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인문학 - 어울림의 무늬, 혹은 어긋남의 흔적
김영민 지음 / 글항아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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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문人文은 인문人紋인데, 말 그대로 ‘사람의 무늬’를 뜻한다. 그래서 인문학은 인간의 무늬를 살피고 헤아리는 공부인 셈이고, 마찬가지로 인문학의 진리란 인간의 무늬와 동떨어진 것이 아니다. 설렁설렁 말하자면, 인간의 무늬 속에 진리의 조건을 두게 되면서 철학적 근대가 열린다. 그런데 인문학적 진리의 조건을 이루는 인간의 무늬는 조개껍질처럼 단순한 게 아니라 겹/층을 이루고 있다. 겉무늬가 있는가 하면 속무늬도 있는 것이다.’ p 42

 몇 번을 읽더라도 좋으니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내게는 어려운 글이었다. 영화인문학이라는 제목에 걸맞게 영화를 통해 김영민 교수의 철학적 해석을 들을 수 있다는 것에 기대가 컸다. 그가 선택한 한국인의 정서와 역사를 잘 살려 낸 한국 영화 27편을 만나는 시간은 얼마큼 이해했냐를 떠나서 즐거운 것이었다. 특히 내가 좋아하는 영화를 떠올려 다시 그 감동을 느끼고, 제목은 익숙하지만 내용은 전혀 알지 못하는 앞 선 세대의 흑백 영화를 만나는 것도 생경하지만, 즐거운 경험이었다.

 인문학에 무지한 내가 인간 본연과 그 너머의 ‘어떤 것’을 알려고 하면 무리인 것을 알기에, 그저 우리 삶의 단면을 영화를 통해 만나는 것을 족해야 했다.  <여자, 정헤>로 잘 알려진 이윤기 감독의 <아주 특별한 손님>은 일본 작가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영화를 먼저 보고 원작도 만나게 되었는데, 나는 영화가 훨신 느낌이 좋았다. 주인공 보경은 명은이라는 사람과 닮았다는 이유로 명은의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달라는 부탁을 받고 낯선 이들과 낯선 곳으로 동행하게 된다. 그곳에서 자신을 통해 명은을 보는 사람들의 시선에 보경은 타인으로 선 자신을 보게 된다.  

 보경의 등장으로 곧 장례를 준비하게 될 명은의 집은 들썩이게 되고 그 과정에서 보경은 명은이라는 사람에 대해 생각한다.  저자 김영민은 <아주 특별한 손님>은 ‘자아는 종종 타인을 통해 바뀐다는 소식, 거꾸로 나는 영영 스스로 바뀔 수 없다는 상식을 다시 일깨운다. 타인은 템포다. 인문학 공부의 실천은 그 템포에 응하는 응접의 방식에서 시작되며, 그 템포를 놓치는 자아는 나르시스트와 에고이스트 사이를 우왕자왕하게 된다. 너무 빨리 다가서는 타자는 귀신이거나 괴수이고, 기다려도 오지 않는 타자는 메시아가 된다.’p 36 라고 말했다.  타인이라는 거울을 통해 나를 볼 수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이어졌다. 

 이병헌의 연기가 돋보였던 <달콤한 인생> 속 보스와 선우는 서로를 믿고 의지했지만, 결국 서로에게 총을 겨눈는 부분에 대해 말한다. 조폭 영화, 명령 - 복종의 수직적 관계지만, 인간대 인간으로 마주했을 때 동시에 서로를 죽여야하는 이유를 알고 싶어했지만, ‘진짜 이유’를 말하지 못한다. 보스의 여인을 품었기에, 죽이려 했을까.  오히려 상대를 죽일 수 있는 힘은 ‘진짜 이유’를 모른다는 것이며, 그것을 강박적으로 찾으려는 애착 속에서 오히려 그 진짜 이유를 밀어낸다는 것이라, 설명은 이해하기 어렵다.  다만, ‘호감이 관계를 구제할 수 없는 곳, 바로 그곳이 우리의 세속입니다.’p 71 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관계의 시작은 때로 아주 사소한 호감에서 시작하지만, 관계를 지속하거나 구제할 수는 없는 것이다. 

