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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아침
파스칼 키냐르 지음, 류재화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8월
평점 :
제목을 알지 못하는 그림을 떠올린다. 어떤 음악을 붙잡는다. 키냐르의 짧은 소설을 덮고 가만히 그 음악을 처음 들었을 때의 떨림과 평안함을 생각한다. 분노와 절규를 내려놓고 울게 만든 음악이다. 그 후로 그 음악은 존재만으로도 위로가 되었다. 음악을 이야기하려는 게 아니다. 어쩌면 키냐르는 그랬을지도 모른다. 태초의 음악에 대해, 음악 이전의 음악에 대해 말이다. 예술가로서 음악의 가치를 보여주고 싶었던 걸까.
17세기 비올라 다 감바의 거장 생트 콜롱브는 사랑하는 아내를 잃는다. 여섯 살과 두 살 난 딸을 키우며 그는 음악에 몰두한다. 오직 음악의 테두리 안에서 생활한다. 두 딸에게 음악을 가르치며 작곡과 연주를 이어가고 왕실의 부름을 거절한다. 자신만의 오두막에서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며 활을 켠다. 콜롱브가 존재 자체로의 음악가였다면 그의 제자 마레는 놀라운 기교의 기술자였다. 마레는 자신의 음악을 통해 명예를 얻고 싶었다. 때문에 스승이 작곡한 곡이 궁금했고 왕실 음악가로 입궁이 자랑스러웠다. 콜롱브와 마레는 음악에 대한 견해와 욕망이 달랐다.
“활을 켤 때 내가 찢는 것은 살아 있는 내 작은 심장 조각이네. 내가 하는 건 어떤 공휴일도 없이 그저 내 할 일을 하는 거네. 그렇게 내 운명을 완성하는 거지.” 75쪽
스승은 음악의 본질에 다가가므로 자신의 생을 이어갈 수 있다고 믿었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마레는 스승의 큰딸과 사랑을 나누지만 둘째 딸의 유혹을 마다하지 않는다. 반면 콜롱브에게 아내는 죽은 이가 아니었다. 12년이 지났지만 아내와 함께했던 침대에서 여전히 온기를 느낀다. 때문에 콜롱브가 그토록 원했던 아내 역시 음악을 연주하는 동안 환영(幻影)으로 마주할 수 있었다. 말이 아닌 음악으로 아내를 불러온 것이다. 수척하게 여윈 검버섯이 핀 손을 보며 아내에게 가까이 가고 있다고 믿는 남자. 다정한 말 한 마디를 전하지 못한 아내를 위한 연주라고 하면 맞을까. 그런 남편에게 아내의 환영은 어디에나 음악이 존재함을 전한다. 음악이 이승과 저승을 연결해주는 통로이자 묘약인 것처럼.
“바람이 되면 고통이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가끔 이 바람은 우리에게까지 약간의 음악 조작들을 실어 나른답니다. 가끔 빛은 당신의 눈빛에까지 우리 모습의 조각들을 던진답니다.” 92쪽
아내를 이어 큰딸을 잃은 콜롱브는 오랜 시간 연주를 하지 않는다. 들려주기 위한 연주가 아니었지만 함께 공유하지 못하는 연주는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스승의 연주를 들을 수 없을지도 생각에 마레는 3년 동안 밤마다 오두막을 드나들다 드디어 그의 연주를 듣는다. 늙은 스승이 딸들과 함께 연주했던 곡을 연주한다. 마레는 스승에게 마지막 수업을 청한다. 평생을 서로 다른 길을 간 스승과 제자는 결국 마지막에서야 비로소 함께 연주하고 음악으로 하나가 된다.
음악은 어디에서 시작된 것이며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것일까. 콜롱브의 말처럼 ‘말이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말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일까. 역사 속 기록으로 남은 위대한 예술가의 삶을 반추한 소설을 통해 우리는 음악이 존재만으로도 그 가치를 스스로 증명하고 있음을 확인한다. 비단 음악뿐일까.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우리가 모르는 신비한 비밀을 갖고 있을 것이다.
“음악은 말이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 위해 그저 거기 있는 거라네. 그런 의미에서 음악은 반드시 인간의 것이라고 할 수 없지” 118쪽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나는 음악을 듣는다. 침묵만큼 적요하게 흐르는 음악, 말이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들려주는 음악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가. 내가 닿지 않는 세계에도 분명 음악은 존재하는 것이다. 그 세계가 과거이든 미래이든 우리를 위로하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