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자
아니 에르노 지음, 정혜용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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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온전하다고 말하는 기억이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온전하다고 믿을 뿐이다.16년 전에 돌아가신 엄마를 기억하는 일이 쉽지 않다.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으로 본 모습을 정확하게 묘사할 수 없다. 선명하게 떠오르는 어느 날의 기억은 내 의지가 만들어낸 하나의 이미지에 불구할지도 모른다. 남은 사진 속의 젊은 한 여자의 수줍은 미소만 선명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사랑하는 이라 해도 그를 기억하고 글로 쓴다는 건 아주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까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해 쓴 『남자의 자리』와 어머니에 대한 글인 『한 여자 』를 쓴 아니 에르노가 정말로 대단하다는 것이다. 아니, 고맙다. 그녀의 글을 읽으면서 잠시라도 내 어머니와 내 아버지를 생각하게 되었으니까.

 

 ‘이것은 쉽지 않은 시도이다. 내게 어머니는 이야깃거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 어머니는 늘 거기 있었다.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여는 첫 행위는 시간의 관념에서 벗어난 이미지들 속에 어머니를 고정시키는 것 ― <어머니는 난폭했다>, <어머니는 전부를 다 불사른 여자였다>. 그리고, 어머니가 등장하는 장면들을 뒤죽박죽 떠올리는 것.’ p. 18~19

 

 그랬다. 그녀의 어머니처럼 세상 모든 어머니는 늘 거기 있는 존재였다. 여자가 아닌 어머니와 아내의 모습으로, 자식을 키우고 가족을 돌보며 일을 하는 모습으로 있었다. 그 이전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한 번도 엄마의 어린 시절을 궁금해하지 않았고 단 한 번도 질문을 하지 않았다. 언제나 내 어머니로 존재하는 삶이라 여겼던 것이다.

 

 한 여자로 태어나 성장하여 공장에서 일을 하고 돈을 벌다 한 남자를 만나 결혼하고 첫 딸을 잃고 전쟁 중에 다시 딸을 낳고 키운 여자. 식료품점을 운영하면서 딸과 모든 것을 함께 공유하기를 바라지만 사춘기를 접어든 딸은 점점 반항하고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 어머니와 경계를 짓는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것이 그녀에게 얼마나 큰 상처이고 깊은 상실을 안겨주는지 그 시절의 모든 딸은 알지 못한다.

 

 ‘그녀의 가장 깊은 욕망은 자신이 누리지 못했던 것 전부를 내게 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렇다는 것은 결국 그녀에게는 과중한 노동, 극심한 돈 걱정을 의미하는 것이다.’ p. 51

 

 어머니는 딸이 더 많은 것을 배우고, 더 좋은 것을 보고 더 나은 삶을 살기를 원한다. 좋은 남편을 만나 행복하기를 바란다. 아버지가 죽고 혼자 남은 어머니가 모든 짐을 들고 딸과 함께 살기로 한다. 능력껏 일하는 딸을 위해 모든 것을 나 내어주려 한다. 그게 육아이든 살림이든 상관없다. 뭔가 도움이 되는 존재이고 싶었던 것이다. 치매라는 병이 그녀를 잠식할 때까지 모든 걸 주고자 했다. 어머니는 그런 존재였던가?  우리가 그렇게 만든 것 아니었을까.

 

 아니 에르노는 어머니의 모든 것을 기록하고 싶었다. 치매에 걸려 자신을 잃어가는 어머니의 모습까지 차분하게 담아낸다. 점점 무너지고 부서지는 어머니의 정신과 행동을, 어머니가 마지막까지 절대로 놓지 않으려 했던 기억까지, 모든 걸 기억하고 그 공간에 함께 머물고 싶었다.