 죽음을 기다리는 삶이 되버린 일상을 담담하게 그린 <8월의 크리스마스>를 글로 다시 만나니, 정원의 죽음을 알지 못하는 다림이 사진관 앞에서 그를 원망하는 모습이 떠오른다. 사진이 갖는 의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부재한 모든 것은 사진으로 담을 수 있으며, 사진 속에서 영원할 수 있다. 짧은 생을 살다가 영화처럼 떠난 영화배우 고 장진영의 환한 미소가 눈에 아른거린다.

 익숙한 제목이지만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영자의 전성시대>는 예상했던 유쾌한 영화가 아니었다.  1970년대 서울로 상경했던 우리 모두의 언니이자 누나였던 많은 영자들, 그들의 고달픈 삶과 사랑이 슬펐다. 식모로 버스 차장으로 결국, 강간당하고, 팔까지사고로 잃게 된 영자에게 철공소 직원인 창수의 사랑은 지고지순 그 자체였다. 그러나 두 청춘은 사랑이 주는 또 다른 모습인 상처를 보지 못햇던 것이다. 오직, 그들보다 더 앞서 삶을 살아온 김씨만이 앞날을 예견할 수 있었기에 그들의 사랑을 반대한다.   ‘상처받은 자들의 사랑은 그 상처를 보듬고 어루만져가면서 더불어 이루는 호혜의 합작合作이 아니라 그 상처를 덧나게 하고 강박적으로 반복하고 그에 대한 턱없는 비용과 대가를 요구하는 어리석음의 고독인 것이다. ’p 300   한편으로 그들의 화합을 원했지만, 저자의 말처럼 현실은 사랑이 아닌 상처가 더 부각된다는 것을 안다.

 가족에 대해 새롭게, 아니 근본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진 <가족의 탄생>이나 <바람난 가족>, 조선 시대 여인의 삶을 그린 <자녀목>도 특히 인상적이었다.  많은 영화들 중에 선택되어진 27편의 영화만이 인간의 무늬(人紋)를 가장 잘 드러낸 것은 아닐 것이다. 저자가 아쉬워했던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통해선 어떤 인간의 흔적을 말했을까, 궁금하다. 

 점점 쇠퇴하고 있다는 인문학, 어렵다는 선입견을 버리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인간을 다루는 문학, 인간이 존재하는 한 어디서나 인문학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인문학에 대한 호기심이 있다면,  장미와 주판 를 만나봐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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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독서
김경욱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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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상깊었던 드라마의 원작을 보면 김경욱이 많았다. 무척 독특한 소재를 그는 평범하게 풀어내곤 했다. 세련되고 깔끔한 문장과 많은 소설을 써낸 이유로 소설가 김연수와 종종 비교가 되는 것으로 안다. 무척 유려한 문장으로 기억되는 김연수의 자전적 소설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와 <위험한 독서>를 나는 같은 느낌으로 읽었다. 

 독특한 상황 설정의 단편 <위험한 독서>는 책으로 책을 말한다. 책을 권하는 사회가 아니라, 직업적으로 책을 권하는 한 남자, 그는 독서치료사다.  울적하고, 의기소했던 한 여자가 독서치료사를 찾아오면서 독자는 은밀한 로맨스를 기대한다.  위험한 독서는 <베티를 만나러 가다>를 떠올렸다. 상대가 읽은 책을 통해 어떤 사람일 꺼라 짐작하려는 행위와 같다.

