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신에 찬 전문가들의 견해는, 간접적으로는 남성들에게 강한 영향을 미치며, 보다 직접적으로는 여성에게 횡포를 부리게 된다. 지난 세기에는 누구나 피할 수 없는 공통된 경험이었으며 결코 낭만화되지 않았던 결혼과 출산 같은 사건은 이제 이들과 같은 전문가에 의해 여성이 추구해야 할 영혼의 호사로 과대 포장된다. 과거에 (가난, 질병, 요절 등과 마찬가지로) 선택의 여지 없이 불가피했던 것들은 정신분석가들에 의해 20세기 여성의 구원 신화로 부활되었다. - P213

프로이트식 관점에서는 여성을 본질적으로 "종족의 양육자이자 열매 맺는 자"이며 잠재적으로 따스한 가슴을 가진 피조물로 보지만, 그보다는 흔히 자궁을 가진 변덕스러운 아이이며 남성의 생식기와 남성적인 정체성을 상실한 것에 대해 영원히 애도하는 자로 본다. 프로이트가 자신의 여성 환자들에 대해 그토록 정밀하게 기록했던 두통, 피로, 만성적인 우울증, 불감증, 편집증, 압도적인 열등감은 이보다 더 정확한 용어로 해석된 적이 없었다. 프로이트는 여성의 ‘증상’을 노예 심리의 특징인 간접적 의사소통으로도 보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증상을 ‘히스테릭’하고 ‘신경증적’인 산물로 여겼으며, 악의에 가득 차 있고 부조리한 집안의 독재자, 심술궂고 퉁명스럽고 자기 연민에 찬 여성에게서 나타나는 것으로 간주했다. 여자로서 행복해질 수 없는 여성들의 무능력은 해소되지 않은 남근선망, 해소되지 않은 엘렉트라 콤플렉스에서 기인하거나, 일반적으로 도무지 고치기 힘들고 종잡을 수 없는 여성의 고집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았다. - P215

여성에 관한 프로이트의 전체 혹은 일부 견해가 카렌 호나이, 클래라 톰슨, 마거릿 미드에 이어 시몬 드 보부아르, 베티 프리단, 케이트 밀릿, 슐라미스 파이어스톤, 에바 피지스, 저메인 그리어 등의 여성 이론가들에 의해 광범위하게 검토되고 반박되었다. 브로니슬라브 말리노프스키, 알프레드 아들러, 헤리 S. 설리번, 빌헬름 라이히, 로널드 랭, 데이비드 쿠퍼, 토머스 사즈와 같은 남성 이론가들도 프로이트를 반박한 바 있지만 여성에 관한 그의 견해 때문은 아니었다. - P220

라이히는 일단 환자들이 건강한 성기를 회복하게 되면 일과 사랑에서 훨씬 의미 있는 관계를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만약 환자들을 충분히 꿰뚫어볼 수 있다면 모든 환자들에게서 ‘점잖은 본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언제나 ‘성 경제’는 강박적인 도덕보다 우월한 자연스러운 도덕으로 조정된다. - P227

라이히는 성 에너지가 성기에서만이 아니라 몸 전체에서 작동하는 것으로 본다. 그는 변태적인 성욕과 건강한 성욕을, 성욕과 생식(임신과 출산을 위한 성욕으로서의 생식)을 조심스럽게 구분한다. 그는 경멸하는 마음 없이, 진지한 태도로 여성들이 평생 동안 경험하는 성적인 불행의 결과를 관찰한다. 그리고 몸의 역할과 몸과 마음의 통합이 얼마나 힘든지에 집중한다. 그는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굴복’이 ‘건강한’ 이성애 성교의 본질임을 이해한다. 하지만 라이히는 가부장적인 문화에서 이성애 중심 성교에 대한 여성의 ‘굴복’을 지나치게 많이 언급한 측면이 있다. 여성 권력의 중요성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여성의 성적인 행복의 중요성에 관해서만 지나치게 거론하는 것은 너무 낭만적이다. 약물처럼 섹스 역시 스스로를 규정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아편과 같은 강제적인 진정제가 될 수 있다. - P229

