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다녀왔다. 일요일에 출발해서 1박 2일의 일정이었다. 하필 폭우가 쏟아지던 시간에 고속도로 위에 있었다. 내가 운전을 한 건 아니지만 조수석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무서웠다. 병원 일정으로 간단한 검사를 위한 것이었지만 오랜만에 입원을 하니 위중한 환자가 된 기분이었다. 몸무게와 키를 확인하고 배정된 병실로 향했다. 침대에 담요와 환자복이 개어져 있었다. 저녁을 먹고 나니 딱히 할 일이 없었다. 보호자도 나도 심심했다. 코로나 이후로 병원 분위기는 달라졌다. 조용했고 커튼을 걷어두는 게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다. 나쁘지 않았다. 혈압, 맥박을 측정하고 간단한 채혈을 했다. 미열이 있어 살짝 걱정했지만 간호사는 검사에는 상관이 없다고 말했다.


일찍 잠들었지만 간호사의 방문으로 깊은 잠은 오지 않았다. 평소처럼 새벽에 깨고 다시 잠들기 위해 노력했다. 월요일의 검사는 지난번 외래에서 하지 못한 것으로 이번에는 꼭 해야만 했다. 혹시나 이번에도 힘들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검사를 마칠 수 있었다.


검사 결과를 기다리면서 늦은 아침과 약간의 낮잠과 점심을 먹었다. 걱정할 정도의 결과는 아니었고 의사는 1년 후로 검사를 잡았다. 이번 검사는 돌발적인 상황이라 할 수 있지만 하나의 숙제를 끝낸 기분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나를 살피는 일이었다. 내 몸에 일어난 변화를 내가 감지하는 것, 내가 스스로 나를 책임지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로 향하는 길은 폭우와 바람 때문에 초조하고 불안했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편안하면서도 지루했다. 월요일의 고속도로는 생각보다 차가 많았다. 저녁을 간단하게 먹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피곤했는지 꽤 많은 잠을 잤다. 그리고 화요일과 수요일에는 내 일정을 아는 친구의 통화가 이어졌다. 어쩌다 보니 알게 된 일정이었는데 병원이라서 걱정이 많았다. 직접 통화를 해야 마음이 놓이는 이들이었던 것이다.


나의 안부를 묻는 일, 그 모양은 다양하다. 자신의 관심거리에 맞춘 안부라고 할까. 어떤 이는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으로 안부를 시작하고 어떤 이는 드라마 이야기를 하다 마지막에 내 안부를 묻고 어떤 이와는 안부를 묻지 않고 아무렇지 않은 듯 일상을 주고받는다. 누군가를 염려하고 걱정하는 마음은 만남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다음 주에는 친구를 만나기로 했다. 나는 친구가 많은 편이 아니고 얼굴을 보는 이도 정해져 있다. 그래도 얼굴을 보고 밥을 먹으면 안심이 될 것 같아서 약속을 정했다.





책의 안부에 대해 생각해 보면 작가의 신간 소식을 듣고 읽거나 오랜만에 작가의 책을 구매하고 읽는 일이 아닐까 싶다. 김경후의 시집이 그러하다. 김경후의 시집 『열두 겹의 자정』을 좋아하는데 그 이후로는 시집을 읽는 게 없다. 유디트 헤르만의 소설도 장편은 처음인 것 같다. 두 권의 책은 모두 Falstaff 님 덕분에 알게 되었다. 땡스 투로 부족하지만 고마움을 표한다. 이윤 리의 에세이는 너무 아프고 슬플 것 같은데 그래도 읽어보고 싶어서 구매했고 하루키의 소설은 좋아한다고 할 수 없지만 오랜만에 나오는 소설이라서.


가을이니, 가을에 어울리는 이런 제목의 시를 우선 찾았는데 뭔가 핏빛 낭자한 풍경을 목도한 것만 같다.

​

눈먼 새들

열린다

날개 묶어

열린다

핏빛으로 떨어진다 열린 채

얼어붙은 채

엄마, 떨어지면 날아가?

