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빨강 - 제11회 사계절문학상 대상 수상작 ㅣ 사계절 1318 문고 87
김선희 지음 / 사계절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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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느끼는 맛에는 매운맛만 있는 게 아니다. 쓴맛도 있고 신맛도 있고 떫은 맛, 단맛, 짠맛도 있다. 우리가 표현하지 못하는 맛들도 있다. 시큼털털한 맛이라든가, 달콤짭짜름한 맛, 매콤씁쓰레한 맛. 삶은 여러 가지 맛의 변형이다.’ 205~206쪽

 

 비교적 수월하게 사춘기를 보냈다. 그럼에도 그 시절의 나는 엄마의 마음을 아프게 한 딸이었다. 괜히 툴툴대고 차려 놓은 밥도 일부러 먹지 않고 그냥 학교에 갔다. 집보다는 학교가 더 좋았고, 칭찬이 인색한 엄마보다는 선생님이 더 편했다. 그 시절을 지금을 비교하는 건 적절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이성과 외모에 관심이며 갑자기 변화하는 몸을 받아들이는 마음은 아이들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정체를 확인할 수 없는 감정들을 다스리기도 버거운 상태인데 집안 상황까지 나쁘다면 감당할 수 있을까? 삐뚤어 질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의 주인공 열여덟 살 동이는 자신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동이는 사고로 일곱 살 아이로 변해버린 아버지를 생계를 위해 닭집을 운영하는 엄마와 취업 준비로 항상 화가 나 있는 형을 대신해 돌봐야 한다. 사고 전 권위적이고 폭력적이었던 아버지가 아닌 자신을 작은 형이라 부르며 사고를 치는 동생 같은 아버지를 씻기고 먹이는 일은 동이의 몫이었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착한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보통의 청소년 소설과 다르게 심각한 학교 폭력나 왕따, 입시 위주의 학교에 대한 이야기를 중점적으로 다루지 않고 스트레스를 야동을 보는 것으로 해결하는 성에 대한 왕성한 호기심의 소년 동이와 무서운 집착에 가깝게 매운 맛을 좋아하는 소녀 미령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려준다. 동이는 친구 희우를 통해 미령이 운영하게 카페 ‘더 빨강’에 가입한다. 매운 걸 잘 먹지도 못하면서 미령과 친해지고 싶어 정모에 나간다. 아이들은 모두 매운 음식을 신나게 먹는다. 하지만 동이는 그런 분위기가 낯설기만 하다.

 

 “매운 걸 좋아하는 데는 저마다 이유가 있을 거야. 어떤 사람은 그냥 좋아서 먹을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스트레스가 쌓이거나 욕구 불만일 때 먹을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삶이 재미없고 시시하게 느껴질 때 매운 걸 먹고 정신이 번쩍 들 수도 있고.” 43쪽

 

 동이와 미령은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동이는 아버지를 돌보고 치킨 배달을 하는 육체적인 고통과 집 재건축 보상금을 주식 투자로 날리고 빚을 남기고 사라진 형 때문에 걱정하는 엄마를 지켜봐야만 했다. 미령은 어린 시절 유괴 당했던 상처 때문에 힘들었다. 미령이 만든 매운 맛 카페가 자살 카페라는 소문이 돌며 자살 여행을 계획한다는 걸 듣고 동이는 미령에게 자신의 아버지의 이야기를 꺼낸다. 동이는 달라진 아버지를 통해 잊고 있었던 어린 시절 아버지와의 추억을 떠올리며 가족에 대해 생각한다.

 

 어떻게든 미령을 말리고 싶었던 동이는 여행에 합류한다. 여수에 도착한 미령과 친구들은 각자 준비해 온 재료로 매운 음식을 요리하고 먹을 준비를 한다. 긴장한 동이는 먹지 말라고 살아야 한다고 소리친다. 미령은 단순하게 매운 맛 대결을 위한 여행이라는 걸 확인시킨 후 동이에게 유괴 이야기를 한다. 유괴 후 자신을 향한 시선 때문에 외로웠던 시간과 매운 걸 좋아하게 된 이유를 말한다.

