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걸려온 전화는 설렘과 동시에 불안을 안겨준다. 지난 금요일 걸려온 전화와 주말 오후에 걸려온 그것이 그러했다. 금요일에 걸려온 전화는 작은 아버지셨다. 어렸을 때 나를 무척 아끼고 예뻐해주셨는데, 어른이 되면서 명절이나 집안에 큰 일이 있을 때나 뵙는 분이다. 봄에 내게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어떤 소식을 알려주려고 일부러 전화를 주신 것이다. 그 소식은 정보라는 말에 가깝겠다. 신문을 제대로 읽지 않은 나는 그 전화로 알게 된 소식이니까. 사촌들의 안부를 전하는 것으로 통화는 끝이 났다. 금요일엔 그 전화가 나를 붙잡고 있었다. 표현하지 않아도 항상 조카의 안부를 궁금해하고 계시다는 걸 알게 되었고, 고맙고 감사했다.

 

 주말 오후 드라마를 보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두 어 달 만의 전화였는데 친구는 갑자기 주소를 문자로 보내라고 했다. 문자를 보내니 다시 전화가 왔다. 내가 사는 곳,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것이다. 하여 나를 보러 온다는 말이었다. 20여분이 지나고 도착한 친구는 나를 꼭 안아주었다. 우리는 대학 3학년 여름에 만났다. 방학 동안 아르바이트를 하러 간 곳에서 만났다. 그녀 역시 그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그곳은 내게 빨간 원피스란 별명을 붙여준 곳이다.

 

 짧은 시간 우리는 쉬지 않고 이야기를 나눴다. 눈과 눈을 마주하고, 한 번씩 손을 잡으며 말이다. 그녀가 남자친구와 함께 운영하는 카페에 대해서, 주인의 팔을 물어버린 그녀가 기르는 고양이에 대해서, 책에 대해서, 그리고 어떤 것들에 대해서. 언제나 그렇듯 내가 말을 많이 했고, 그녀가 많이 들어주었다. 김경주의 『밀어』에 대해 말하다 『패스포트』로 이어졌고 그 순간 나는 「3호선 버터 플라이」의 그녀에게와 「롤러코스터」의 괜찮아요 가 떠올랐다.

 

 

 

 

 

 

 

 

 

 

 

 

 

 

 

 

 

 

 빨간 원피스로 불리던 시절, 내 곁엔 언제나 그녀가 있었다. 그 후로 오랜 시간 소식이 끊어지기도 했지만 손을 뻗으면 언제나 그 손 끝에 그녀가 닿아 있었다. 많은 시간이 지났다. 우리는 늙어가고 있다, 그 늙음이 좋다. 우리는 내내 그렇게 늙어갈 것이다. 눈과 눈을 마주한 시간이 짧을 거라는 걸 안다. 그래도 내 안에 그녀가 살고 있으니 괜찮다. 그녀 역시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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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가 내렸다. 시원한 비였다. 언니와 조카는 이곳보다 많은 비가 내린 남부 지방을 여행중인데도 나는 하나도 걱정은커녕 신이 났다. 비오는 날, 에피톤 프로젝트의 음악을 들었다. 비가 와서 라면도 먹었다. 신간에 대한 소식은 문자를 통해 접하지만 음반은 그렇지 않다. 에피톤 프로젝트가 새 음반을 냈다는 걸 안 건 정말 우연이다. 『낯선 도시에서의 하루 』란 앨범 제목도 좋다. 우선 세 곡을 듣고 있다. <믿을게><터미널>,<새벽녘>을 반복해서 듣고 있다. 한데, 이 앨범에 수록된 곡이 다 좋다. 검색해서 들어보니 정말 좋다. <우리의 음악>도 좋고, 이 나이에 이렇게 이런 감성에 취하면 곤란한데, 하면서도 빠져든다.