 그것은 일종의 관음증과 비슷했다. 남자는 자신을 찾아온 여자가 자신의 바람대로 변화하기를 기다렸는지 모른다.  ‘
독서를 통해 당신이 발견해야 하는 것은 교모하게 감추어진 저자의 개인사나 메시지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포장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바로 당신 자신이니까.’ p 16 독서를 통해 자신을 발견하라 했지만, 정말 김경욱도 그러길 바랄까? 

 김경욱은 개인적인 이야기를 공동의 이야기로 이끌어 내는 재주를 가졌다.
<황홀한 사춘기>, <공중관람차 타는 여자>,<고독을 빌려 드립니다>를 차례대로 읽노라면, 70년대 출신은 모두 추억에 빠져들고 만다. 올림픽 경기가 치뤄지던 88년 재수생이었던 <황홀한 사춘기>속 주인공을 통해 88년 그 해 가을, 송편을 빚던 나를 떠올렸고, 조건을 따져 결혼했지만 행복하다고 자신할 수 없는 <공중관람차 타는 여자> 수진은 다시 한 번 성장통을 앓는 듯 하다. 


 어디, 여자뿐이겠는가. 한 가정의 가장이 된 남자도 마찬가지다. 평범한 삶을 살고 있지만, 뭔가 찾고 싶은 이 시대의 가장들의 외로움은 <고독을 빌려 드립니다> 에 드러난다. 그러나 김경욱은 절제하고 조율할 줄 안다. 소설을 통해서 잠시 일탈을 꿈꾸게 하지만 현실을 잊지 말라고 ‘세월이 수진에게 남긴 건 공중관람차에서 곱씹을 추억과 추억을 떠올리며 울 수 있는 자유뿐이었다. p 164,  균형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속도를 일정하게 유지해야 했다.’ p 196 과 같은 문장으로 슬그머니 압력 아닌 압력을 넣는다. 

 
김경욱만이 쓸 수 있는 섬뜩한 위트도 발견할 수 있다. <달팽이를 삼킨 사나이>,나 <천년여왕> 같은 소설이 내겐 그러했다. 무턱대고 글을 쓰겠다고 모든 것을 버리고 시골에서 전원생활을 결정하는 남편에겐 요술 방망이라도 숨겨둔 듯한 아내의 이야기<천년여왕>.  전세 자금을 위해 대리모가 되겠다는 아내를 저지할 수 없는 실업자 남편의 삶은 달팽이를 삼킨 것 처럼 어찌할 바를 모르는 상황을 그린 소설. 쌍둥이를 잉태한 아내가 변화하는 과정은 섬뜩하면서도 무척 흥미롭다.  어떤 해결책을 제시할 수 없는 대리모 문제는 놀랍게 번식하는 달팽이로 비유했다면 맞을까.

 무척 매력적인 소설집이었다. 은밀하고 매혹적인 제목의 <위험한 독서>는 김경욱이었다.  소설을 통해 자신을 읽어보라고 과감하게 말하고 있다. 자신을 드러내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리하여, 독자와 더 가까이 소통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아니, 책을 읽는 즐거움을 많은 이가 느껴주기를 바랐는지 모른다.

 그가 말한대로 ‘위험한 독서’인 양 은밀하게 읽었다. 또한 그가 말하는 대로 ‘모든 게 책으로 보이는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어. 희망도 절망도 없이 매일 조금씩 읽는다. 희망에 들뜨지 않고 절망에 굴하지 않고.’ 매일 조금씩 책을 읽으련다. 욕심내지 말고, 읽지 못한 책들이 많다고, 절망하지도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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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 번지점프를 하다
우애령 외 지음 / 글빛(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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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이든, 어떤 책이든 작가의 약력을 보게 된다. 일부러 주의 깊게 살펴보지는 않지만, 독자라면 작가에 대해 좀 더 알고 싶기 마련이 아닐까 싶다. 세대가 비슷한 작가의 작품에서는 공감할 수 있는 것들이 많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유행했던 노래나 패션을 소설 속에서 만나기라도 하면 얼마나 반가운가. 혈연 지연 문화가 강한 우리 사회, 작가들에게도 같은 이유가 있었나 보다. 그런 이유로,  이화여대 출신의 12작가가 이화와 청춘을 테마로 소설집을 냈다. 이화와는 관련이 없지만, 청춘은 누구에게나 설레는 단어가 아니던가. 