 

 “어느 날 멋모르고 매운 고추를 먹었는데 왠지 모르지만 확 당기는 거야. 지루하게 걷고 있는데 누가 발을 거는 느낌? 그때 정신이 번쩍 들더라. 내가 살아 있다는 걸 강렬하게 느낄 수 있었어. 그냥 걷는 건 재미없잖아. 누가 발도 걸어주고 뺨도 때려 주고, 그래야 내가 살아 있다는 걸 느끼지. 또 살아야겠다는 전투력도 생기고. 너희는 나하고 다른 이유로 매운 걸 먹겠지만, 어쨌든 우리는 살아 있기 위해서 매운 걸 먹는다는 공통점이 있잖아.” 191~192쪽

 

 미령은 통증처럼 밀려오는 매운 맛을 통해 살아 있다는 걸 느꼈던 거다. 저마다의 이유로 매운 걸 좋아하지만 살아 있기 위해서 매운 걸 먹는 건 같았다. 그래, 살아 있다는 게 중요한 것이다. 평생 일곱 살로 사는 아버지, 갚아야 할 빚으로 고생해야 할 엄마,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형이지만 가족이고 살아 있으니 괜찮다.

 

 사는 동안, 동이가 맛보게 될 맛은 무한할 것이다. 그 맛을 다 맛보는 게 삶일 것이다. 빨강으로 기억될 열여덟을 지나 다양한 색으로 마주할 수많은 동이와 미령의 인생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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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은 깊어가고 아침은 느리게 온다. 가장 춥다는 아침을 맞았다. 이제 점점 추워지는 날들만 남은 것일까. 찐 고구마를 먹는 날들이 많아졌다. 이유는 밥이 먹기 싫어서다. 고구마와 커피, 스카프를 두르는 아침, 열어 놓은 창문을 통해 날카로운 바람의 움직임이 들려온다.

 

 어제는 계획적이면서 충동적인 한 권의 책을 주문했고, 리스트는 우선은, 갖고 싶은 책이다. 『1913 세기의 여름』은 소설이라고 생각했다. 100년 전의 여름, 우리가 알고 있다고 믿는 여름이 존재하는 책일까. 여하튼 갖고 싶다. 하성란의 웃는 얼굴을 표지로 쓴 황순원 문학상 수상작품집 『카레 온 더 보더』, 영화로 화제가 된 코맥 매카시의 『카운슬러』, 김경집의 『인문학은 밥이다』, 조해진, 신해욱, 김미월의 여행기로 기대만발인『누구나, 이방인』,많은 이들이 기다렸을 황정은의 두 번째 장편소설『야만적인 앨리스씨』,가와이 간지의 『데드맨』, 매력적인 표지와 독특한 제목으로 내용이 더 궁금한 『하품은 맛있다』,지인이 강력 추천한 『모든 것은 빛난다』를 담는다.

 

리스트는, 계속 이어질 것이다. 소설가 한강의 시집, 김 숨의 단편집.

 

 

 

 

 

 

 

 

 

 

 

 

 

 

 

 

 

 

 

 

 

 

 

 

 그리고, 이런 시들을 옮긴다.

 

 

 옛 가을의 빛 - 허수경 

 

 개들은 불안한 고독의 날개를 가진 나비를 쫓아다녔다

 저수지에 고인 물의 살 속으로 깊이 침입하던 바람은

 수초를 기슭으로 자꾸 보냈고

 하여 저수지 기슭에는 붉은 물풀들이 행려거지처럼 누워 있었다

 

 고추가 마르던 집 앞에서 빛은 고독한 매운내를 풍기며 앉아

있었다

 가지가 마르던 마당에 보라빛으로 고여들던 어둠은

 할머니가 피우는 담배연기 속으로 들어가 해맑은 죽음의 빛으

로 살아났다

 

 병아리가 종종거리는

 맨드라미가 붉은 손을 자꾸 흔드는

 그 마당에 가만히 앉아서 김칫거리를 다듬던 새댁의 눈 안에 고

인 눈물빛

 