 

 

 

 

 

 

 

 

 

 

 

 

 

 

보고 싶은 많은 사람들
늘 쉽지 않은 마음의 용기
언제쯤 보자 또 언제 만나자
기약 없는 약속들이 늘고
무표정한 계절 사이로
너의 모습 내게 다가온다
오랜만이야 참 오랜만이야
길어진 하루 해 끝에 걸음을 늦춰보며
괜찮을 거야, 다 괜찮을 거야
나의 하루는 그런대로 지내
믿을게, 믿을래 그렇게 믿어볼게
잘했다고 우리 그 결정은 잘했다고
괜찮을 거야, 다 괜찮을 거야
나의 하루는 내일도 같은 하루라도
믿을게, 믿을래 그렇게 믿어볼게
이제 그만 더 이상 미안해하지 말고
괜찮아 다 괜찮아 지난일이야
마음속 남은 것들은 털어내고
괜찮아 다 괜찮아 지난일이야
슬퍼했던 마음은 이제는 모두 벗어내고   - 믿을게-

 

 

 여름, 떠나려는 당신에게 필요한 건 이 음악들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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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2-06-13 16: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거기 날씨 어때요? 금빛 물결의 바다 막 그런 푸른 로망이 이 음악과 함께 하길 바래요^^

자목련 2012-06-13 22:50   좋아요 0 | URL
여기는, 너무 더워요. 바다의 시원함이 필요해요. 해서, 내일 바다를 보러갈지도 몰라요.
아이님은, 잘 지내시나요?
 
삶을 안다는 건 왜 이리 어려운가요? - 사상가 아버지와 문학가 딸이 나눈 10년의 편지 글항아리 인문에세이 3
류짜이푸.류젠메이 지음, 이유진 옮김 / 글항아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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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식은 부모를 닮는다는 말이 있다. 당연한 말처럼 들리지만 무엇을 닮느냐에 따라 반응은 달라진다. 좋지 않은 습관이나 행동을 닮는다면 반가워 할 부모는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부모의 대를 이어 같은 분야에 종사한다면 뿌듯함을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여기 거울을 보듯 닮은 부녀가 있다. 서로의 모습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함께 걸어가는 중국의 사상가인 아버지 류짜이푸와 문학가인 딸 류젠메이가 그들이다.

 

 책은 1989년부터 1999년까지 10년 동안 부녀가 인생과 학문에 대해 팩스로 나눈 편지를 엮은 책이다. 제1부 사랑하라, 제2부 생각하라, 제3부 표류하라 세 부분으로 나누어 물음표로 가득한 삶에 대해 토론한다. 언제나 얼굴을 마주할 수 있는 부녀사이인데 왜 그들은 편지를 써야 했을까?  아버지 류짜이푸가 천안문 사건으로 두 딸을 중국에 남겨두고 아내와 함께 미국행을 선택해야 했기 때문이다.

 

 타국에 있는 아버지와 중국에 남은 큰 딸 류젠메이는 그때부터 편지로 소통한다. 두 사람의 편지는 류젠메이가 중국을 떠나 미국으로 유학을 오고 결혼을 하여 아이를 낳은 후에도 계속 이어진다. 문학을 공부하는 딸의 고민, 아이를 낳고 어머니가 된 후 겪는 놀라운 감동과 우울, 가까운 이의 죽음으로 인한 상실감, 아버지이기 이전에 인생의 선배이자 사상가에게 묻고 딸이기 이전에 문학가에게 답하는 것이다.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시작하는 편지글이라 다정하고 친근하지만 내용은 쉽다고는 말할 수 없다.사상가와 문학가라는 직업이 말해주듯 편지로 나눈 내용은 다양한다.  철학과 사상, 고전, 문학, 인생에 대해 서로에게 묻고 답한다.

 

 편지에는 특히 타국에서 바라보는 고국에 대한 객관적인 시선이나 중국 문학에 대한 내용이 많다. 아버지와 딸이 미국에서의 삶을 선택한 이유는 다르지만 중국에 대한 애정은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외롭고 고독한 이방인이 삶을 살아가야 하는데 있어 아버지는 딸에게 이런 글을 전한다.

 

 ‘평상심은 자연스러운 마음이야. 중국을 떠나온 이후에 근본적으로 나를 구원해준 것은 바로 평상심이란다. 중국에 있었을 때에는 나 역시 엄청난 명성을 얻었고 아주 활기차게 살았지. 하지만 중국을 떠난 뒤로는 단숨에 끝도 없는 적막 속으로 떨어지고 말았단다. 그런데도 내가 마음의 평정을 빨리 되찾을 수 있었던 것은, 애당초 나 자신을 결코 대단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야.’ p. 77

 

 ‘생명의 상태와 마음의 상태가 모든 것을 결정한단다. 이 말의 의미는 한 사람의 즐거움과 행복은 그가 무엇을 하는지, 직위와 직함이 무엇인지에 따라 결정되지 않고 생명의 상태와 마음의 상태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란다.’ p. 173

 

 제목처럼 삶이 절망과 고통으로 가득 차 무거울 때,  ‘삶을 안다는 건 왜 이리 어려운가요?’ 누군가에게 묻고 싶었던 이라면 이 책을 통해 삶에 대해 이해하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빛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무엇에 중점을 두고 살아야 하는지, 왜 그래야 하는지 알려준다. 부와 명예만을 바라며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일침을 가하기도 한다.  