 12명 중 정미경, 권지예, 김다은, 함정임, 배수아, 오현종 작가를 뺀 나머지 작가는 내게는 생경한 작가다. 소설은 자연스럽거나 의도적으로 이화여대를 배경으로 했다.  각기 다른 세대로 묘사되는 소설 속 이화여대의 모습을 만나는 점이 흥미롭다.  

 좋아하는 작가인 정미경의 소설부터 먼저 읽었다. 소설집의 제목과 같은 <번지점프를 하다>는 청춘을 그렸다. 주인공 하은의 주변에는 두 남자가 있다. 남자친구 강은 가난한 대학생이며, 아르바이트 사업체의 사장인 박은 재력가이다. 강은 하은을 사랑하지만 초라한 자신을 온전히 보여주고 싶어하지 않는다. 언제나 멋지게 인생 상담을 해주지만, 외로운 사람임을 하은은 안다. 치매에 걸린 할머니를 곁에서 돌보기 위해 더나는 강과 함께 번지점프를 한다.  ‘강과 나, 두개의 심장만이 남는다. 발목을 묶은 끈이 중력에 저항하여 온몸을 잡아채기 전, 나는 강의 등을 더 세게 끌어안았다.’ p 161  식상한 소재처럼 보이지만, 청춘이기에 젊음이기에 아름답다. 

 초등학교 6학년 딸이 화자로 소설을 이끌어 가는 고은주의 <그곳에 가면>에서 그곳은 이화여대를 지칭한다.  모교 근처로 이사를 온 엄마는 종종 모교를 산책하며 그 시절을 추억한다. 열정적인 그때와 달리 전업주부를 선택한 자신의 선택이 옳은 선택이었는지 자문한다. 이런 엄마의 모습과 초경을 시작한 딸의 모습이 대조적이면서도 같은 여자라는 동질감을 잘 표현한 소설이다.

 “나처럼 살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나처럼 이 학교를 다니기를 원하는 게 모순처럼 느껴지겠지. 하지만, 네가 나처럼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자의식이야말로 이 학교가 내게 준 선물이야. 끝없이 스스로를 돌아보면서 채찍질하게 만드는 힘을 나는 여기서 얻었거든. 그러니까 너도 나처럼 여기서 많은 걸 얻었으면 좋겠어. 나처럼 후회하는 길을 선택하지만 않으면 돼. 아니, 어떤 길을 가든 자의식을 잃지 않고 당당하지만 하면 돼.”p 315

 이 말은 세상 모든 엄마가 모든 딸들에게 하는 말이다. 결혼과 동시에 느껴지는 육아에 대한 부담, 일과 가사에 대한 책임감이 왜 여성에게만 더 무거운 것일까? 

 바다로 뛰어들어 죽음을 맞이하는 소설가의 이야기인 권지예의 <딥 블루 블랙>과 소설을 쓰고 싶어했던 헤어진 남자친구 K대신 소설가가 되어 지난 시절을 회상하는 소설 오현종의 <k의 어머니와 면회를 갔다>는 소설가인 작가의모습도 엿볼 수 있다. 화려함으로 치장하고 자가용을 몰고 다니는 여대생들 속에서 아르바이트를 해야만 하는 학생을 보여준 권리의 <정박>은 대학 사회를 현실적으로 묘사한 씁쓸한 소설이었다.