 

 ‘나는 그녀가 죽기를 바라지 않았다. 나는 그녀를 먹이고, 만지고,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p. 105

 

 ‘앞으로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지 못할 것이다. 여자가 된 지금의 나와 아이였던 과거의 나를 이어 줬던 것은 바로 어머니, 그녀의 말, 그녀의 손, 그녀의 몸짓, 그녀만의 웃는 방식, 걷는 방식이다. 나는 내가 태어난 세계와의 마지막 연결 고리를 잃어 버렸다.’ p. 110

 

 나도 그녀가 죽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녀만을 위해 밥을 짓고, 그녀만을 위한 방을 만들고, 그 방에서 함께 이야기하고 싶었다. 나중으로 미뤘던 소소한 것들을 함께 할 그녀는 없다.  내 어머니의 목소리가 기억이 나지 않아 서글프다. 그저 내가 그녀를 닮았다는 사실을 위안으로 삼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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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파는 상점 - 제1회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ㅣ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15
김선영 지음 / 자음과모음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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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은 무엇이든 때가 있다고 말한다. 이 말을 달리 생각하면 오늘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지나고 보면 후회되는 게 바로 수많은 오늘이기 때문이다.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때는 공부할 때다. 학생의 신분인 그 시간을 맘껏 즐기라는 깊은 뜻이 숨어 있지만 공부하라는 말로만 들리기 십상이다. 과연, 학업이 우선인 학교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이가 몇 명이나 될까. 그렇다면 오늘이라는 시간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까.  1분 1초도 허비하지 않도록 촘촘한 계획표를 세워야 할까. 『시간을 파는 상점』은 잡을 수 없는 존재, 시간을 흥미롭게 다룬 책이다.

 

 주인공 온조는 평범한 여고생이다. 소방대원이었던 아빠가 돌아가시고 엄마와 사는 씩씩하고 당찬 소녀다. 엄마를 도우려고 이런 저런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학생 신분에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그러다 생각한 게 바로 <시간을 파는 상점>이다. 말 그대로 누군가가 원하는 시간을 파는 것으로 의뢰인의 시간을 대신해서 온조가 일을 처리해주는 일이다. 온조는 이제부터 시간을 관장하는 ‘크로노스’다.

 

 온라인에 카페를 개설하자, 들어온 의뢰는 훔친 물건을 제자리에 돌려놓는 일이다. 그것도 몇 일 전 학교에서 일어난 도난 사고다. 거절하려 했지만 돈은 입금 되었고 온조는 울며 겨자 먹기로 일을 진행하면서 의뢰자 ‘네곁에’를 찾아 나선다. 도난당한 물건이 돌아오자 학교는 다시 술렁인다. 은조는 사건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는 아이들을 주목해보지만, 같은 학년이라 해도 ‘네곁에’가 누구인지 온조는 알 수 없다.  ‘네곁에’를 찾는 동시에 또 다른 일을 맡는다. 이번엔 의뢰인 ‘강토’을 대신 해 할아버지와 밥을 함께 먹는 일이다. 장소와 시간만 알려줄 뿐 다른 것 아무 것도 없다.

 

 온조는 할아버지에게 안타까운 사연을 듣는다. 남은 여생을 자신을 위해 보내기 위해 할아버지가 여행을 떠난 사이에 혼자 남은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외국에 사는 아들에게 소식을 전해씨만 강토 아빠는 바쁘다는 이유로 할머니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온조는 시간은 만들 수 없다는 것,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책은 시간을 파는 상점의 주인인 크로노스와 평범한 고교생인 온조의 일상을 통해 온라인이라는 공간에서 솔직한 더 자유롭게 솔직한 아이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심각한 학교 폭력과 왕따 뿐 아니라 학교에서 벌어질 수 있는 다양한 문제들을 비롯하여 재혼 가정의 장단점을 말하는 난주와 부모의 과한 기대로 외로운 혜지를 통해 방황과 혼란으로 힘든 아이들의 고민을 들려준다. 그 시간을 견딜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곁에 있는 선생님과 친구, 가족이라는 걸 알려준다. 온조에게 엄마가 들려주는 말처럼 말이다. 