 벙어리 소녀는 낡은 거울 앞에서

 낡은 결혼예복을 입어보았다

 결혼예복 속에는 원앙 두 마리가 낡은 금빛 자수에 안겨 있었다

 낡아가는 빛을 보면서 말을 할 줄 모르는 소녀가  수음을 했다

 

 우물에 기대어 먼 빛만 바라보았다

 묵직한 우울함이 우물에 가라앉은 빛이 될 때

 먼 산숲에서 핀 버섯이 가만가만 공기 속으로 돋아났고

 흙은 아렸다

 

 얼마나 무료한 나날들이 빛 속에 있는가

 그날 죽을 것 같은 무료함이 우리를 살게 했지, 아주 어린 짐승

의 눈빛 같은

 나날이었다

 

 

 갈색의 책 - 이제니 

 

 나 혹은 너는 나무숲에서 오래된 책 한 건을 발굴했다

 나무숲은 꼭 갈색일 필요는 없다 아주 희미한 갈색의 암

시 정도만

 먼지와 빛의 깊이를 지닌 고고학적인 아름다움이라고 해

두자

 

 누군가 경건한 얼굴로 문장을 읽어내려갔다

 행간과 행간은 지독히도 넓었고 침묵 또한 꼭 그만큼 벌

어졌다

 

 정말 가슴 아프게도 들리지 않습니까

 무엇이 말입니까

 소리내어 말할리 없잖아

 

 꿈에서 깼을 땐 단 하나의 단어밖에 기억나지 않았다

 

 어머니,

 흔들리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내가 기억하는 얼룩과 네가 기억하는 얼룩

 흰 것 위에는 검은 것, 검은 것과 흰 것

 

 벌레 먹은 나뭇잎 구멍 사이로 오후 네시의 햇빛이 스러

지듯이

 보도블록 깨진 틈 사이로 모래알들이 쓸여들어가듯이

 

 누구든 좋으니 단 한 사람이라도

 나를 아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떨어져나간 겉장, 제목도 없는 책

 나는 일평생 나라는 책을 읽어내려고 안간힘 썼습니다

 

 갈색의 갈색의 갈색의 책

 

 무슨 말이든지 하세요 그러면 좀 나아질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완전히 침묵하는 법을 배우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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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이
최진영 지음 / 창비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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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정적 사고보다는 긍정적 사고가 낫다는 걸 모르는 이는 없다. 하지만 그것조차 버거운 삶이 있다는 걸 모르는 이는 많다. 내 말은 우리의 현실이 의지대로 살 수 있는 삶이 아니라는 거다. 죽을 만큼 노력해도 한 발짝 앞으로 나가기가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땐 어떻게 해야 할까. 누구에게 도움의 손을 내밀고, 누구에게 너덜너덜 찢긴 가슴은 보여줘야 할까. 자유 자재로 슬픔을 표현한 최진영의 소설집 『팽이』를 읽으면서 마음이 답답해졌다. 소설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책에 수록된 10편의 소설은 평범한 일상의 편린처럼 보인다. 평범이라는 말을 써도 좋다면 말이다. 우선, 표제작 <팽이>의 화자 재이는 단칸 방에서 오빠와 둘이서 산다. 처음엔 엄마도 함께 살았다. 그러다 어느 날 엄마는 엄마의 집을 찾아 미국으로 떠났다. 그러니까 엄마가 아닌 자신의 삶을 찾아 떠난 것이다. 재이는 좀 느린 편이다. 열살이 될 때까지 글자를 다 읽지 못 해서 오빠에게 한글을 배우고 기다리고 책임지는 법을 배운다. 하지만 혼자 사는 법은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오빠도 자신의 세상으로 떠나고 어른이 되어서도 혼자 살아간다. 자신이 도는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팽이처럼 말이다. 누군가 옮겨주지 않으면 멈추고 마는 삶인 것이다.