전반적으로 볼 때, 랭이 정신분열증의 과정을 사회적 환경에 배치시킨 것은 타당하다. 또한 우리 사회가 고집스럽게 주장해온 것이 본질적으로 비상식적이었다는 것을 이해한 점도 옳다. 이상적으로는 이것이 모든 정신과의사들이 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정신건강’에 관한 그의 기준은 프로이트의 기준만큼이나 부재에 가깝거나 모호하다. 그가 가끔, 그러나 점차 빈번하게 대중의 정치 혁명이나 예술 형식을 광기와 동일시한 것은 부정확하며 혼란만 야기한다. 광기와 예술은 여러 형태의 억압에 저항하는 동시에 그런 억압으로부터 도피하는 수단일 수 있는데, 이 두 가지 모두 고통과 차별과 연관이 있다. 하지만 완전히 개인적이고 비가시적인 광기의 양태와, 잠재적으로 공적이며 구체적인 예술 양태 사이에는 여전히 ‘차이가 있다’. - P236

쿠퍼는 라이히의 주장 중 많은 부분과 ‘반문화’ 신화 혹은 보다 현실적으로 보자면 희망을 신봉한다. (1) 프로이트의 염세주의, 즉 부르주아 개념과는 대조적으로 우리는 우리 안에 무한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2) 우리는 많은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 (3) 사람들 사이에 형성된 자발적인 ‘집단’은 핵가족 중심의 일부일처제 가족과는 분명히 다르며, 그보다 분명 나은 것이다. 다른 모든 사회제도와 달리 자발적으로 형성된 집단은 제도를 반영하지 않을 것이며, 개인의 자유 위에 군림하는 가족이나 국가와 같은 독재를 강제하지도 않을 것이다. (4) 카리스마가 있는 반지도자적인 지도자들은 지도자가 아니다. 역으로 말하자면 지도자들의 ‘지도력’은 본질적으로 해악이다. (5) ‘광기’는 다소 ‘혁명적인’ 것이다. 사실상 우리 문화에서 광기는 무자비하게 처벌받는 무기력한 외침이다. - P242

사즈는 시민의 자유에 굳은 의지를 가진 도발적이며 정치적인 사상가이며 대단히 격조 높은 도덕적 감수성을 지닌 사람이다. 하지만 심리치료가 대단히 ‘사적’이라거나 다양한 사회적 권력 남용으로부터 개인을 반드시 자유롭게 하리라는 그의 생각에는 문제가 있다. 나는 ‘광기’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광기’는 ‘억압’과 ‘조건화’와 관련해 이해될 수 있다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이런 이해만으로 억압이 초래했던 것을 변화시킬 수 있을 만큼 충분하다고 확신하지도 않는다. ‘광기’에 대한 우리의 치료 자체가 비윤리적이며 억압적이라는 사즈의 말은 분명히 옳다. 하지만 사즈는 뿌리 깊게 조건화되어 있는 문자 그대로의 자기희생과 심리적인 자기희생에 순응하는 여성들의 본성을 과소평가하고 있다. 대다수의 여성 정신질환자들은 자신을 ‘병들’거나 ‘나쁜’ 사람으로 여기며, 대단히 자발적으로 정신병원에 몸을 맡긴다. 경제적 육체적 성적 박탈이나 처벌에 대한 공포가 여성들에게 자기희생을 대단히 고귀한 가치로 여기게끔 가르치기 때문에 그들은 대단히 ‘자연스럽게’ 자기희생을 수행한다. 이 자연스러운 자기희생에 관한 여성들의 분노가 스스로를 ‘미치게’ 만들고 나면, 병원의 관행이 그들의 희생을 어쨌거나 강요할 것이다. - P249

심리치료 제도는 비용을 지불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일시적인 위안과 자유에 대한 환상과 자기 인식이라는 자기 탐닉을 제공하여 사회적 정치적으로 통제하는 형식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 또한 이 제도는 그와 같은 환상에 비용을 지불할 수 없는 사람들의 불행을 어쩔 수 없이 정신병적이라거나 위험하다고 낙인 찍고, 사회가 그들을 정신병원에 넘기도록 도와줌으로써 그들을 처벌하는 제도라고도 할 수 있다. 심리치료 제도는 임상의가 여성이든 남성이든 상관없이 가부장적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다수의 임상의는 우리 문화의 다른 누구보다 더 신성한 영감을 받거나 자기 자신의 감정과 접촉하지 않는다. - P251

젠더 폭력은 고통이나 진단 가능한 정신질환적 증상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정신질환의 진단 및 통계 편람의 진단 방식에 대해서는 비판할 것이 많지만, 일반적인 상황에서나 젠더 폭력의 상황에서 벌어지는 억압과 폭력이 다양한 "정신질환"을 초래한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리고 이로 인해 여성들이 진정으로 고통받고, 아울러, 다양한 방식으로 병리학적 진단을 받는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 P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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