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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ㅣ 문학동네 시인선 32
박준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2월
평점 :
계절이 바뀌거나 새해가 되면 잊고 있었던 이들에게서 문자가 온다. 연락을 하지 않았던 시간이 길었던 탓에 목소리가 아닌 짧은 글로 안부를 전하는 게 의식처럼 되버렸다. 그들 중 일부는 단체 문자를 보낸다. 나는 단체 문자의 형태로 온 문자에는 답을 하지 않는다. 정말 나의 안부가 궁금하다면 전화를 할 것이고, 다시 문자를 보낼 테니까.
누군가를 궁금해하고 걱정하는 마음을 전하는 방법은 참으로 많다. 눈을 마주하지 못하는 그리운 이에게 나를 전하는 방식으로 이런 시집을 건네도 좋겠다. 박 준의 첫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를 읽으면서 든 생각이다. 어쩌면 시인에게 이 시집이 그런 존재가 아닐까. 입춘이 지났으니 겨울의 끝이라 해도 좋을 날들이다. 그런 이유로 나는 이 시를 오래 바라보았다. 소리를 내어 읽기도 했다.
낙서
저도 끝이고 겨울도 끝이다 싶어
무작정 남해로 간 적이 있었는데요
거기는 벌써 봄이 와서
농어도 숭어도 꽃게도 제철이었습니다
혼자 회를 먹을 수는 없고
저는 밥집을 찾다
근처 여고 앞 분식집에 들어갔습니다
몸의 왼편은 겨울 같고
몸의 오른편은 봄 같던 아픈 여자와
늙은 남자가 빈 테이블을 지키고 있는 집
메뉴를 한참 보다가
김치찌개를 시킵니다
여자는 냄비에 물을 올리는 남자를 하나하나 지켜보고
저도 조금 불안한 눈빛으로 그들을 봅니다
남자는 돼지비계며 김치며 양파를 썰어넣다 말고
여자와 말다툼을 합니다
조미료를 그만 넣으라는 여자의 말과
더 넣어야지 맛이 난다는 남자의 말이 끓어넘칩니다
몇 번을 더 버티다
성화에 못 이긴 남자는
조미료 통을 닫았고요
금세 뚝배기를 비웁니다
아이들이 보고 싶다, 좋아한다, 사랑한다,
잔뜩 낙서해놓은 분식집 벽면에
봄날에는
‘사람의 눈빛이 제철’ 이라고
조그맣게 적어놓았습니다 (76~77쪽)
봄날은 내가 기다리는 날이다. 봄날에 특별한 일이 있는 건 아니다. 다른 이름의 계절이 돌고 돌지만 봄이라는 계절은 막연한 희망이 생긴다. 얼었던 땅이 녹는 것을 지켜보는 일, 밤새 분주한 몸놀림으로 아침에 꽃을 피우는 나무들을 보는 일, 어제보다 조금 더 길게 내리는 햇볕을 보는 일이 소중하다는 걸 일깨워주는 계절이라서 그런지도 모른다.
나의 사인(死因)은 너와 같았으면 한다
창문들은 이미 밤을 넘어선 부분이 있다 잠결이 아니라도
나는 너와 사인(死因)은 너와 같았으면 한다
이곳에서 당신의 새벽을 추모하는 방식은 두 번 다시 새
벽과 마주하지 않거나 그 마주침을 어떻게 그만두어야 할
까 고민하다 잠이 드는 것
요와 홑청 이불 사이에 헤어 드라이의 더운 바람을 틀
어넣으면 눅눅한 가슴을 가진 네가 그립다가 살 만했던
광장(廣場)의 한때는 역시 우리의 본적과 사이가 멀었다
는 생각이 들고
나는 냉장고의 온도를 강냉으로 돌리고 그 방에서 살아
나왔다
내가 번듯한 날들을 모르는 것처럼 이 버튼을 돌릴 줄 아
는 사람은 많지 않아서 맥주나 음료수를 넣어두고 왜 차
가워지지 않을까 하는 사람들의 낯빛을 여관의 방들은 곧
잘 하고 있다
“다시 와, 가기만 하고 안 오면 안 돼” 라고 말하던 여자의
질긴 음성은 늘 내 곁에 내근(內勤)하는 것이어서
나는 낯선 방들에서도 금세 잠드는 버릇이 있고 매번 같
은 꿈을 꿀 수도 있었다 (34~35쪽)
호우주의보
이틀 내내 왔다
미인은 김치를 자르던 가위를 씻어
귀를 뒤덮은 내 이야기들을 자르기 시작했다
발밑으로 떨어지는 머리카락이
꼭 오래전 누군가에게 받은 용서 같았다
이발소에 처음 취직했더니
머리카락을 날리지 않고
바닥을 쓸어내는 것만 배웠다는
친구의 말도 떠올랐다
미인은 내가 졸음을
그냥 지켜만 보는 것이 불만이었다
나는 미인이 새로 그리고 있는
유화 속에 어둡고 캄캄한 것들의
태(胎)가 자라는 것 같아 불만이었다
그날 우리는 책 속의 글자를
바꿔 읽는 놀이를 하다 잠이 들었다
미인도 나도
흔들리는 마음들에게
빌려온 것이 적지 않아 보였다 (44~45쪽)
때로 생은 철저하게 혼자인 시간을 부여한다. 부르지 않은 고독이 친구처럼 곁을 맴돌고 온기를 나눌 이를 찾을 수없는 순간들. 사귐에 익숙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겨를이 없는 생인 것이다. 사는 일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기도 한다. 나도 모르게 시집을 읽으면서 부르지 못한 이름들을 시를 빌려 불러본다.(여름에도 이름을 부르고 / 여름에도 연애를 해야 한다 / 여름에도 별안간 어깨를 만져봐야 하고 / 여름에도 라면을 끓여야 하고 / 여름에도 두통을 앓아야 하고 / 여름에도 잠을 자야 한다)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이상한 뜻이 없는 나의 생계는 간결할 수 있다 오늘 저녁