가을 하늘은 넓고 높지

지하철역 스크린도어 열리고

닫힌다

내가 스마트폰을 찾는 사이

열차

날아갈 듯 핏빛 눈빛들

(「단풍」, 전문)

​

어제는 너무 추워서 겨울이 왔나 싶었는데 오늘은 다시 날씨가 가을이라고 확인시켜준다. 아직 노란 은행잎이 수북히 쌓인 걸 못 봤으니 겨울 생각은 조금 미뤄두기로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우리 세희 ㅣ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58
조해진 지음 / 현대문학 / 2026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로 살아간다. 나의 안위와 행복이 우선이다. 나의 상처에만 매몰되어 주변을 둘러볼 여력이 없다. 그러다 움찔한다. 나를 둘러싼 우리를 만난 때, 내가 여기 존재할 수 있는 근원과 마주했을 때 말이다. 누군가 역사의 한 조각이라 말하고 누군가 나로 이어져, 나와 연결된 단단한 뿌리라 말한다. 나의 조부모가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평범한 삶을 살았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나는 그들의 젊음을 모르고 부모의 시간을 모르는데 말이다.


조해진의 『우리 세희』를 읽으면서도 그랬다. 끊임없이 타인을 향한 연민과 이해를 놓지 않으려는 작가임을 알았지만 이번에는 그 무게가 달랐다. 어쩌면 실존 인물에 대한 이야기라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몰라도 상관없다. 그저 소설로만 읽어도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과 맞닿는다. 한 사람의 생이 이처럼 참담할 수 있을까. 역사라는 거대한 운명 앞에 한 개인의 삶은 무참히 무너질 수밖에 없는가. 끝내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이방인이었던 그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구원이자 기쁨이었다.


소설은 업무를 위해 런던에 도착한 연주가 선생님이 위독하다는 전화를 받는 것으로 시작한다. 선생님은 연주의 죽은 엄마 오세희와 연결된 분으로 연주 자신과도 이어진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엄마와 같은 세계와 속한 사람이라고 해야 할까. 엄마가 한국에 오기 전 살았던 그곳, '자이니치'로서 재일한인들이 살았던 대학시절 선생님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던 선배이자 친구로 지낸 선생님이 죽음을 앞두고 있다. 선생님은 일본에서 나오 자랐고 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했지만 자이니치라는 이유만으로 차별과 냉대를 받았다. 선생님과 센세를 만날 때마다 그들이 들려준 이야기로 연주는 이제껏 생각하지 않았고 몰랐던 시절의 엄마를 만날 수 있었다. 선생님이 떠나면 일본의 양로원에 계시는 치매를 앓는 외할머니를 제외하면 엄마 세희를 기억할 사람은 선생님의 아내 센세뿐이다.


연주가 런던에 온 이유는 일본계 영국인 예술가 ‘제이비 류’를 취재하기 위해서다. 그가 제주 4·3의 비극을 다룬 자품을 전시했기 때문이다. 소설은 연주가 런던에 머무는 3일 동안 선생님의 죽음과 동시에 연주 엄마 세희의 삶을 들여다본다. 현재 런던에서 연주가 느끼는 이방인을 향한 차별과 세희가 서울에서 담담하게 받아들였던 타인의 시선, 선생님과 엄마의 부모가 살아온 오사카의 삶을 교차하며 들려준다.


'자이니치'로 살아간다는 게 얼마나 힘든지,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다시 일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서글프고 고단한 삶에 대해서. 단 3일이라는 시간을 보내는 동안에도 연주는 모멸감을 느끼고 치욕스러웠는데 엄마 세희와 외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어땠을까. 1942년 원산에서 오사카 항만공사 인부로 강제 징용된 세희의 부모, 말이 통하지 않는 곳에서 오직 살아남기 위해 살아야 했던 시간. 그럼에도 세희는 단 한 번도 일본 사람이었던 적이 없었다. 일본에서는 한국 사람이라는 이유로, 한국에서는 일본에서 왔다는 이유로 조롱거리가 되었다. 세희는 평생 한국 사람이었는데 말이다.


