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ㅣ 문학동네 시인선 32
박준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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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절이 바뀌거나 새해가 되면 잊고 있었던 이들에게서 문자가 온다. 연락을 하지 않았던 시간이 길었던 탓에 목소리가 아닌 짧은 글로 안부를 전하는 게 의식처럼 되버렸다. 그들 중 일부는 단체 문자를 보낸다. 나는 단체 문자의 형태로 온 문자에는 답을 하지 않는다. 정말 나의 안부가 궁금하다면 전화를 할 것이고, 다시 문자를 보낼 테니까.

 

 누군가를 궁금해하고 걱정하는 마음을 전하는 방법은 참으로 많다. 눈을 마주하지 못하는 그리운 이에게 나를 전하는 방식으로 이런 시집을 건네도 좋겠다. 박 준의 첫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를 읽으면서 든 생각이다. 어쩌면 시인에게 이 시집이 그런 존재가 아닐까.  입춘이 지났으니 겨울의 끝이라 해도 좋을 날들이다. 그런 이유로 나는 이 시를 오래 바라보았다. 소리를 내어 읽기도 했다.

 

 낙서

 

 저도 끝이고 겨울도 끝이다 싶어

 무작정 남해로 간 적이 있었는데요

 

 거기는 벌써 봄이 와서

 농어도 숭어도 꽃게도 제철이었습니다

 

 혼자 회를 먹을 수는 없고

 저는 밥집을 찾다

 근처 여고 앞 분식집에 들어갔습니다

 

 몸의 왼편은 겨울 같고

 몸의 오른편은 봄 같던 아픈 여자와

 늙은 남자가 빈 테이블을 지키고 있는 집

 

 메뉴를 한참 보다가

 김치찌개를 시킵니다

 

 여자는 냄비에 물을 올리는 남자를 하나하나 지켜보고

 저도 조금 불안한 눈빛으로 그들을 봅니다

 

 남자는 돼지비계며 김치며 양파를 썰어넣다 말고

 여자와 말다툼을 합니다

 조미료를 그만 넣으라는 여자의 말과

 더 넣어야지 맛이 난다는 남자의 말이 끓어넘칩니다

 

 몇 번을 더 버티다

 성화에 못 이긴 남자는

 조미료 통을 닫았고요

 

 금세 뚝배기를 비웁니다

 아이들이 보고 싶다, 좋아한다, 사랑한다,

 잔뜩 낙서해놓은 분식집 벽면에

 

 봄날에는

 ‘사람의 눈빛이 제철’ 이라고

 조그맣게 적어놓았습니다 (76~77쪽)

 

 봄날은 내가 기다리는 날이다. 봄날에 특별한 일이 있는 건 아니다. 다른 이름의 계절이 돌고 돌지만 봄이라는 계절은 막연한 희망이 생긴다. 얼었던 땅이 녹는 것을 지켜보는 일, 밤새 분주한 몸놀림으로 아침에 꽃을 피우는 나무들을 보는 일, 어제보다 조금 더 길게 내리는 햇볕을 보는 일이 소중하다는 걸 일깨워주는 계절이라서 그런지도 모른다.

 

 나의 사인(死因)은 너와 같았으면 한다

 

 창문들은 이미 밤을 넘어선 부분이 있다 잠결이 아니라도

 나는 너와 사인(死因)은 너와 같았으면 한다

 

 이곳에서 당신의 새벽을 추모하는 방식은 두 번 다시 새

 벽과 마주하지 않거나 그 마주침을 어떻게 그만두어야 할

 까 고민하다 잠이 드는 것

 

 요와 홑청 이불 사이에 헤어 드라이의 더운 바람을 틀

 어넣으면 눅눅한 가슴을 가진 네가 그립다가 살 만했던

 광장(廣場)의 한때는 역시 우리의 본적과 사이가 멀었다

 는 생각이 들고

 

 나는 냉장고의 온도를 강냉으로 돌리고 그 방에서 살아

 나왔다

 