 소설은 청춘을 기억하게 한다. 분명 불안했던 시절이었고 모든 것에 서툴러 상처가 있었음에도 뜨거운 열정의 한 컷으로 각인된다. ‘우리들이 어서 빨리 스무 살이 되고 싶어하듯 엄마는 다시 뒷걸음질 쳐서 스무 살이 되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청춘은 아마도 스무 살 언저리에 존재하는 모양이었다.’ p 297  나도 그랬다. 스무 살이 되기 전 스무 살은 모든 것을 해결해 줄 듯 했다. 스무 살, 프르스름한 불투명한 느낌.  다른 빛으로 변화할 수 있고, 다른 무엇으로 태어날 수 있다고 믿었던 시절이었다.  여전하게 가슴 속 한 자리에 생생한 그 느낌이 삶을 지탱하는 한 부분이 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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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딴방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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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 일곱이 되던 해, 엄마와 처음 단 둘이서 여관에 누웠다. 아주 작은 방이었고, 온돌이었다. 4시간을 서서 시외버스를 타고 도착한 생경한 곳에서 엄마도 나도 긴장하고 있었다.  추웠던 기억은 없고, 엄마의 깊은 한 숨 소리만 기억에 남는다. 열 일곱의 나는 좀 더 넓은 세상을 꿈꿨고, 엄마는 내 고집에 못이기는 척 져주었다. 

 고등학교 입학을 앞둔 내게 해장국 비슷한 것을 하나만 시켜 놓고 엄마는 말했다. 자취방을 얻지 못하면 그냥 내려가는 거라고. 맛 없는 밥을 젓가락으로 헤져으며 고개만 끄덕였던가. 아니, 엄마는 말뿐이며, 꼭 자취방을 구해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나이의 곱절의 시간이 훨씬 지났고, 엄마는 이제 내 곁에 존재하지 않는다. 집을 떠나야 했던 이유는 달랐지만, 외딴방 열 여섯 소녀를 만나는 내내 가슴이 아팠다. 아니다, 그 이유 때문이 아니다.  자전적 소설인 외딴방에 등장하던 엄마는 여전하게 살아 있는데,  나에게는 엄마라 부를 수 있는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열 여섯, 작가가 되고 싶었던 소녀는 작가가 되었고, 그 무언가가 되고 싶었던 나는 여전하게 그 무언가를 동경한다. 내게 주어진 방은 주인집 거실을 돌아 계단을 터고 옥상으로 열린 문을 열면 만나는 작은 옥탑방이었다. 우연하게 집을 구하다 처음 만난 S와 고등학교 졸업까지 3년을 살았고, 대학에 입학을 하고도 몇 달을 혼자 더 살았다. 물론 내가 살았던 시대는 소설 속 열 여섯의 소녀와는 다르다. 그 시절에도 산업체라 해서 야간 학교가 있었지만 가난보다는 다른 이유가 더 컸다.  

 그러나 소설을 통해 나를 보는 것은 감성적인 것이다. 표정이 많지 않았던 시절, 밥 물을 맞추지 못했던 나, 한꺼번에 너무 많이 밥을 해서 노랗게 색이 변할 때까지의 밥으로 도시락을 쌓고, 야간 자율학습이 끝난 밤 조심조심 설거지를 했던 시간이었다. 외사촌과 번갈아 밥을 했던 것 처럼 S와 밥을 나누어서 했다. 공부에 대한 열정도 조금씩 사그라들었고, 내 지식의 크키는 곧 바닥을 드러냈다. 꼭 학교를 가야 했던, 그래서 작가 되어야 했던 열 여섯의 소녀의 모습을 보면서 부끄러웠고, 부스스한 퍼머 머리에 낡은 외출복 뿐이었던 엄마에게 참 못된 딸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아마도 외딴방은  지금 쪽방촌이라 불리는 곳이었을 것이다. 열 여섯에서 시작해 열아홉 까지 살았던 그 공간을 잊고 싶었던 것은 그 시절을 함께했던 사람들에 대한 아픔 이었을 것이다. 1980년대의 산업 현장을 나는 잘 알지 못한다. 노조에 가입하면 가고 싶었던 학교를 가지 못했던 그 시절, 어린 소녀가 회사를 얼마나 두려워했고, 직장 동료인 노조원에게 얼마나 미안한 마음을 가졌을지 온전하게  이해할 수 없다.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을 필사하며 소녀가 무슨 생각을 했을지도 짐작 할 수 없다. 유명한 소설가가 되어 그 시절의 지인들은 그저 반가운 마음에 연락을 취하고 쏟아지는 관심이 부담스러워 또 하나의 외땅반으로 숨어버린 그 마음을 알지 못한다. 다만, 혼자이고 싶은 순간이 있다는 것을 알 뿐이다. 오로지 나 혼자만 숨쉬고 싶은 순간을 경험했다는 것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녀에게 소설은 무엇 이었을까? 살아갈 수 있는 숨 쉴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소설에서 더 많이 웃고, 더 많이 아파하고, 더 많은 눈물을 흘리며 나 아닌 다른 이로 살고 싶었는지 모른다. 신경숙은 현재와 과거를 넘나들며 글쓰기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자신이 쓰고 있는 소설이 갖는 의미, 소설을 통해 딱지가 내려 앉지 않은 상처에 딱딱한 딱지가 들어앉아 나아지기를 바랐을 것이다. 