 

 ‘우리가 허락된 크기만큼 자라는 동안 무너지지도 부서지지도 않고, 우리의 숨과 비밀과 유년을 덧바르며 거듭 견고해진 방. 까만 그곳에서, 야광 팽이가 팽팽 돌고 있었다. 가장 빨리 돌 때의 팽이는 거꾸로 도는 것도 같았고, 꼿꼿이 서서 움직이지 않는 것도 같았다. 나는 거꾸로 돌거나 가만히 서 있는 것인지도 모를 팽이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가만히 지켜봤다.’ (285~286쪽, 팽이 중에서)

 

 <팽이> 속 재이처럼 혼자서야 하는 삶이 당연한 듯 보인다. 하지만 자립은 쉽지 않다. 그러니 꿈을 꾼다는 건 그 자체로 사치라 할 수 있다. 함께 사는 코끼리 앨리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사랑, 믿음, 꿈에 대해 말하는 <앨리> 속 화자도 마찬가지다. 그가 하는 이야기를 진심으로 받아주지 않는다. 그러니 화자가 키우는 코끼리 앨리를 누구에게도 소개할 수 없다. 사랑한다고 믿는 애인은 결혼이란 현실적 문제 앞에 이별로 변하고, 영화를 만들고 싶은 꿈에 대해 형은 정신 차리라 말한다.

 

 ‘불행을 피하겠다는 게 아니다. 진짜로 불행해지는 그때 그 순간 피하지 않고 받아들이면 되지 않나. 하지만 언제 올지도 모를 불행 때문에 현재를 망치고 싶진 않다. 형이 정말 어른이라면, 나를 사랑하고 걱정하는 가족이라면, 내게 미리 불행을 주입하는 대신 내가 진짜 불행해지는 바로 그날 나를 위로하고 쓰다듬어줘야 한다. 위로와 걱정은 일이 일어난 다음에 해도 늦지 않으니까.’ (134쪽, 엘리 중에서)

 

 정확한 이름을 알려주지 않은 채 아버지가 준 장소를 찾지 못하는 이야기 <어디쯤>, 엄마가 죽고 남겨진 빌라에서 혼자 살아가는 <월드빌 401호>속 종철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세상과 단절한 상황에서 불안하고 두려운 삶을 살아간다. 그런가 하면 <창>의 주인공은 비정규직 여성으로 직장에서 왕따를 당한다. 동료들은 한결같이 그녀를 험담하고 상사는 무시한다. 무슨 이유인지 알려주지 않는다. 사회는 그녀를 더욱 외롭게 만드는 존재인 것이다.

 

 모두가 적이 될 수 있는 사회, 불안과 불신이 팽배한 세상, 사랑한다고 믿는 이들조차 나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부모님의 산소에서 갑자기 나타난 3억 돈 가방을 둘러싼 남편과 아내의 갈등을 다룬 <돈가방>이나 출근한 남편이 여고생 강간살인 피의자로 조사를 받는 <남편> 은 믿음에 대해 묻는다. 내 편이라 믿고 모든 걸 다 안다고 믿은 가족을 우리는 진짜 믿고 있을까.

 

 누구도 불행하고자 애쓰지 않는다.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남들보다 더 행복해지려는 욕망을 꿈꾸지 않는다. 다만, 불행이라는 늪을 건너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최진영의 소설 속 인물들이 그렇듯 여전히 불행의 늪에 있다. 그래서 해답이 아닌 문제만 제시한 그녀의 소설이 더 아름답고 더 애틋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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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아침
파스칼 키냐르 지음, 류재화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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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을 알지 못하는 그림을 떠올린다. 어떤 음악을 붙잡는다. 키냐르의 짧은 소설을 덮고 가만히 그 음악을 처음 들었을 때의 떨림과 평안함을 생각한다. 분노와 절규를 내려놓고 울게 만든 음악이다. 그 후로 그 음악은 존재만으로도 위로가 되었다. 음악을 이야기하려는 게 아니다. 어쩌면 키냐르는 그랬을지도 모른다. 태초의 음악에 대해, 음악 이전의 음악에 대해 말이다. 예술가로서 음악의 가치를 보여주고 싶었던 걸까.