내력이 죄가 되고 죄는 죄책감으로 수렴되는 삶이었다. (47쪽)





한국 어디에도 기댈 수 없던 세희가 자신을 아는 선생님과 재회했을 때 얼마나 기뻤을까. 어린 연주는 그런 엄마를 지켜보며 세희가 선생님과 센세를 만났을 때 보였던 모습을 지울 수 없다. 연주가 런던에서 단 3일 동안 머무는 동안에 받았던 이방인으로의 시간을 세희와 선생님, 그리고 그들의 부모는 평생 그렇게 살아온 것이다. 그건 그들이 원한 것도 아니었고 잘못도 아니었다. 역사라는 거대한 장벽 앞에서 견디며 살아남아야 했으니까. 그랬기에 세희의 오빠는 세희가 원하는 삶을 살게 해주기 위해 북으로 떠난 것이다. 동생은 자신과 달라야 하니까. 그러나 그렇게 북으로 떠난 오빠의 죽음은 세희를 가장 힘들게 했다. 그러나 세희도 알고 있었다. 오빠의 죽음은 개인이 아니라 역사와 국가의 문제라는걸. 개인을 지켜줘야 할 국가가 부재했다는 것을. 그것은 ‘제이비 류’의 작품에서도 이어진다. 그의 할아버지가 고향 제주에서 겪었던 무자비한 폭행도 역사와 국가 바로잡아야 하는 것이라는 것. 살아남기 위해 그곳을 떠나야 했던 심경을 누가 이해할 수 있겠는가. 오롯이 혼자 감당해야 할 거대한 슬픔을 현재를 살아가는 나는 알 수 없다. 다만, 세희와 선생님이 서로에게 회복의 존재라는 사실을 생각할 뿐이다. 거기에 그들의 이야기를 듣은 연주가 다시 그 이야기를 기억하고 간직하려 한다는 것을. 세희라는 이름 속에 담긴 그들의 사랑과 기쁨, 그리고 소망을 말이다. 기억이 흐려져 손녀인 연주를 세희라 부르는 외할머니의 목소리마저도 소중하다.


‘세’ 뒤에 ‘희喜’를 넣어 ‘세희世喜’를 완성한 사람은 외할아버지였다. 세이지 sage의 꽃말은 ‘구원’. 그러니까 ‘세희’는 세상과 세상에 속한 스스로를 구원하면서 기뻐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의미였다. 히로코가 그저 몸에 맞는 옷이라면 세희는 보호막 같은 옷에 가까웠다고 엄마는 말했다.

세희야,라고 불리면 더 이상 무서울 게 없었다고도. (95~56쪽)


우리는 때로 아프고 불편하다는 이유로 역사를 지나간 과거로 여긴다. 현재가 아닌 과거니까. 돌이킬 수 없고 바꿀 수 없다고 쉽고 안일하게 생각한다. 나 역시 다르지 않았다. 책을 통해, 수업을 통해 그런 일들이 있었다는 것만 알았다. 나는 모어를 잃은 적이 없고, 전쟁을 경험한 적도 없고 단 한 번도 이방인이 아니었으니까. 지금 여기 나로 존재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으니까. 역사의 고통은 온전히 회복될 수 없고 치유될 수 없는 것이라는 걸 몰랐다. 그 불가능한 상처를 잊어버린다면 얼마나 비참한 일인가.


그들이 내게 들려준 이야기는 고스란히 내 몸 안에 새겨져 있다. 숨이 멎는 날까지 내 피와 뼈에 저장된 그들의 이야기는 단 한 줄도 분실되지 않으리라. (116쪽)


그러니 나는 이제 기억하려 한다. 보호막 같은 옷을 입은 세희의 마음을, 감히 우리 세희라 불러본다. 조해진의 소설을 통해 연주처럼 내 몸에 새겨둔다. 언제 어디서든 모어를 말하고, 어디든 갈 수 있고, 원하는 삶을 위해 살아갈 수 있는 내가 여기 존재할 수 있는 근원에 대한 감사를 전한다. 그리고 단호하게 말한다. 간직하고 기억하여 잊지 않겠다고, 나와 우리는 그들과 이어져있다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2)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 2026 - 사과
박솔뫼 외 지음 / 북다 / 202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떤 책은 읽기도 전에 기대하는 게 있다. 『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 2026』 대상작인 박솔뫼의 「사과」가 그랬다. 정확하게는 기대가 아니라 떠오르는 소설이 있었다. 박솔뫼의 「사과」란 제목과 흩어지는(이별하는) 과정을 담았다는 소개에서 나는 은희경의 단편 「내가 살았던 집」속 문장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사과 역시 자기들끼리 닿아 있는 부분에서부터 썩기 시작한다는 걸 알았다. 가까이 닿을수록 더욱 많은 욕망이 생기고 결국 속으로 썩어 문드러지는 모양이 사람의 집착과 비슷했다. 갈색으로 썩은 부분을 도려냈지만 살이 깊게 팬 사과들은 제 모양이 아니었다. (「내가 살았던 집」 중에서)


