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깊어가고 아침은 느리게 온다. 가장 춥다는 아침을 맞았다. 이제 점점 추워지는 날들만 남은 것일까. 찐 고구마를 먹는 날들이 많아졌다. 이유는 밥이 먹기 싫어서다. 고구마와 커피, 스카프를 두르는 아침, 열어 놓은 창문을 통해 날카로운 바람의 움직임이 들려온다.

 

 어제는 계획적이면서 충동적인 한 권의 책을 주문했고, 리스트는 우선은, 갖고 싶은 책이다. 1913 세기의 여름은 소설이라고 생각했다. 100년 전의 여름, 우리가 알고 있다고 믿는 여름이 존재하는 책일까. 여하튼 갖고 싶다. 하성란의 웃는 얼굴을 표지로 쓴 황순원 문학상 수상작품집 『카레 온 더 보더』, 영화로 화제가 된 코맥 매카시의 카운슬러, 김경집의 『인문학은 밥이다』, 조해진, 신해욱, 김미월의 여행기로 기대만발인『누구나, 이방인,많은 이들이 기다렸을 황정은의 두 번째 장편소설『야만적인 앨리스씨,가와이 간지의 데드맨매력적인 표지와 독특한 제목으로 내용이 더 궁금한 『하품은 맛있다,지인이 강력 추천한 『모든 것은 빛난다』를 담는다.

 

리스트는, 계속 이어질 것이다. 소설가 한강의 시집, 김 숨의 단편집.

 

 

 

 

 

 

 

 

 

 

 

 

 

 

 

 

 

 

 

 

 

 

 

 

 그리고, 이런 시들을 옮긴다.

 

 

 옛 가을의 빛 - 허수경 

 

 개들은 불안한 고독의 날개를 가진 나비를 쫓아다녔다

 저수지에 고인 물의 살 속으로 깊이 침입하던 바람은

 수초를 기슭으로 자꾸 보냈고

 하여 저수지 기슭에는 붉은 물풀들이 행려거지처럼 누워 있었다

 

 고추가 마르던 집 앞에서 빛은 고독한 매운내를 풍기며 앉아

있었다

 가지가 마르던 마당에 보라빛으로 고여들던 어둠은

 할머니가 피우는 담배연기 속으로 들어가 해맑은 죽음의 빛으

로 살아났다

 

 병아리가 종종거리는

 맨드라미가 붉은 손을 자꾸 흔드는

 그 마당에 가만히 앉아서 김칫거리를 다듬던 새댁의 눈 안에 고

인 눈물빛

 

 벙어리 소녀는 낡은 거울 앞에서

 낡은 결혼예복을 입어보았다

 결혼예복 속에는 원앙 두 마리가 낡은 금빛 자수에 안겨 있었다

 낡아가는 빛을 보면서 말을 할 줄 모르는 소녀가  수음을 했다

 

 우물에 기대어 먼 빛만 바라보았다

 묵직한 우울함이 우물에 가라앉은 빛이 될 때

 먼 산숲에서 핀 버섯이 가만가만 공기 속으로 돋아났고

 흙은 아렸다

 

 얼마나 무료한 나날들이 빛 속에 있는가

 그날 죽을 것 같은 무료함이 우리를 살게 했지, 아주 어린 짐승

의 눈빛 같은

 나날이었다

 

 

 갈색의 책 - 이제니 

 

 나 혹은 너는 나무숲에서 오래된 책 한 건을 발굴했다

 나무숲은 꼭 갈색일 필요는 없다 아주 희미한 갈색의 암

시 정도만

 먼지와 빛의 깊이를 지닌 고고학적인 아름다움이라고 해

두자

 

 누군가 경건한 얼굴로 문장을 읽어내려갔다

 행간과 행간은 지독히도 넓었고 침묵 또한 꼭 그만큼 벌

어졌다

 

 정말 가슴 아프게도 들리지 않습니까

 무엇이 말입니까

 소리내어 말할리 없잖아

 

 꿈에서 깼을 땐 단 하나의 단어밖에 기억나지 않았다

 

 어머니,

 흔들리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내가 기억하는 얼룩과 네가 기억하는 얼룩

 흰 것 위에는 검은 것, 검은 것과 흰 것

 

 벌레 먹은 나뭇잎 구멍 사이로 오후 네시의 햇빛이 스러

지듯이

 보도블록 깨진 틈 사이로 모래알들이 쓸여들어가듯이

 

 누구든 좋으니 단 한 사람이라도

 나를 아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떨어져나간 겉장, 제목도 없는 책

 나는 일평생 나라는 책을 읽어내려고 안간힘 썼습니다

 

 갈색의 갈색의 갈색의 책

 

 무슨 말이든지 하세요 그러면 좀 나아질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완전히 침묵하는 법을 배우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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