 

 “엄마는 늘 시간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있을 거라고. 그런데 그 시간은 어떤 예고도 없이 사라져버렸어. 늘 바쁘다고 하면서 필요 없는 시간들을 너무 많이 소비하면서 시간 없다고 한 거라는 것을 알았어. 엄마는 다시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아. 엄마는 소중한 사람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하고 싶어. 그게 결국 엄마를 행복하게 해줄 거라고 믿어.” p. 150

 

 바쁘다는 이유로 나중으로 미룬 시간들이 남아 있을 거라 믿지 말고 지금의 시간을 소중히 여기라는 것이다. 혼자가 아닌 함께 보내는 시간이 더 많은 추억을 남긴다는 건 당연한 진리이니까. 좋은 것을 먹을 때, 멋진 풍경을 마주할 때, 가족이나 사랑하는 이가 떠오르는 것처럼 말이다.

 

 공평하게 주어진 시간이지만 내게 속한 시간을 사랑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그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게 감사한 일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 시간들을 간직해야 한다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함께 공부를 하고, 함께 웃고, 함께 슬픔을 견디는 일상을 소중하게 여기라고. 그러니 무엇이든 때가 있다는 건 진부하지만 기억해야 할 말이 아닐까.

 

 ‘시간은 ‘지금’을 어디로 데려갈지 모른다. 분명한 것은 지금의 이 순간을 또 다른 어딘가로 안내해준다는 것이다. 스스로가 시간을 놓지 않는다면.’ p. 219

 

 청소년의 마음을 잘 보여주는 소설이다. 문자나 온라인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소통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정확하게 그려 담았다. 더불어 그 시간들이 앞으로 시간들을 위해 얼마나 중요한 시간인지 말한다. 잔소리가 아닌 같은 시간을 살며 같은 고민을 하는 목소리를 통해 들려줘서 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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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가 내렸다. 시원한 비였다. 언니와 조카는 이곳보다 많은 비가 내린 남부 지방을 여행중인데도 나는 하나도 걱정은커녕 신이 났다. 비오는 날, 에피톤 프로젝트의 음악을 들었다. 비가 와서 라면도 먹었다. 신간에 대한 소식은 문자를 통해 접하지만 음반은 그렇지 않다. 에피톤 프로젝트가 새 음반을 냈다는 걸 안 건 정말 우연이다. 『낯선 도시에서의 하루 』란 앨범 제목도 좋다. 우선 세 곡을 듣고 있다. <믿을게>와 <터미널>,<새벽녘>을 반복해서 듣고 있다. 한데, 이 앨범에 수록된 곡이 다 좋다. 검색해서 들어보니 정말 좋다. <우리의 음악>도 좋고, 이 나이에 이렇게 이런 감성에 취하면 곤란한데, 하면서도 빠져든다.

 

 

 

 

 

 

 

 

 

 

 

 

 

 

보고 싶은 많은 사람들
늘 쉽지 않은 마음의 용기
언제쯤 보자 또 언제 만나자
기약 없는 약속들이 늘고
무표정한 계절 사이로
너의 모습 내게 다가온다
오랜만이야 참 오랜만이야
길어진 하루 해 끝에 걸음을 늦춰보며
괜찮을 거야, 다 괜찮을 거야
나의 하루는 그런대로 지내
믿을게, 믿을래 그렇게 믿어볼게
잘했다고 우리 그 결정은 잘했다고
괜찮을 거야, 다 괜찮을 거야
나의 하루는 내일도 같은 하루라도
믿을게, 믿을래 그렇게 믿어볼게
이제 그만 더 이상 미안해하지 말고
괜찮아 다 괜찮아 지난일이야
마음속 남은 것들은 털어내고
괜찮아 다 괜찮아 지난일이야
슬퍼했던 마음은 이제는 모두 벗어내고   - 믿을게-

 

 

 여름, 떠나려는 당신에게 필요한 건 이 음악들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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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2-06-13 16: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거기 날씨 어때요? 금빛 물결의 바다 막 그런 푸른 로망이 이 음악과 함께 하길 바래요^^

자목련 2012-06-13 22:50   좋아요 0 | URL
여기는, 너무 더워요. 바다의 시원함이 필요해요. 해서, 내일 바다를 보러갈지도 몰라요.
아이님은, 잘 지내시나요?
 