하지만 박솔뫼의 「사과」는 결이 달랐다. 뭐랄까.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은 채 다투지 않고 헤어질 수 있다는 것, 어쩌면 그것은 우리의 일상에서 붙잡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박솔뫼의 소설이 예의 그랬듯이 산책하듯, 걷고 이동하는 모습을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를 담은 듯했다. 「사과」의 주인공 ‘애리’도 다르지 않았다. 사원 숙소를 제공하는 회사에 다니는 애리는 주 4일일하고 주말엔 카페에 나간다. 애리는 기차를 타고 이동한다. 카페의 손님이자 커피가 거의 들어가지 않은 커피의 맛을 구현하는 일을 하는 ‘선호’를 만난다. 애리와 선호는 가까워지며 선호의 집에서 주말을 보내기도 한다.


선호가 출장을 가면서 애리는 선호의 집에 머물며 선호의 화분을 돌본다. 보통의 연인이라면, 아니 소설에서 그런 관계를 다룬다면 떨어져 있는 게 힘들어 보일 텐데 둘 사이에는 그런 게 없다. 애리는 선호가 출장에서 돌아오면 둘 사이가 멀어질 거라는 걸 아는 듯하다. 특별한 사건 없이 말이다. 이상한 건 시간이 흐른 뒤에 둘은 여전히 카페 직원과 손님 사이다. 어쩌면 처음부터 모든 게 예정되었는지도 모른다. 커피 본연의 맛이 사라진 세계에서 커피를 파는 카페 직원 애리와 다르게 아버지를 통해 그것을 아는 선호, 회사 숙소에서 출퇴근하는 애리와 부모님이 남겨준 바닷가 근처에 건물을 세놓은 선호. 선호는 애리를 흙이 묻은 감자를 굳이 씹어 먹는 사람이라고 느꼈고 애리는 자신이 먹던 건 사과라고 보여줄 수 있었지만 변호하지 않았다. 어떤 만남은, 어떤 연애는 설명할 필요도 없이 서서히 이별이 이어지기도 하니까. 그러니까 「사과」는 연인 사이의 이별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서로 다른 존재라는 인식과 삶이 흐르는 대로 흘러가게 놔두는 삶의 순간에 대한 포착이라고 할까.


박솔뫼의 「사과」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설정은 ‘잠’이었다. 내가 느끼기에 애리는 잠이었고 선호는 꿈이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장소를 잠이라고 구현할 수 있는 이는 오직 박솔뫼뿐이다. 내가 가질 수 있는 것, 내가 언제든 갈 수 있는 공간, 잠.


애리는 잠이라는 상태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잠이라는 장소가 자신에게 주어졌다고 여긴다. 어느 곳에서 살든지 나에게 잠이라는 곳이 있고 나는 잠을 잘 때 그곳에 가면 된다고 생각한다. ( 「사과」, 14쪽)


잠과 꿈은 서로 다른 존재로, 잠은 자신에게 주어진 장소이고 자신이 가질 수 있는 공간이었다. 꿈은 애리가 가끔 볼 수 있는 것이었는데, 그래서 애리는 잠을 자지 않을 때도 가끔 꿈을 꿀 수 있었다. ( 「사과」, 22쪽)





자선작 「비둘기 옮기기」도 흥미롭다. 여러 나라의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며 지금 읽는 것을 다른 것으로 옮기고 싶다는 열망에 지닌 화자의 이야기.‘도쿄’와 ‘나카타’를 거닐며 마주한 풍경과 사유. 그것은 박솔뫼 본연의 모습이라 생각한다. 비둘기와 고양이는 같을 수 있을까. 아니면 얼마나 다를까. 서로 다른 존재를 옮기는 일, 서로 다른 존재를 옮기는 것과 말하는 것. 그것은 이해하고 노력하는 일일 것이다. 「사과」와 「비둘기 옮기기」는 박솔뫼의 매력에 빠지기 충분한 단편이다. 그렇다고 해서 쉽게 읽었다는 말은 아니다. 박솔뫼의 소설은 풍경, 산책, 걷기, 이동과 같은 분위기로 남았다.