 파업이 일어나고, 임금이 체불되고, 동료가 떠나고, 데모에 참여했던 오빠가 다치고, 학교를 떠날 수 밖에 없던 사람들 속에 대학이 가고 싶어 학원으로 학교로 바쁜던 자신이 때론 밉고 싫었을 것이다. 무엇이 되고 싶었던 시절, 그 무엇을 위해 자신을 다독였고, 꿈을 향한 걸음이라 여기며 참아왔던 시간들. 그러나  소설 속 소녀가 사랑했던 희재 언니의 죽음은 어떤 이유로도 합리화 될 수 없고, 자신의 행동을 용서할 수 없는 것이었다. 설령, 그것이 희재 언니의 운명이고 선택이었다 해도 소녀는 자신을 놓아주지 않는 그림자와 평생 함께 살아갈지도 모른다.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순간을 끄집어 내어 글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이 태어나게 하는 과정이 그녀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소설이니까 하며 살을 붙였다가 다시 떼어내기를 반복하며 그 시간 내내 열 여섯의 소녀로 살았을 그녀를 만나는게 아프다. 고단한 삶을 살았을 그녀가, 편안 자세로 잠들지 못하는 그녀가, 희재 언니의 목소리를 듣는 그녀가 아프다.

 그 시절, 권력이란 이름으로 약자의 삶을 농락한 그들에게 화가 난다. 그저 웃고 싶었고, 그저 공부하고 싶었고, 그저 합당한 권리를 누리고 싶었을 뿐인데. 2009년, 지금은 어떤가? 여전하게 공권력은 시민앞에 겁을 주고, 여전하게 외딴방이 존재한다. 외딴방이 아니더라도, 열 여섯의 소녀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슬프다. 

 신경숙의 소설은 슬퍼서 때로 주저하게 된다. 눈물을 삼키케 하고 가슴에 바람의 길을 만든다. <외딴방>은 <엄마를 부탁해>와 나란하게 고백의 글이다. 해서 더 슬프다. 소설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었지만, 그녀의 삶이라서 더 슬프고, 우리들의 삶이라 더 아프다. 열 일곱, 그 겨울을 생각한다. 점점 더 희미해지는 엄마의 슬픈 표정을, 마흔을 바라보는 내가 닮아가고 있다. 내가 동경하는 그 무언가를 다시 꿈꿀 수 있는 나만의 외딴방을 향한 걸음을 내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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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비 독살사건 - 여왕을 꿈꾸었던 비범한 여성들의 비극적인 이야기
윤정란 지음 / 다산초당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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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왕조실록’이라는 드라마를 통해 만난 왕비들은 대부분 후궁을 질투하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아무리 왕비라 해도 여색을 밝히는 남편을 이해할 여자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 왕비가 행했던 업적도 분명 있을텐데 역사속 왕비에 대한 평가는 아주 미비했다. 최근 들어 왕비나 왕세자에 대한 새로운 평가들이 나오고 있지만, 남존여비 사상이 강했던 조선 시대를 생각하면 역사가 기록한 사실을 얼마나 믿을 수 있을까 싶기도 하다.  