 내가 번듯한 날들을 모르는 것처럼 이 버튼을 돌릴 줄 아

 는 사람은 많지 않아서 맥주나 음료수를 넣어두고 왜 차

 가워지지 않을까 하는 사람들의 낯빛을 여관의 방들은 곧

 잘 하고 있다

 

 “다시 와, 가기만 하고 안 오면 안 돼” 라고 말하던 여자의

 질긴 음성은 늘 내 곁에 내근(內勤)하는 것이어서

 

 나는 낯선 방들에서도 금세 잠드는 버릇이 있고 매번 같

 은 꿈을 꿀 수도 있었다 (34~35쪽)

 

 호우주의보

 

 이틀 내내 왔다

 

 미인은 김치를 자르던 가위를 씻어

 귀를 뒤덮은 내 이야기들을 자르기 시작했다

 

 발밑으로 떨어지는 머리카락이

 꼭 오래전 누군가에게 받은 용서 같았다

 

 이발소에 처음 취직했더니

 머리카락을 날리지 않고

 바닥을 쓸어내는 것만 배웠다는

 친구의 말도 떠올랐다

 

 미인은 내가 졸음을

 그냥 지켜만 보는 것이 불만이었다

 

 나는 미인이 새로 그리고 있는

 유화 속에 어둡고 캄캄한 것들의

 태(胎)가 자라는 것 같아 불만이었다

 

 그날 우리는 책 속의 글자를

 바꿔 읽는 놀이를 하다 잠이 들었다

 

 미인도 나도

 흔들리는 마음들에게

 빌려온 것이 적지 않아 보였다 (44~45쪽)

 

 때로 생은 철저하게 혼자인 시간을 부여한다. 부르지 않은 고독이 친구처럼 곁을 맴돌고 온기를 나눌 이를 찾을 수없는 순간들. 사귐에 익숙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겨를이 없는 생인 것이다. 사는 일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기도 한다. 나도 모르게 시집을 읽으면서 부르지 못한 이름들을 시를 빌려 불러본다.(여름에도 이름을 부르고 / 여름에도 연애를 해야 한다 / 여름에도 별안간 어깨를 만져봐야 하고 / 여름에도 라면을 끓여야 하고 / 여름에도 두통을 앓아야 하고 / 여름에도 잠을 자야 한다)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이상한 뜻이 없는 나의 생계는 간결할 수 있다 오늘 저녁

 부터 바람이 차가워진다거나 내일은 비가 올 거라 말해주

 는 사람들을 새로 사귀어야 했다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이의 자서전을 쓰는 일은 그리 어렵

 지 않았지만 익숙한 문장들이 손목을 잡고 내 일기로 데

 려가는 것은 어쩌지 못했다

 

 ‘찬비는 자란 물이끼를 더 자라게 하고 얻어 입은 외투의

 색을 흰 속옷에 묻히기도 했다’ 라고 그 사람의 자서전에

 쓰고 나서 ‘아픈 내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

 었다’ 는 문장을 내 일기장에 이어 적었다

 

 우리는 그러지 못했지만 모든 글의 만남은 언제나 아름다

 워야 한다는 마음이었다 (55쪽)

 

 여름에 부르는 이름

 

 방에서 독재(獨裁)했다

 기침은 내가 억울해하고

 불안해하는 방식이었다

 

 나에게 뜨거운 물을

 많이 마시라고 말해준 사람은

 모두 보고 싶은 사람이 되었다

 

 팔리지 않는 광어를

 아예 관상용으로 키우던 술집이 있었다

 

 그 집 광어 이름하고

 내 이름이 같았다

 

 대단한 사실은 아니지만

 나는 나와 같은 이름의 사람을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다

 

 벽면에서 난류를

 찾아내는 동안 주름이 늘었다

 