비둘기를 고양이로 옮길 수는 없었지만 그 순간 비둘기는 이전처럼 보이지 않기는 했고 비둘기는 날아가지도 움직이지도 않고 가만히 벤치에 앉아 있었다. 그 후로 나는 비둘기를 이전과 같이 보지 않고 아주 조금 고양이처럼 보게 되었다. (「비둘기 옮기기」, 54쪽)


5편의 우수작품상도 나쁘지 않았다. 성혜령의 「하악」은 화자 ‘자인’이 보낸 마흔 번째 생일 이야기다. 엄마와 함께 장애시설에 거주하는 여동생 ‘태인’을 보러 가고 나머지 시간은 사촌 동생인 ‘서린’을 만나는 하루를 담았다. 장애를 가진 태인, 완벽한 외모를 가진 서린, 그 사이에 자인. 선과 악, 아름다움과 추함을 대비하면서 우리 사회의 이중성을 보여준다.


자기들은 정상이고 너희들은 비정상이라며 분명하게 선을 긋는 사람들. 이제 자인은 분노하지 않는다. 구분하는 게 편리하다는 걸 자인도 아니까. 실은 자인도 이 시설과 마을로부터 분리되고 싶으니까. (「하악」, 100~101쪽)


정희원의 「영주」는 학교 폭력 피해자인 ‘영주’가 가해자이자 방관자였고 현재 작가가 된 화자 ‘우진’을 느닷없이 찾아와 자신의 죽음을 지켜봐 달라고 말하는 이야기다. 우진에게 영주의 등장은 잊고 살았을지 모르는 과거가 불쑥 나타나 자신을 옥죄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 우진은 그런 영주를 피하지 않고 만나고 영주가 원하는 곳으로 운전을 한다. 과거의 죄의식 때문일까.


반려견 ‘조아’의 유골함을 어디에 안치할까 고민하다 가족묘에 안장하기로 한 임솔아의 「나의 빈 묘에」, 우연히 발견한 벽에 박힌 쇠갈고리로 자신의 거죽을 벗긴다는 기이한 설정의 정기현의 「그거 점 된다」, 사고로 인해 두 다리가 마비된 ‘세진’의 재택근무 일상과 제목 그대로 일일업무를 보고하는 하루를 담은 황시운의 「일일업무 보고서」까지 현재를 살아가는 다양한 우리의 모습을 만날 수 있었다. 문학이라는 허구의 세계로 치부할 수 없는 현실의 단면을 말한다. 사느라고 바빠서 놓치고 있던, 나와는 상관없다고 여기는 삶과 고스란히 마주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4)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김연수 작가를 좋아한다. 그의 소설을 좋아한다는 말이 정확하겠다. 그가 경북 김천 출신이라는 걸 알고는 대학 동기 하나가 그와 같은 출신이라는 게 떠올랐다. 그 동기의 이름은 유명 정치인과 같아서 기억하고 있는데 지금까지 연락이 닿았다면 나는 김연수 작가에 대해 물어봤을 것이다. 김천이 뉴욕제과점에 대해서도. 어제 <책빵 뉴욕제과점>이란 곳에서 보낸 책을 받았다. 김연수 작가의 소설집 『눈 내리는 삼일포』였다. 작가의 사인본, 그러니까 나만을 위한 사인본이다. 내가 김연수 작가를 좋아하는 걸 아는 다정한 동생이 보낸 선물이다.