 

 17세기 비올라 다 감바의 거장 생트 콜롱브는 사랑하는 아내를 잃는다. 여섯 살과 두 살 난 딸을 키우며 그는 음악에 몰두한다. 오직 음악의 테두리 안에서 생활한다. 두 딸에게 음악을 가르치며 작곡과 연주를 이어가고 왕실의 부름을 거절한다. 자신만의 오두막에서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며 활을 켠다. 콜롱브가 존재 자체로의 음악가였다면 그의 제자 마레는 놀라운 기교의 기술자였다. 마레는 자신의 음악을 통해 명예를 얻고 싶었다. 때문에 스승이 작곡한 곡이 궁금했고 왕실 음악가로 입궁이 자랑스러웠다. 콜롱브와 마레는 음악에 대한 견해와 욕망이 달랐다.

 

 “활을 켤 때 내가 찢는 것은 살아 있는 내 작은 심장 조각이네. 내가 하는 건 어떤 공휴일도 없이 그저 내 할 일을 하는 거네. 그렇게 내 운명을 완성하는 거지.” 75쪽

 

 스승은 음악의 본질에 다가가므로 자신의 생을 이어갈 수 있다고 믿었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마레는 스승의 큰딸과 사랑을 나누지만 둘째 딸의 유혹을 마다하지 않는다. 반면 콜롱브에게 아내는 죽은 이가 아니었다. 12년이 지났지만 아내와 함께했던 침대에서 여전히 온기를 느낀다. 때문에 콜롱브가 그토록 원했던 아내 역시 음악을 연주하는 동안 환영(幻影)으로 마주할 수 있었다. 말이 아닌 음악으로 아내를 불러온 것이다. 수척하게 여윈 검버섯이 핀 손을 보며 아내에게 가까이 가고 있다고 믿는 남자. 다정한 말 한 마디를 전하지 못한 아내를 위한 연주라고 하면 맞을까. 그런 남편에게 아내의 환영은 어디에나 음악이 존재함을 전한다. 음악이 이승과 저승을 연결해주는 통로이자 묘약인 것처럼.

 

 “바람이 되면 고통이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가끔 이 바람은 우리에게까지 약간의 음악 조작들을 실어 나른답니다. 가끔 빛은 당신의 눈빛에까지 우리 모습의 조각들을 던진답니다.” 92쪽

 

 아내를 이어 큰딸을 잃은 콜롱브는 오랜 시간 연주를 하지 않는다. 들려주기 위한 연주가 아니었지만 함께 공유하지 못하는 연주는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스승의 연주를 들을 수 없을지도 생각에 마레는 3년 동안 밤마다 오두막을 드나들다 드디어 그의 연주를 듣는다. 늙은 스승이 딸들과 함께 연주했던 곡을 연주한다. 마레는 스승에게 마지막 수업을 청한다. 평생을 서로 다른 길을 간 스승과 제자는 결국 마지막에서야 비로소 함께 연주하고 음악으로 하나가 된다.

 

 음악은 어디에서 시작된 것이며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것일까. 콜롱브의 말처럼 ‘말이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말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일까. 역사 속 기록으로 남은 위대한 예술가의 삶을 반추한 소설을 통해 우리는 음악이 존재만으로도 그 가치를 스스로 증명하고 있음을 확인한다. 비단 음악뿐일까.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우리가 모르는 신비한 비밀을 갖고 있을 것이다.

 

 “음악은 말이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 위해 그저 거기 있는 거라네. 그런 의미에서 음악은 반드시 인간의 것이라고 할 수 없지” 118쪽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나는 음악을 듣는다. 침묵만큼 적요하게 흐르는 음악, 말이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들려주는 음악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가. 내가 닿지 않는 세계에도 분명 음악은 존재하는 것이다. 그 세계가 과거이든 미래이든 우리를 위로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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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3-10-02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악이 없는 세상은 상상하기 어려울 것 같아요. 멋진 글 잘 읽었습니다.

