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되었고, 가뭄의 날들이다. 적당한 비는 내리지 않고 곧 장마가 시작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이 드는 저녁이다. 내일, 모레 비 소식이 있지만 얼만큼의 비가 내릴지 알 수 없다. 저마다 비를 기다리는 마음은 다를 것이다. 부디 그 마음에 맞게 비가 내려주면 좋겠다.
이은규, 허연, 김경후의 시집을 읽었고 몇 편의 시를 옮기기도 했다. 미처 전하지 못한 시들을 옮긴다. 봄보다는 바다색 여름과 어울릴 것 같은 시는 이은규의 이런 시다.
<허밍, 허밍>
종종 구름을 눈에 담는 습관, 당신의 폐활량이 천천히 부
풀 때 그날의 공기를 부러워한 적 있다 구름을 가리키며 바
람의 춤이라고 말하는 당신의 허밍은 입술에 기대는 음악일
까, 기대지 않은 음악일까
바람의 춤이 보인다면 그건 구름의 몸을 빌렸거나 폐활량
이 푸른 여름잎의 소관일 것, 구름은 바람으로 흐르고 바람
은 여름잎으로 들리니까
언젠가 고원의 사라진 호수에 대해 이야기 나눴지 수면을
맴돌던 그때의 구름은 지금 어디 있을까 가장 낮은 하늘을
흐르고 있을 호수 저편, 깃털무늬구름이거나 물결무늬구름
당신은 잠시 구름사전 속 이름들을 덮는다 구름과 노닐기
에 알맞은 바람이므로, 구름의 후렴은 음악이다 마지막 소
절이 첫 소절로 흐르는 허밍, 허밍
사라진 호수 저편
팔랑, 수면을 깨뜨리는 나비 한 점도 좋을 오후 - <다정한 호칭, p. 94>
봄에서 여름으로 흐르는 시간을 막을 수 없다. 생이란 막을 수 없는 시간 같은 것일까. 어찌하려 하지만, 어찌할 수 없는 것. 감당할 수 없다고 피하고 싶지만 결국엔 나만이 감당해야 하는 게 삶이고 생이다. 그리하여 허연은 ‘생은 선택된 적이 없다’ 고, ‘생무덤이다’ 라고 말한다.
<사라져가는 것들을 위한 나라는 없다>
생에서 포기는 어떤 좌표도 읽지 않겠다는 결의다.
생은 선택된 적이 없다. 복제된 F1 완두콩들이 생에
들어온다. 엉겹결에 생에 들어서고, 생의 한가운데
놓인다. 생은 시달리거나 포기하거나 둘 중 하나다.
깨달음이 있는 것 같지만 생판 그게 어디 쉬운 일인
가. 늘 피를 보면서도 결국 생에서는 X축과 Y축이 와
글거린다. 이래저래 도망치는 놈은 도망치느라 생으
로 숨어들고, 살아보겠다는 놈들도 생으로 걸어 들어
간다. 무기력하게 좌표 평면으로 걸어 들어간다. 한
가지 매력이 있다면 생에서는 사라져가는 걸 동정하
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라져가는 것들을 위한 나라는
다행스럽게 없다. 지금 이 생이 무덤이다. 생은 우리
들의 무덤이다. 생무덤이다. <내가 원하는 천사, P. 76>
그러니 삶은 때때로 비루하고, 때때로 울울하다. 울고 싶지만 울지 못하는 날들이 있을 것이고, 그 울음을 쌓아두고 막아두려는 의지와의 싸움이 반복되는 일은 습관처럼 되버리고 말았다. 김경후의 이런 시는 누군가를 울게 할지도 모른다. 아니, 울어도 괜찮다고 말한다.
<코르크>
울음을 참는 자의 성대는 커다랗다
똬리 튼 뱀만큼 커다랗다
찌그러져 일렁대는
목 그늘을 보지 못하는 그만이
울지 않았다고 웃음을 띠고 있다
울음을 참는 자의 성대는 커다랗다
똬리를 틀고 겨울잠 자는 뱀만큼 커다랗다
이대로 커진다면
곧 성대 위로 이오니아식 기둥을
세울 수도 있으리라
그는 자신에게 ‘안녕?’
인사도 참고 있는 게 틀림없다
미소와 웃음의 종류가 그의 인생의 메뉴
울음을 참는 자의 성대는 커다랗다
오래 참는 것이
크게 울어버린 것이라고
말을 건넬 수 있을까 그건
갈라진 뱀의 혀를 깁는 것보다 위험한 일
무엇을 그는 버려야
그를 견디지 않을 수 있을까
울음을 참는 자의 성대는 커다랗다
꼬챙이에 찔려 죽은 줄도 모르고
겨울잠 자는 뱀의 꿈처럼 커다랗다
그뿐이다
울음을 참지 않았다고 외치는
울음을 참는 자의 성대는 커다랄 뿐이다 <열두 겹의 자정, P. 42~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