 여름에도 이름을 부르고

 여름에도 연애를 해야 한다

 여름에도 별안간 어깨를 만져봐야 하고

 여름에도 라면을 끓여야 하고

 여름에도 두통을 앓아야 하고

 여름에도 잠을 자야 한다

 

 잠,

 잠을 끌어당긴다

 선풍기 날개가 돈다

 

 약풍과 수면장애

 강풍과 악몽 사이에

 

 오래된 잠버릇이

 당신의 궁금한 이름을 엎지른다 (58~59쪽)

 

 박 준의 시는 특별하지 않아 특별하다. 그러니까 누군가의 상실이며 추억이고 일상이다. 나와 같은 계절을 사는, 쏟아지는 비를 함께 보거나 싸구려 여관에 잠시 몸을 의탁하는 그런 생을 사는 이가 들려주는 이야기라 더 끌린다. 예쁘거나 좋은 것만 보이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슬픔과 커져가는 절망을 건네는 것이다. 그 슬픔과 절망을 아는 이는 시를 읽으며 가슴이 절이거나 생목이 올라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나쁘거나 아프기만 한 게 아니다.

 

 눈을 감고

 

 눈을 감고 앓다 보면

 오래전 살다 온 추운 집이

 

 이불 속에 함께 들어와

 떨고 있는 듯했습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날에는

 길을 걷다 멈출 때가 많고

 다음에도 길을 잃는 버릇이 있습니다

 

 눈을 감고 앞으로 만날

 악연들을 두려워하는 대신

 

 미시령이나 구룡령, 큰새이령 같은

 높은 고개들의 이름을 소리내보거나

 

 역(驛)을 가진 도시의 이름을 수첩에 적어두면

 얼마 못 가 그 수첩을 잃어버릴 거라는

 이상한 예감들을 만들어냈습니다

 

 혼자 밥을 먹고 있는 사람에게

 전화를 넣어 하나하나 반찬을 물으면

 함께 밥을 먹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

 

 손을 빗처럼 말아 머리를 빗고

 좁은 길을 나서면

 

 어지러운 저녁들이

 제가 모르는 기척들을

 

 오래된 동네의 창마다

 새겨넣고 있었습니다 (82~83쪽)

 

 어디선가 슬퍼하고 있을, 어디선가 아득한 시간을 손으로 꼽고 있을 당신을 생각한다. 나와 당신과의 거리는 닿을 수 없이 멀겠지만 큰 목소리로 이런 시를 읽어주고 싶다. 당신의 기쁨과 슬픔을 모두 전하는 안부를 듣고 싶다.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

 

 철봉에 오래 매달리는 일은

 이제 자랑이 되지 않는다

 

 폐가 아픈 일도

 이제 자랑이 되지 않는다

 

 눈이 작은 일도

 눈물이 많은 일도

 자랑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작은 눈에서

 그 많은 눈물을 흘렸던

 당신의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

 

 나는 좋지 않은 세상에서

 당신의 슬픔을 생각한다

 

 좋지 않은 세상에서

 당신의 슬픔을 생각하는 것은

 

 땅이 집을 잃어가고

 집이 사람을 잃어가는 일처럼

 아득하다

 

 나는 이제

 철봉에 매달리지 않아도

 이를 악물어야 한다

 

 이를 악물고

 당신을 오래 생각하면

 

 비 마중 나오듯

 서리서리 모여드는

 

 당신의 눈동자의 맺음새가

 좋기도 하였다 (22~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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댈러웨이 2013-02-14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안녕!

박준 시인은 제가 박연준 시인으로 혼동을 해서 시집의 제목을 좀 특이하게 짓는 시인구나 하고 생각했지 뭐에요. 제목으로 봐서는 김춘수 시인의 <꽃>보다 더 의미심장할 것 같은데, 시는 좀 어려운데요... 못알아 듣겠어요. ㅠ.ㅠ

자목련님은 시 먹는 자목련! 오늘은 무슨 시를 읽고 계세요? 그나저나 겨울이 끝나간다니, 봄을 기다리셨나요? (이런 질문은 좀 간지러워요. :))

자목련 2013-02-16 10:08   좋아요 0 | URL
이 시집,좋아요. 댈레웨이 님의 표현대로 시 먹는 거(체할지도 모르지만, ㅋㅋ) 계속 하고 싶어요!!
요즘은 장승리의 <무표정>을 읽어요. 언제나 봄을 기다려요. 자목련도 피고, 작약과 수국을 만나는 여름을 기다릴 수 있는 봄, 봄이 좋아요!!
 