삶을 안다는 건 왜 이리 어려운가요? - 사상가 아버지와 문학가 딸이 나눈 10년의 편지 ㅣ 글항아리 인문에세이 3
류짜이푸.류젠메이 지음, 이유진 옮김 / 글항아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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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식은 부모를 닮는다는 말이 있다. 당연한 말처럼 들리지만 무엇을 닮느냐에 따라 반응은 달라진다. 좋지 않은 습관이나 행동을 닮는다면 반가워 할 부모는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부모의 대를 이어 같은 분야에 종사한다면 뿌듯함을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여기 거울을 보듯 닮은 부녀가 있다. 서로의 모습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함께 걸어가는 중국의 사상가인 아버지 류짜이푸와 문학가인 딸 류젠메이가 그들이다.

 

 책은 1989년부터 1999년까지 10년 동안 부녀가 인생과 학문에 대해 팩스로 나눈 편지를 엮은 책이다. 제1부 사랑하라, 제2부 생각하라, 제3부 표류하라 세 부분으로 나누어 물음표로 가득한 삶에 대해 토론한다. 언제나 얼굴을 마주할 수 있는 부녀사이인데 왜 그들은 편지를 써야 했을까?  아버지 류짜이푸가 천안문 사건으로 두 딸을 중국에 남겨두고 아내와 함께 미국행을 선택해야 했기 때문이다.

 

 타국에 있는 아버지와 중국에 남은 큰 딸 류젠메이는 그때부터 편지로 소통한다. 두 사람의 편지는 류젠메이가 중국을 떠나 미국으로 유학을 오고 결혼을 하여 아이를 낳은 후에도 계속 이어진다. 문학을 공부하는 딸의 고민, 아이를 낳고 어머니가 된 후 겪는 놀라운 감동과 우울, 가까운 이의 죽음으로 인한 상실감, 아버지이기 이전에 인생의 선배이자 사상가에게 묻고 딸이기 이전에 문학가에게 답하는 것이다.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시작하는 편지글이라 다정하고 친근하지만 내용은 쉽다고는 말할 수 없다.사상가와 문학가라는 직업이 말해주듯 편지로 나눈 내용은 다양한다.  철학과 사상, 고전, 문학, 인생에 대해 서로에게 묻고 답한다.

 

 편지에는 특히 타국에서 바라보는 고국에 대한 객관적인 시선이나 중국 문학에 대한 내용이 많다. 아버지와 딸이 미국에서의 삶을 선택한 이유는 다르지만 중국에 대한 애정은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외롭고 고독한 이방인이 삶을 살아가야 하는데 있어 아버지는 딸에게 이런 글을 전한다.

 

 ‘평상심은 자연스러운 마음이야. 중국을 떠나온 이후에 근본적으로 나를 구원해준 것은 바로 평상심이란다. 중국에 있었을 때에는 나 역시 엄청난 명성을 얻었고 아주 활기차게 살았지. 하지만 중국을 떠난 뒤로는 단숨에 끝도 없는 적막 속으로 떨어지고 말았단다. 그런데도 내가 마음의 평정을 빨리 되찾을 수 있었던 것은, 애당초 나 자신을 결코 대단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야.’ p. 77

 

 ‘생명의 상태와 마음의 상태가 모든 것을 결정한단다. 이 말의 의미는 한 사람의 즐거움과 행복은 그가 무엇을 하는지, 직위와 직함이 무엇인지에 따라 결정되지 않고 생명의 상태와 마음의 상태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란다.’ p. 173

 

 제목처럼 삶이 절망과 고통으로 가득 차 무거울 때,  ‘삶을 안다는 건 왜 이리 어려운가요?’ 누군가에게 묻고 싶었던 이라면 이 책을 통해 삶에 대해 이해하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빛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무엇에 중점을 두고 살아야 하는지, 왜 그래야 하는지 알려준다. 부와 명예만을 바라며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일침을 가하기도 한다.  

