿐 아니라 독자적인 정치구조를 가진 정착민 사회였다. - P1037

프런티어는 상호작용한다. 한곳에서 일어난 특정한 경험은 유사한 환경조건을 갖춘 다른 곳으로 전파될 수 있다. - P1047

최소한 오언 래티모어의 저서가 나온 뒤로 프런티어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기존의 인구, 민족, 경제, 정치의 영역을 넘어 생태영역까지 확장되었다. 그리하여 환경사의 큰 부분이 프런티어 확장사로 채워지게 되었다. 조방식 개발의 가장 중요하고도 최후의 단계인 19세기가 이런 프런티어 확장사의 중심지였다. - P1048

19세기에 삼림벌채의 속도는 크게 빨라졌다. 1850~1920년에 전세계 원시삼림의 손실면적은 기간으로는 두 배가 되는 1700~1859년의 삼림감소 면적과 거의 비슷했다. 가장 많이 훼손된 지역으로서 미국의 멀찌감치 첫 번째 자리를 차지했고 러시아가 다음이며 남아시아가 그 다음이었다.
1920년 무렵, 전 세계 온대지역에서 대규모 삼림훼손 행위는 거의 멈췄다. 이것은 세계 환경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그 뒤로 많은 지역에서 삼림자원이 점차 안정을 찾거나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이 출현하게 된 원인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삼림을 희생시키는 조방식 개발이 이미 완결되었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북방의 목재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열대산 목재가 도입되었기 때문이었다. - P1050

식민주의는 단기적인 이윤을 위해 남벌을 실행할 수도 있었고, 삼림자원을 보호하기 위해 장기적인 계획을 세울 수도 있었다. - P1054

삼림파괴에서 목재 수요는 부차적인 목적이었고 경지를 끊임없이 확대하려는 자본주의의 원시적인 욕구가 주요했다. - P1056

19세기에 사람들이 야생동물을 마음대로 살육했고, 그런 후에 동물보호 인식이 완만하게 생겨났다.
인류역사에서 20세기는 논쟁의 여지가 없는 ‘폭력의 세기‘다. 그러나 호랑이, 표범, 코끼리, 독수리의 입장에서 보면 20세기는 오히려 위험이 적어진 세기였다. 20세기에 들어와 인류는 수천 년 동안 인류와 동등한 기회를 누리며 살아온 이런 동물들과 ‘타협‘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 P1067

19세기에 프런티어는 다중적인 의미를 가졌다. 프런티어는 토지 개간과 생산 증가의 공간, 이민을 끌어들이는 자석, 제국들 사이의 분란 많은 접촉 구역, 계급형성의 중심지, 종족분쟁과 폭력의 공간, 정착민 민주주의와 인종주의 정권의 탄생지, 환상과 이념의 발상지였다.
한동안 프런티어는 역사적 역동성의 주요 근원이었다. 역사적 역동성의 결과를 논하자면 하나의 중요한 차이를 간과해서는 안된다. 유럽, 미국, 일본의 공업노동자들은 지속적으로 자신의 이익을 대변해주고 자신의 물질적 지분을 증가시켜 줄 조직을 만들어감으로써 점진적으로 사회에 통합되었다. 그러나 프런티어 확장의 피해자들은 배척당하고, 재산을 몰수당하고, 권리를 박탈당했다. 최근에 와서야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캐나다 그리고 소수의 국가에서 법정이 이들 피해자 집단의 합법적 요구를 인정하기 시작했고 정부도 도덕적 책임을 받아들이고 과거의 부당행위에 대해 사과했다. - P10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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