왕복서간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1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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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의사나 감정을 전달할 때 말보다 글이 더 좋을 때가 있다. 때문에 직접 얼굴을 보거나 목소리를 듣지 않고 문자를 이용하거나 메일을 쓴다. 생각은 말이 되면 수정할 수 없지만 글은 수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차마 얼굴을 맞대고 할 수 없는 말이라면 더욱 그렇다. 미나토 가나에의 『왕복서간』은 제목 그대로 편지를 주고 받은 내용이다. 그러니까 세 편의 이야기가 모두 편지글이다. 현재가 아닌 과거의 일에 대한 궁금증을 편지로 묻거나 고백하는 이야기다.

 

 첫 번째로 <십 년 뒤의 졸업문집>은 에쓰코가 고등학교 시절 방송부 친구의 결혼식에 참석한 후 다른 친구에게 보낸 편지다. 7명이 함께 모여 작품을 만들고 비밀을 공유하며 보냈던 십대 시절의 즐거운 추억으로 시작하지만 점점 기묘하게 흘러간다. 에스코는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은 자이키의 행방불명 소식에 대해 묻는다. 모델로 활동했던 자이키가 얼굴을 다치게 된 경위에 대해 궁금해한다. 사고가 아니라 함께 있던 친구 중 하나가 고의로 밀어 넘어뜨린 게 아니냐고 슬쩍 떠 본다. 잊고 있었던 사건을 떠올리며 서로에게 숨겼던 감정들이 고스란히 전달하는 편지의 묘미를 잘 살려낸다.

 

 두 번째 이야기는 <이십 년 뒤의 숙제>는 고등학교 교사인 아쓰시가 퇴직 후 병상에 계신 옛 스승을 대신 해 여섯 명의 제자들에게 편지를 전해주는 내용이다. 이십 년 전 여섯 명의 제자들은 선생님과 함께 산에 올랐다. 그날 제자와 선생님의 남편이 함께 물에 빠졌다. 남편은 죽고 제자만 살았다. 여섯 명의 제자들을 차례로 만나서 나눈 이야기를 선생님께 편지로 전하는 것이다. 하나의 사건에 대한 여섯 명의 기억은 달랐다. 누군가는 방관자로, 누군가는 피해자로, 누군가는 가해자라 생각하고 있었다.

 

 마지막 <십오 년 뒤의 보충수업>은 가장 흡입력이 강하고 놀라운 이야기다. 두 편의 이야기와 달리 연인 사이에 오가는 편지다. 국제 자원봉사대에 해외 오지에 나간 준이치와 마리코는 중학교 동창이자 연인이다. 십오 년 화재에서 마리코를 구해준 후 준이치와 연인이 되었다.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지만 처음으로 편지를 통해 화재 사건에 대해 말하지 못했던 비밀을 털어 놓는다. 화재사고에서 마리코는 살아 남았지만 다른 남학생은 죽었고 그와 갈등이 있던 친구도 학교 옥상에서 스스로 몸을 던졌다. 사건으로 기억을 잃은 마리코는 단순한 화재였다는 준이치의 말을 믿었지만 진실은 달랐다.