 

 ‘자아라는 지옥은 어디에나 존재하지. 그것은 네가 어딜 가든 너를 따라다니는 지옥이란다. 허영의 추구, 끝없는 욕망, 타인에 대한 배척과 질투의 사념, 분발하기를 멈춘 나태, 먼지 같은 성취가 빚어낸 교만 등이 모두 자아의 지옥이란다. 어쨌든 인간은 죽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런 욕망(사념)이 허망하게 느껴지지. 그리고 인간이 최후에는 피할 수 없는 공허 속으로 떨어지게 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인간 세상의 눈부신 허영이 죄다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된단다. 난 네가 청춘일 때, 자아의 지옥에 대해 깨닫기를 정말 바란단다.’ p. 98

 

 이처럼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는 가르침을 주니, 인문학과 철학 강의를 듣는 기분이다. 하여 스승 같은 책이 아닐까 한다. 날짜대로 싣지는 않았지만 어느 부분을 먼저 읽어도 상관없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딸에게, 딸이 아버지에게 보내는 안부이며, 인생에 대한 질문과 답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인문학, 철학, 문학을 공부하고 있거나 중국 문학에 관심있는 이라면 더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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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사르 2012-06-07 1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힛. 태그가 눈에 들어옵니닷. 아버지이기 이전에, 딸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묻고 답하고 또 반대로 하기도 하는 이런 행위가 보기 좋아요. 가족 관계로 얽혀 서로에게 가족의 지위를 바라는 그런 류는 고향의 푸근함을 주기도 하지만 벗어나고픈 갑갑함의 대명사가 되기도 하니까요. 참 부러운 부녀지간입니다.

옮겨주신 '평정심'부분과 '자아라는 지옥' 부분은 두고두고 읽으며 곱씹고 싶은 부분이네요.

자목련 2012-06-08 09:45   좋아요 0 | URL
제게는 어려웠지만 책은 아주 좋았어요. 중국의 문화나 역사에 대해 많이 알았더라면 더 재미있게 읽었을 텐데.
지식인으로 산다는 것,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많은 부분에서 밑줄 긋고 싶은 책이었어요. 1999년까지만 이어지지만 아마도 부녀사이의 교류는 끊임없이 계속되지 않을까 싶어요.
 

 

 여름이 되었고, 가뭄의 날들이다. 적당한 비는 내리지 않고 곧 장마가 시작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이 드는 저녁이다. 내일, 모레 비 소식이 있지만 얼만큼의 비가 내릴지 알 수 없다. 저마다 비를 기다리는 마음은 다를 것이다. 부디 그 마음에 맞게 비가 내려주면 좋겠다. 

 

 이은규, 허연, 김경후의 시집을 읽었고 몇 편의 시를 옮기기도 했다. 미처 전하지 못한 시들을 옮긴다. 봄보다는 바다색 여름과 어울릴 것 같은 시는 이은규의 이런 시다.