자목련 2013-10-03 11:07   좋아요 0 | URL
음악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확인했다고 할까요. 파스칼 키냐르를 더 알고 싶게 만든 책이었어요. 남들은 다 아는 걸 저는 이제서야, ㅎ
 

 

 어제 점심엔 그릇을 깼다. 밥을 담는 공기였다. 깨질 수 있는 물질이니 깨지는 건 당연하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는 게 화가 날 뿐이다. 좋아하는 그릇이라 다시 주문하려 하니 판매중지 상품이라고 공지가 뜬다. 구매할 수 없다는 글은 그릇에 대한 집착을 키웠다. 내가 소유할 수 없는 물건이 되고 말았으니 말이다. 지난 금요일에는 어떤 책에도 비슷한 생각을 품었다. 큰 언니가 주문해 달라는 책이었다. 에쿠니 가오리였다. 몇 권의 책을 읽었지만 그는 아주 좋아하는 작가가 아니다. 언니의 주소로 주문한 책은 『한낮인데 어두운』이었고, 『낙하하는 저녁』은 품절이라 주문하지 못 했다. 두 권에 대한 책이 갑자기 궁금해졌다. 얼마 후면 잊힐 관심이지만 현재는 그렇다.  

 

 저녁엔 할아버지 추도 예배를 드렸다. 목사님을 모시지 않고 가족들끼리 예배를 드렸다. 작은 아버지가 오셨고, 예배를 드리고 저녁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색이 고운 황도를 먹었다. 비가 내리고 있었고, 우리는 가을 비와 추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대신 아버지 형제들의 나이와 내 형제의 나이와 아이와 조카의 나이를 헤아렸다. 우리는 모두 늙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은 아주 무더운 여름이었다. 마당에는 할머니와 엄마가 밭에서 따온 콩을 손질하고 있었다. 나는 할아버지 곁에 있었다. 내가 그 자리에 있었던 건, 언니와 오빠는 학교에 갔고 동생은 어렸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가장 가까운 곳에서 할아버지의 죽음을 지켜본 것이다. 물론 그때는 인식하지 못한 일이다. 그 후로 몇 년 동안 벽에 걸려있었던 할아버지의 사진은 사라졌다. 하성란의 소설집  『여름의 맛』을 보자 그날의 한 장면이 함께 떠올랐다. 가족이라는 끊을 수 없는 끈을 생각하면 언제나 줌파 라히리의  『그저 좋은 사람』과 『이름 뒤에 숨은 사랑』, 개정판을 기다리는 『축복받은 집』이  겹쳐진다. 자식의 태어나고, 이름을 지으며 부모가 가졌던 사랑을 말이다.

 

 가을 비가 내리는 날, 밀란 쿤데라의 유일한 단편집  『우스운 사랑들』 과 가을을 닮은 글일 것만 같은 시인들의 연서  『어쩌다 당신이 좋아서』 를 검색한다. 그리고 장필순의 노래를 반복해서 듣는다. 새로 발표한 앨범에 수록된 노래 <그리고 그 가슴 텅 비울 수 있기를>과 드라마 아일랜드에 나왔던 노래 <그대로 있어주면 돼>를 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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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3-09-30 0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들은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늙기 시작한다'는 말도 있으니 너무 늙어 가는 일에 신경쓰지 말아야겠다 싶어도, 사실 눈에 들어오는 주위 사람들은 모두 자꾸만 늙어가는 모습들 뿐이니, '늙어감'에 대한 감상은 누구나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얘기인 듯해요.

* * *

어째서 오늘의 내 심정은 젊은 날의 내 것이 아닌가?
또는 순진하던 내 양 볼은
어째서 이 정신에게로 돌아오지 못하는가? (호라티우스)

나는 노년기가 수많은 내 친지들에게 얼마나 큰 변화를 일으키고 있는가를 보았던가! 노년이란 자연히 자기도 모르는 새에 저절로 흘러드는 강력한 질병이다. 노년이 우리에게 짋어지우는 결함을 피하려면, 적어도 그 진전을 막으려면, 대단히 많은 연구와 조심스러운 준비가 필요하다. 나는 아무리 몸을 아껴도 이 노년이 한걸음 한걸음 나를 이겨감을 느낀다.나는 힘 닿는 대로 버티어 볼 뿐이다. (몽테뉴)

자목련 2013-09-30 19:32   좋아요 0 | URL
아이들의 모습으로 확연하게 늙음을 느끼는 것 같아요. 어쩌면 늙어감은 죽음의 다른 말이 아닌가 싶기도 해요. 누구나 늙고, 누구나 죽는 게 삶의 진리겠지요.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절대 같을 수 없다는 말을 중얼거리는 날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