 

 ‘이상하지. 당신이 살인자라는 사실보다 내가 살인자라는 사실을 더 냉정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니. ……참. 고마워. 이 말은 해도 되지? 십오 년 동안 곁에 있어줘서 고마워. 지켜줘서 고마워. 거짓말해줘서 고마워. 당신은 아무 죄도 없으니까 아무리 거짓말을 해도 당신이 죄를 뒤집어 쓸 일은 없어. 0을 곱한다는 건 이런 뜻이겠지, 준이치 선생님?’ 257쪽

 

 세 편의 이야기는 모두 누군가를 향한 고백이며 용서다. 차마 꺼내지 못했던 진실에 대한 이야기를 전할 수 있는 방법이 손편지보다 더 좋은 건 없을 것이다. 특정한 이에게 글을 쓰는 동안 격하게 끓어올랐던 감정은 사라지고 객관적인 부분만 볼 수 있으니 말이다. 상처였던 과거의 기억을 끄집어 내는 건 힘든 일이지만 오해로 남았던 부분에 대해 차분하게 이어가며 일기처럼 편지를 쓰는 일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시간을 선물하는 것이다.

 

 미나토 가나에는 손편지라는 아나로그적 소재를 통해 인간 심연에 다가가고 싶었던 게 아닐까. 책은 미안하다고 잘못했다고 고백하지 못했던 우리의 어떤 날들에 대해 긴 편지를 쓰고 싶게 만든다. 그 편지를 보내지 못할 거라는 걸 알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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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가게 - 제13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수상작 ㅣ 보름달문고 53
이나영 지음, 윤정주 그림 / 문학동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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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진 시간은 쓰기 나름이다. 어떤 이는 하루를 48시간처럼 쓰기도 하고 어떤 이는 12시간처럼 쓰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시간에 쩔쩔맨다. 아이를 키우는 엄마는 특히 그렇다. 어린이 집을 다니면서 엄마는 시간을 분단위로 써야 한다. 그나마 여유로웠던 시간은 학교에 들어가면 찾기 어렵다. 일을 하는 엄마라면 등교 시각은 전쟁이다. 어디 엄마 뿐인가. 아이도 학교를 시작으로 경쟁이라는 세상에 발을 딛는 것이다. 남보다 늦지 않기 위해, 뒤쳐지지 않기 위해 아이들은 숙제를 하고 학원을 다니고 예습을 해야 한다. 그러니 나만을 위한 시간을 살 수 있다면 윤아처럼 당장 그 시간을 살 것이다.  

 

 동화 속 주인공 윤아는 초등학교 5학년이다. 아빠가 병으로 돌아가시고 보험을 하는 엄마랑 산다. 엄마에게는 윤아가 전부다. 윤아도 엄마가 전부다. 엄마는 윤아 공부를 위해 이사를 했고 밤 늦게까지 일을 한다. 엄마를 위해 1등을 하고 싶다. 1등을 하면 엄마가 좋아할 테니까. 그런 윤아에게 시간을 파는 가게는 놀라운 마법같았다.

 

 “이 시계가 이 세상에서 오직 너만 쓸 수 있는 십 분을 만들어줄 거다.”

 “죄송한데요, 저는 돈이 없어요…….”

 “네가 진심으로 행복했던 때의 기억을 주면 된단다.”

 “겨우 그거예요?” 16~17쪽

 

 윤아에게 행복했던 지난 시간은 겨우에 불과했다. 만약, 윤아와 같은 상황이라면 나는 어땠을까? 덥석 시계를 받아왔을 것이다. 중간고사가 있는 날 윤아는 할아버지에게 받은 시계를 돌려놓는다. 모두에게 멈춰진 시간, 수영의 답을 베끼고 1등을 한다. 수학 경시 대회에서도 전교 1등의 기억을 떠올린다. 하지만 시계는 돌아가지 않았다. 윤아는 할아버지를 찾아간다. 할아버지는 행복에 대해 말하지만 윤아는 중요하게 듣지 않는다.