<책빵 뉴욕제과점>이란 이름이 왠지 익숙해서 검색하니 독립서점이었다. 짐작하는 바로 그곳. 김연수 작가의 부모님이 운영하시던 그 빵집이 독립서점이 된 것이다. 작가의 누나가 운영하신다고 한다. 아마 동생의 선물이 아니면 나는 몰랐을 곳이다. 내가 독립서점을 방문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가까운 곳에 독립서점도 없거니와 온라인 서점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작가 사인본의 경우 거의 같은 경로로 내게 도착했다. 기억을 더듬어 찾아보니 김연수의 『소설가의 일』과 『소설가의 산책』이란 비매품 도서에도 있었다. 날짜는 2014년 11월 15일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를 기억하고 기회가 닿을 때마다 나를 생각해 주는 마음이 있다는 게 정말 감사하다. 우리는 만난 적이 없고 단 한 번의 통화가 전부였다. 우리는 이어준 건 책이었고 그 가운데 김연수 작가가 있었다.


한 번씩 소장하고 있는 책을 정리한다. 읽지 않을 책, 읽게 될까 생각하지만 그대로 미루는 책, 누렇게 바랜 책을 이제는 과감히 정리하는 편이다. 시집은 남겨야지 했던 마음도 차츰 시들어져서 시집도 정리를 한다. 정리하는 과정에 읽으면서 분류를 다시 하는 경우도 있지만 말이다. 아무튼 현재 나에게 책은 가까운 사이면서도 정리할 사이가 되어가는 중이다. 그러니 김연수 작가의 책도 모두 소장한 건 아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애정은 줄어들지 않고 희미해지지도 않는다. 읽지 않은 책도 여전하다.





처음 김연수 작가의 소설을 읽었던 건 다시 책을 읽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내가 쓴 글을 검색하니 나는 그의 소설에서 큰 위로를 받은 것 같다. 내가 기억하고 싶었던 문장을 다시 읽어보는데 최근에 그가 쓴 소설에서 받은 느낌과 이렇게 비슷할 수가 있다니. 놀라웠다. 누군가는 한 작가의 글이니 당연한 거 아니냐고 하겠지만 그건 쉽게 설명할 수 있는 감정이 아니다. 2007년의 글이었다. 다시 이 소설을 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문장은 오래 기억하려 할 것이다.


우리는 지나간 뒤에야 삶에서 일어난 일들이 무슨 의미인지 분명하게 알게 되며, 그 의미를 알게 된 뒤에는 돌이키는 게 이미 늦었다는 사실을.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드』 중에서)


삶이란 우리가 살았던 게 아니라 기억하는 것이며 그 기억이란 다시 잘 설명하기 위한 기억이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중에서)




이 가을, 김연수 작가의 신잡 소설집이 나와서 참 기쁘다. 내가 아는 책을 좋아하는 이들과 이 기쁨을 함께 하고 싶다. 주변에는 함께 할 수 있는 이가 아주 많지 않지만 말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3)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blanca 2026-10-08 1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그 뉴욕제과점이 독립서점이 된 거군요. 친필 사인본이라니, 우와....자목련님과 함께 김연수를 좋아하는 감정을 공유할 수 있어 기뻐요. ^^;;

자목련 2026-10-08 11:58   좋아요 0 | URL
김연수의 소설을 아는 사람이라면 더욱 반가울 독립서점이 아닐까 싶어요. 저도 블랑카 님과 김연수 작가에 대해 이야기를 할 수 있어 좋아요. 많이 많이요!
 
드립백 에티오피아 G1 시다모 보나 - 12g, 5개입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6년 8월
평점 :
일시품절


맛있는 커피는 계속 마시고 싶다. 이번 드립백에는 추가 스탬프까지 있으니 구매해야지!! 땡스투는 사촌동생에게 책과 커피를 선물하는 멋진 언니에게!!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잠자냥 2026-10-08 14: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름을 사랑하는 그 언니인가요?! ㅋㅋㅋ

자목련 2026-10-10 09:40   좋아요 0 | URL
네, 바로 그 언니입니다!

다락방 2026-10-13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바로 그 언니입니다! 저도 여기에 땡투하러 왔어요 ㅋㅋㅋㅋㅋ

자목련 2026-10-20 11:43   좋아요 0 | URL
멋진 언니의 땡투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