 왕비 역시 권력의 중심이었으니 반대 세력도  많이 있었을 것이다. 특히 후궁이라는 제도가 있었던 조선 시대 왕비의 자리는 영원한 것이 아니었다. 남편인 왕이 죽고 난 후, 아들을 낳지 못한 왕비의 권위는 이름뿐이었다. 그나마 아들이 있었다 해도 그 아들을 지켜내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이런 이유로, 많은 왕비들이 외척의 힘을 키우고자 했을 것이다. 

 책은 역대 왕비중 정치적으로 이용당했던 7명 왕비의 죽음에 대해 말하고 있다. 엄격한 자녀 교육으로 폭빈(暴嬪)이라 불렸던 소혜왕후 한씨, 연산군의 생모 윤씨, 선조왕의 왕비가 되고 영창대군까지 낳았지만, 기구한 삶을 산 인목왕후 김씨, 폭군이었던 남편 광해군과 같은 운명을 지녔던 유씨,  인조의 며느리인 소현세자빈 강씨, 뛰어난 미색을 자랑한 숙종의 후궁이었던 희빈 장씨, 시아버지 흥선 대원군과 첨예하게 대립했고 일본군에서 암살당한 민씨.  이들은 과연 책의 제목처럼 독살당했을까? 

 왕비나 세자빈으로 간택된 그들은 분명 명민했을 것이다. 그러나 시대의 운을 타고 나지 못한 여성들이었는지 모른다. 남존여비 사상이 있던 조선이라는 작은 나라가 아니었다면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며 살았을 것이다.  점술을 빌어 인현왕후를 죽이려 했던 희대의 요부라 불리는 희빈 장씨. 그러나 사대부 출신이 아니었던 그녀가 자신의 집안 사람들인 중인에게 벼슬을 주었던 것은 조선 시대 신분 제도의 불합리성을 말한다 할 수 있다.  

 청나라에 볼모로 있다가 조선으로 돌아와 원인 모를 죽음을 당한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씨도 조선이 학문인 성리학이 아닌 새로운 학문을 도입하려 했다. 그러나 부모인 인조는 조선이 아닌 자신의 안위만 걱정하여 결국 아들과 며느리와 손자까지 죽게 하고 말았다. 만약, 소현세자가 왕위에 올랐다면 청에서 사무역에 직접 뛰어들었던 세자빈 강씨로 인해 다른 나라와의 무역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을 것이다. 

 일본에게 암살당한 조선의 마지막 왕비인 민씨는 최근에 가장 많이 회자되며 그 평가도 다양하다. 흥선 대원군의 쇄국 정책에 반하여 여러 나라의 문물을 수용했기에 외국 사절들은 뛰어난 정치력을 극찬하고 있다.  그러나 개항 후 백성들을 돌보지 않았던 국모라는 평도 있다. 거론된 왕비들은 아내도, 어머니도 아닌 왕비였기에 정치적으로 이용당했고, 죽음을 맞아야 했다.

 조선 시대 여성으로써 최고의 자리에 올랐던 왕비들. 화려한 의복 속에
감춰진 그들의 생활은 화려함이 전부가 아니었다. 우아한 백조처럼 그들도 겉으로는 위엄을 지켜야 했지만, 속으로는 왕의 사랑과 자신의 아들을 위해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도 없었다. 암투가 끊이지 않았던 왕비라는 자리에 그들은  평범한 촌부(村婦)보다 얼마나 행복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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