부터 바람이 차가워진다거나 내일은 비가 올 거라 말해주
는 사람들을 새로 사귀어야 했다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이의 자서전을 쓰는 일은 그리 어렵
지 않았지만 익숙한 문장들이 손목을 잡고 내 일기로 데
려가는 것은 어쩌지 못했다
‘찬비는 자란 물이끼를 더 자라게 하고 얻어 입은 외투의
색을 흰 속옷에 묻히기도 했다’ 라고 그 사람의 자서전에
쓰고 나서 ‘아픈 내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
었다’ 는 문장을 내 일기장에 이어 적었다
우리는 그러지 못했지만 모든 글의 만남은 언제나 아름다
워야 한다는 마음이었다 (55쪽)
여름에 부르는 이름
방에서 독재(獨裁)했다
기침은 내가 억울해하고
불안해하는 방식이었다
나에게 뜨거운 물을
많이 마시라고 말해준 사람은
모두 보고 싶은 사람이 되었다
팔리지 않는 광어를
아예 관상용으로 키우던 술집이 있었다
그 집 광어 이름하고
내 이름이 같았다
대단한 사실은 아니지만
나는 나와 같은 이름의 사람을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다
벽면에서 난류를
찾아내는 동안 주름이 늘었다
여름에도 이름을 부르고
여름에도 연애를 해야 한다
여름에도 별안간 어깨를 만져봐야 하고
여름에도 라면을 끓여야 하고
여름에도 두통을 앓아야 하고
여름에도 잠을 자야 한다
잠,
잠을 끌어당긴다
선풍기 날개가 돈다
약풍과 수면장애
강풍과 악몽 사이에
오래된 잠버릇이
당신의 궁금한 이름을 엎지른다 (58~59쪽)
박 준의 시는 특별하지 않아 특별하다. 그러니까 누군가의 상실이며 추억이고 일상이다. 나와 같은 계절을 사는, 쏟아지는 비를 함께 보거나 싸구려 여관에 잠시 몸을 의탁하는 그런 생을 사는 이가 들려주는 이야기라 더 끌린다. 예쁘거나 좋은 것만 보이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슬픔과 커져가는 절망을 건네는 것이다. 그 슬픔과 절망을 아는 이는 시를 읽으며 가슴이 절이거나 생목이 올라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나쁘거나 아프기만 한 게 아니다.
눈을 감고
눈을 감고 앓다 보면
오래전 살다 온 추운 집이
이불 속에 함께 들어와
떨고 있는 듯했습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날에는
길을 걷다 멈출 때가 많고
다음에도 길을 잃는 버릇이 있습니다
눈을 감고 앞으로 만날
악연들을 두려워하는 대신
미시령이나 구룡령, 큰새이령 같은
높은 고개들의 이름을 소리내보거나
역(驛)을 가진 도시의 이름을 수첩에 적어두면
얼마 못 가 그 수첩을 잃어버릴 거라는
이상한 예감들을 만들어냈습니다
혼자 밥을 먹고 있는 사람에게
전화를 넣어 하나하나 반찬을 물으면
함께 밥을 먹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
손을 빗처럼 말아 머리를 빗고
좁은 길을 나서면
어지러운 저녁들이
제가 모르는 기척들을
오래된 동네의 창마다
새겨넣고 있었습니다 (82~83쪽)
어디선가 슬퍼하고 있을, 어디선가 아득한 시간을 손으로 꼽고 있을 당신을 생각한다. 나와 당신과의 거리는 닿을 수 없이 멀겠지만 큰 목소리로 이런 시를 읽어주고 싶다. 당신의 기쁨과 슬픔을 모두 전하는 안부를 듣고 싶다.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
철봉에 오래 매달리는 일은
이제 자랑이 되지 않는다
폐가 아픈 일도
이제 자랑이 되지 않는다
눈이 작은 일도
눈물이 많은 일도
자랑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작은 눈에서
그 많은 눈물을 흘렸던
당신의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
나는 좋지 않은 세상에서
당신의 슬픔을 생각한다
좋지 않은 세상에서
당신의 슬픔을 생각하는 것은
땅이 집을 잃어가고
집이 사람을 잃어가는 일처럼
아득하다
나는 이제
철봉에 매달리지 않아도
이를 악물어야 한다
이를 악물고
당신을 오래 생각하면
비 마중 나오듯
서리서리 모여드는
당신의 눈동자의 맺음새가
좋기도 하였다 (22~2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