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인문학 - 어울림의 무늬, 혹은 어긋남의 흔적
김영민 지음 / 글항아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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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문人文은 인문人紋인데, 말 그대로 ‘사람의 무늬’를 뜻한다. 그래서 인문학은 인간의 무늬를 살피고 헤아리는 공부인 셈이고, 마찬가지로 인문학의 진리란 인간의 무늬와 동떨어진 것이 아니다. 설렁설렁 말하자면, 인간의 무늬 속에 진리의 조건을 두게 되면서 철학적 근대가 열린다. 그런데 인문학적 진리의 조건을 이루는 인간의 무늬는 조개껍질처럼 단순한 게 아니라 겹/층을 이루고 있다. 겉무늬가 있는가 하면 속무늬도 있는 것이다.’ p 42

 몇 번을 읽더라도 좋으니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내게는 어려운 글이었다. 영화인문학이라는 제목에 걸맞게 영화를 통해 김영민 교수의 철학적 해석을 들을 수 있다는 것에 기대가 컸다. 그가 선택한 한국인의 정서와 역사를 잘 살려 낸 한국 영화 27편을 만나는 시간은 얼마큼 이해했냐를 떠나서 즐거운 것이었다. 특히 내가 좋아하는 영화를 떠올려 다시 그 감동을 느끼고, 제목은 익숙하지만 내용은 전혀 알지 못하는 앞 선 세대의 흑백 영화를 만나는 것도 생경하지만, 즐거운 경험이었다.

 인문학에 무지한 내가 인간 본연과 그 너머의 ‘어떤 것’을 알려고 하면 무리인 것을 알기에, 그저 우리 삶의 단면을 영화를 통해 만나는 것을 족해야 했다.  <여자, 정헤>로 잘 알려진 이윤기 감독의 <아주 특별한 손님>은 일본 작가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영화를 먼저 보고 원작도 만나게 되었는데, 나는 영화가 훨신 느낌이 좋았다. 주인공 보경은 명은이라는 사람과 닮았다는 이유로 명은의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달라는 부탁을 받고 낯선 이들과 낯선 곳으로 동행하게 된다. 그곳에서 자신을 통해 명은을 보는 사람들의 시선에 보경은 타인으로 선 자신을 보게 된다.  

 보경의 등장으로 곧 장례를 준비하게 될 명은의 집은 들썩이게 되고 그 과정에서 보경은 명은이라는 사람에 대해 생각한다.  저자 김영민은 <아주 특별한 손님>은 ‘자아는 종종 타인을 통해 바뀐다는 소식, 거꾸로 나는 영영 스스로 바뀔 수 없다는 상식을 다시 일깨운다. 타인은 템포다. 인문학 공부의 실천은 그 템포에 응하는 응접의 방식에서 시작되며, 그 템포를 놓치는 자아는 나르시스트와 에고이스트 사이를 우왕자왕하게 된다. 너무 빨리 다가서는 타자는 귀신이거나 괴수이고, 기다려도 오지 않는 타자는 메시아가 된다.’p 36 라고 말했다.  타인이라는 거울을 통해 나를 볼 수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이어졌다. 

 이병헌의 연기가 돋보였던 <달콤한 인생> 속 보스와 선우는 서로를 믿고 의지했지만, 결국 서로에게 총을 겨눈는 부분에 대해 말한다. 조폭 영화, 명령 - 복종의 수직적 관계지만, 인간대 인간으로 마주했을 때 동시에 서로를 죽여야하는 이유를 알고 싶어했지만, ‘진짜 이유’를 말하지 못한다. 보스의 여인을 품었기에, 죽이려 했을까.  오히려 상대를 죽일 수 있는 힘은 ‘진짜 이유’를 모른다는 것이며, 그것을 강박적으로 찾으려는 애착 속에서 오히려 그 진짜 이유를 밀어낸다는 것이라, 설명은 이해하기 어렵다.  다만, ‘호감이 관계를 구제할 수 없는 곳, 바로 그곳이 우리의 세속입니다.’p 71 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관계의 시작은 때로 아주 사소한 호감에서 시작하지만, 관계를 지속하거나 구제할 수는 없는 것이다. 

 죽음을 기다리는 삶이 되버린 일상을 담담하게 그린 <8월의 크리스마스>를 글로 다시 만나니, 정원의 죽음을 알지 못하는 다림이 사진관 앞에서 그를 원망하는 모습이 떠오른다. 사진이 갖는 의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부재한 모든 것은 사진으로 담을 수 있으며, 사진 속에서 영원할 수 있다. 짧은 생을 살다가 영화처럼 떠난 영화배우 고 장진영의 환한 미소가 눈에 아른거린다.

 익숙한 제목이지만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영자의 전성시대>는 예상했던 유쾌한 영화가 아니었다.  1970년대 서울로 상경했던 우리 모두의 언니이자 누나였던 많은 영자들, 그들의 고달픈 삶과 사랑이 슬펐다. 식모로 버스 차장으로 결국, 강간당하고, 팔까지사고로 잃게 된 영자에게 철공소 직원인 창수의 사랑은 지고지순 그 자체였다. 그러나 두 청춘은 사랑이 주는 또 다른 모습인 상처를 보지 못햇던 것이다. 오직, 그들보다 더 앞서 삶을 살아온 김씨만이 앞날을 예견할 수 있었기에 그들의 사랑을 반대한다.   ‘상처받은 자들의 사랑은 그 상처를 보듬고 어루만져가면서 더불어 이루는 호혜의 합작合作이 아니라 그 상처를 덧나게 하고 강박적으로 반복하고 그에 대한 턱없는 비용과 대가를 요구하는 어리석음의 고독인 것이다. ’p 300   한편으로 그들의 화합을 원했지만, 저자의 말처럼 현실은 사랑이 아닌 상처가 더 부각된다는 것을 안다.

 가족에 대해 새롭게, 아니 근본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진 <가족의 탄생>이나 <바람난 가족>, 조선 시대 여인의 삶을 그린 <자녀목>도 특히 인상적이었다.  많은 영화들 중에 선택되어진 27편의 영화만이 인간의 무늬(人紋)를 가장 잘 드러낸 것은 아닐 것이다. 저자가 아쉬워했던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통해선 어떤 인간의 흔적을 말했을까, 궁금하다. 

 점점 쇠퇴하고 있다는 인문학, 어렵다는 선입견을 버리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인간을 다루는 문학, 인간이 존재하는 한 어디서나 인문학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인문학에 대한 호기심이 있다면,  장미와 주판 를 만나봐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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