 

 <허밍, 허밍>

 

 종종 구름을 눈에 담는 습관, 당신의 폐활량이 천천히 부

풀 때 그날의 공기를 부러워한 적 있다 구름을 가리키며 바

람의 춤이라고 말하는 당신의 허밍은 입술에 기대는 음악일

까, 기대지 않은 음악일까

 

 바람의 춤이 보인다면 그건 구름의 몸을 빌렸거나 폐활량

이 푸른 여름잎의 소관일 것, 구름은 바람으로 흐르고 바람

은 여름잎으로 들리니까

 

 언젠가 고원의 사라진 호수에 대해 이야기 나눴지 수면을

맴돌던 그때의 구름은 지금 어디 있을까 가장 낮은 하늘을

흐르고 있을 호수 저편, 깃털무늬구름이거나 물결무늬구름

 

 당신은 잠시 구름사전 속 이름들을 덮는다 구름과 노닐기

에 알맞은 바람이므로, 구름의 후렴은 음악이다 마지막 소

절이 첫 소절로 흐르는 허밍, 허밍

 

 사라진 호수 저편

 팔랑, 수면을 깨뜨리는 나비 한 점도 좋을 오후  - <다정한 호칭, p. 94>

 

 봄에서 여름으로 흐르는 시간을 막을 수 없다. 생이란 막을 수 없는 시간 같은 것일까. 어찌하려 하지만, 어찌할 수 없는 것. 감당할 수 없다고 피하고 싶지만 결국엔 나만이 감당해야 하는 게 삶이고 생이다. 그리하여 허연은 ‘생은 선택된 적이 없다’ 고, ‘생무덤이다’ 라고 말한다.

 

 <사라져가는 것들을 위한 나라는 없다>

 

 생에서 포기는 어떤 좌표도 읽지 않겠다는 결의다.

생은 선택된 적이 없다. 복제된 F1 완두콩들이 생에

들어온다. 엉겹결에 생에 들어서고, 생의 한가운데

놓인다. 생은 시달리거나 포기하거나 둘 중 하나다.

깨달음이 있는 것 같지만 생판 그게 어디 쉬운 일인

가. 늘 피를 보면서도 결국 생에서는 X축과 Y축이 와

글거린다. 이래저래 도망치는 놈은 도망치느라 생으

로 숨어들고, 살아보겠다는 놈들도 생으로 걸어 들어

간다. 무기력하게 좌표 평면으로 걸어 들어간다. 한

가지 매력이 있다면 생에서는 사라져가는 걸 동정하

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라져가는 것들을 위한 나라는

다행스럽게 없다. 지금 이 생이 무덤이다. 생은 우리

들의 무덤이다. 생무덤이다. <내가 원하는 천사, P. 76>

 

 그러니 삶은 때때로 비루하고, 때때로 울울하다. 울고 싶지만 울지 못하는 날들이 있을 것이고, 그 울음을 쌓아두고 막아두려는 의지와의 싸움이 반복되는 일은 습관처럼 되버리고 말았다. 김경후의 이런 시는 누군가를 울게 할지도 모른다. 아니, 울어도 괜찮다고 말한다.

 

 <코르크>

 

 울음을 참는 자의 성대는 커다랗다

 똬리 튼 뱀만큼 커다랗다

 찌그러져 일렁대는

 목 그늘을 보지 못하는 그만이

 울지 않았다고 웃음을 띠고 있다

 

 울음을 참는 자의 성대는 커다랗다

 똬리를 틀고 겨울잠 자는 뱀만큼 커다랗다

 이대로 커진다면

 곧 성대 위로 이오니아식 기둥을

 세울 수도 있으리라

 

 그는 자신에게 ‘안녕?’

 인사도 참고 있는 게 틀림없다

 미소와 웃음의 종류가 그의 인생의 메뉴

 

 울음을 참는 자의 성대는 커다랗다

 오래 참는 것이

 크게 울어버린 것이라고

 말을 건넬 수 있을까 그건

 갈라진 뱀의 혀를 깁는 것보다 위험한 일

 무엇을 그는 버려야

 그를 견디지 않을 수 있을까

 

 울음을 참는 자의 성대는 커다랗다

 꼬챙이에 찔려 죽은 줄도 모르고

 겨울잠 자는 뱀의 꿈처럼 커다랗다

 그뿐이다

 울음을 참지 않았다고 외치는

 울음을 참는 자의 성대는 커다랄 뿐이다 <열두 겹의 자정, P. 4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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