 

 “머리로 만들어 낸 행복이 아니라, 몸과 마음이 기억을 하고 있는 것이어야지. 행복은 억지로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란다.” 99쪽

 

시간을 사려면 이제는 두 개의 행복한 기억을 떠올려야 한다며 시계를 고쳐준다. 윤아에겐 시간만 살 수 있다면 몇 개의 기억이든 상관없었다. 영어 인증 시험에서 대학생 오빠의 시험지를 보고 다시 최고 점수를 받는다. 캐나다에서 공부하고 온 영훈이도 윤아보다 낮은 점수를 받았다. 1등을 했지만 윤아는 즐겁지가 않다. 기억이 엉망이기 때문이다. 할머니와 다현이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생소하기만 하다. 함께 했던 시간과 기억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시간만 사면 행복할 줄 알았다. 그런데 내 과거도 현재도 엉망이 되어 버렸다. 지금 행복하지 않은데 엄마 말처럼 미래에 해복해질 수 있을까. 만약에 그렇다 해도 지금 내가 행복하지 않은데 무슨 의미가 있을까.’ 150쪽

 

 윤아는 할아버지를 찾아가 이번엔 기억을 산다. 자신의 시간을 팔고 행복한 기억을 사는 것이다. 대수롭지 않게 거래를 했지만 친구나 선생님과 이야기할 때 떠오르는 기억은 모두 윤아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윤아의 몸과 마음이 기억하는 시간이 아니었다. 초등학교 5학년에게 행복한 시간은 어떤 것일까. 열두 살 소녀답게 연예인을 좋아하거나 외모를 치장하고 그래야 하는 게 아닐까. 하지만 우리 아이들은 윤아처럼 1등을 목표로 달린다. 10분도 아쉬워서 맘껏 놀지 못하고 학원 시간에 늦을까 초초하다. 정말 서글픈 모습이다.

 

 그런 아이들에게 시간을 팔고 행복한 기억을 산다는 이야기는 기발하지만 너무 잔인하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시간에 행복하게 보낼 방법에 대해 선생님과 엄마가 함께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줬더라면 더 좋았겠다. 그러니까 윤아가 1등인 수영이와 경쟁자가 아니라 친구로 다가가는 과정 말이다.  그건 시간의 주인이 되어 스스로 찾아야 할 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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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젯밤에는 폭설이 내릴 거라는 일기 예보를 듣고 커튼을 계속해서 들춰 보았다. 눈이 내리고 있었지만 앵커의 말처럼 걱정할 정도는 아니지 싶었다. 곧 잠이 들었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내린 눈을 확인했다. 입춘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은 설날인 정월 초하루까지 자신의 존재를 보여줄 기세다. 연휴가 짧아 길 위에서 시간을 보내는 이들이 고생할 것 같다.  

 

 뚜렷한 이유 없이 불안하다. 얼마 전에는 잠들기 위해 수면제를 먹어야 했고, 어제는 꿈을 꾸었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꿈이었다. 겨울과 봄이 힘 겨루기를 하듯 내 몸이 그러하다. 겨울이라는 어떤 기운과 봄이라는 어떤 기운이 충동한다고 해야 할까. 뭐, 그렇다는 말이다.

 

 저녁에는 반가운 이와 짧은 통화를 했다. 긴 겨울밤에 뭘 하냐고 물었다. 나는 웃으며 모니터를 붙잡고 있거나 텔레비젼을 붙잡고 있다고 말했다. 때때로 책도 붙잡고, 전화기도 붙잡고 있는데 그 말은 하지 못했다. 건강에 대해(특히 어지럼증) 이야기를 나눴고, 2월이 끝나기 전에 만나자고 약속 아닌 약속을 하고 명절 인사를 주고 받았다.

 

 주전자 가득 보리차를 끓였다. 입맛이 촌스러워 그런지 나는 보리차가 제일 좋다. 한 번은 올케 언니가 연잎을 넣고 끓인 물을 마신 적이 있는데 좋았던 기억이 있기는 하다. 고종석의 『해피 패밀리』를 주문하면서 읽지 못한 『어루만지다』도 같이 주문하려고 한다. 유안진 시인의 산문집 『상처를 꽃으로』와 정지아의 『숲의 대화』, 김선영의 『특별한 배달』,김현의 번역으로 만나는 『어린 왕자』도 읽고 싶다.  새로운 표지로 나온 『김선우의 사물들』도 천천히 다시 읽고 싶다. 내가 가진 책은 이제 구간이 되었다. 나는 이 책의 표지가 더 마음에 든다.

 

 

 

 

 

 

 

 

 

 

 

 

 

 

 

 

 읽고 있는 책은, 미나토 가나에의 『왕복서간』이다. 『고백』, 『속죄』에 대한 평을 듣기만 했는데 직접 소설을 읽기는 처음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마주보고 할 수 없는(소설에서는 어떤 사건들) 이야기를 편지로 주고 받는 내용이다. 표정을 숨기는 가장 좋은 방법이 글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물론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잘 안다. 때로 글은 맨얼굴 그 이상으로 선명하게 주름과 잡티를 보여준다. 글은 때로 자유자재로 변할 수 있는 물이며, 무작정 화내고 쏘아대도 좋을 친구이며, 글은 조각 조각 비밀을 숨겨 놓기 좋은 숨은 그림 찾기라 할 수 있다. 그런 글이 있어 좋다. 글이라는 위로가 있어 좋다. (이렇게 써도 되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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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13-02-07 0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럼요~~ 글이라는 위로가 있어서 저도 좋은걸요!!! 그런데 자목련님 정말 일관되게 책 많이 읽으세요!!!!!
그런데 그런데 어디 아파요??????아프지 말기에요!!!!

자목련 2013-02-07 20:27   좋아요 0 | URL
읽기 보다는 쭉 책을 사고 있어요. ㅎ
<어지럼증>으로 힘든 건 지인이구요.
저는 부실하고, 저질 체력입니다..

2013-02-07 09: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2-07 20: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러니까 월요일에 나는 두 사람에게 메일을 보냈다. 내게는 아주 중요한 메일이었다. 한 사람은 월요일에 메일을 읽자 마자 바로 답장을 보내주었고 전화로도 이야기를 나눴다. 메일로 질문했던 것에 대한 답을 주었고 연락을 못했던 10여 개월에 어떻게 지냈는지 이야기도 나눴다. 안부를 묻고 나중에 또 연락하자며 통화를 끝냈다.  나머지 한 사람은 오늘 오후에 답을 주었다. 그 역시 내 질문에 명쾌한 답을 주었다. 두 사람에게 같은 내용의 질문을 한 건 아니다. 차마 부끄러워 이곳에 밝힐 수 없지만 공통점이 있기는 하다. 원했던 답을 듣지 못했기 때문일까. 울적하고 울적하다.

 

 이런 기분을 전환시키려면 뭔가 사야 하는데 자제 해야 하는 시기이므로, 그냥 책을 담기만 한다. 곁에 두었으므로 곧 읽게 될 문학동네 청소년 문학상 수상작 『그치지 않는 비』, 창비에서 나온 『덧없는 환영들』은 제목과 표지가 이 저녁의 나를 위로한다. 어떤 내용일까, 궁금하지만 여기까지. 소설가 이혜경의 산문집 『그냥 걷다가, 문득』은 왠지 다정하고 내밀한 이야기를 들려줄 것만 같다.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윌리엄 포크너의 『소리와 분노』,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

 

 

 

 

 

 

 

 

 

 

 

 

 

 

 

 

 

 

 

 읽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책은 박경철의 『문명의 배꼽, 그리스』, 생각날 때마다 꺼내서 읽는 강성은의 시집 『구두를 싣고 잠이 들었다』와 박연준의 시집 『속눈썹이 지르는 비명』, 그리고 좋은 리뷰를 쓸 수 있다면 그러고 싶은 장승리의 시집 『무표정』, 과 박준의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다. 나열한 시집은 아주 오랜 시간 내가 아끼게 될 것 같다. 당신들의 책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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