 

 ‘자아라는 지옥은 어디에나 존재하지. 그것은 네가 어딜 가든 너를 따라다니는 지옥이란다. 허영의 추구, 끝없는 욕망, 타인에 대한 배척과 질투의 사념, 분발하기를 멈춘 나태, 먼지 같은 성취가 빚어낸 교만 등이 모두 자아의 지옥이란다. 어쨌든 인간은 죽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런 욕망(사념)이 허망하게 느껴지지. 그리고 인간이 최후에는 피할 수 없는 공허 속으로 떨어지게 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인간 세상의 눈부신 허영이 죄다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된단다. 난 네가 청춘일 때, 자아의 지옥에 대해 깨닫기를 정말 바란단다.’ p. 98

 

 이처럼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는 가르침을 주니, 인문학과 철학 강의를 듣는 기분이다. 하여 스승 같은 책이 아닐까 한다. 날짜대로 싣지는 않았지만 어느 부분을 먼저 읽어도 상관없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딸에게, 딸이 아버지에게 보내는 안부이며, 인생에 대한 질문과 답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인문학, 철학, 문학을 공부하고 있거나 중국 문학에 관심있는 이라면 더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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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사르 2012-06-07 1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힛. 태그가 눈에 들어옵니닷. 아버지이기 이전에, 딸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묻고 답하고 또 반대로 하기도 하는 이런 행위가 보기 좋아요. 가족 관계로 얽혀 서로에게 가족의 지위를 바라는 그런 류는 고향의 푸근함을 주기도 하지만 벗어나고픈 갑갑함의 대명사가 되기도 하니까요. 참 부러운 부녀지간입니다.

옮겨주신 '평정심'부분과 '자아라는 지옥' 부분은 두고두고 읽으며 곱씹고 싶은 부분이네요.

자목련 2012-06-08 09:45   좋아요 0 | URL
제게는 어려웠지만 책은 아주 좋았어요. 중국의 문화나 역사에 대해 많이 알았더라면 더 재미있게 읽었을 텐데.
지식인으로 산다는 것,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많은 부분에서 밑줄 긋고 싶은 책이었어요. 1999년까지만 이어지지만 아마도 부녀사이의 교류는 끊임없이 계속되지 않을까 싶어요.
 

 

 여름이 되었고, 가뭄의 날들이다. 적당한 비는 내리지 않고 곧 장마가 시작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이 드는 저녁이다. 내일, 모레 비 소식이 있지만 얼만큼의 비가 내릴지 알 수 없다. 저마다 비를 기다리는 마음은 다를 것이다. 부디 그 마음에 맞게 비가 내려주면 좋겠다. 

 

 이은규, 허연, 김경후의 시집을 읽었고 몇 편의 시를 옮기기도 했다. 미처 전하지 못한 시들을 옮긴다. 봄보다는 바다색 여름과 어울릴 것 같은 시는 이은규의 이런 시다.

 

 <허밍, 허밍>

 

 종종 구름을 눈에 담는 습관, 당신의 폐활량이 천천히 부

풀 때 그날의 공기를 부러워한 적 있다 구름을 가리키며 바

람의 춤이라고 말하는 당신의 허밍은 입술에 기대는 음악일

까, 기대지 않은 음악일까

 

 바람의 춤이 보인다면 그건 구름의 몸을 빌렸거나 폐활량

이 푸른 여름잎의 소관일 것, 구름은 바람으로 흐르고 바람

은 여름잎으로 들리니까

 

 언젠가 고원의 사라진 호수에 대해 이야기 나눴지 수면을

맴돌던 그때의 구름은 지금 어디 있을까 가장 낮은 하늘을

흐르고 있을 호수 저편, 깃털무늬구름이거나 물결무늬구름

 

 당신은 잠시 구름사전 속 이름들을 덮는다 구름과 노닐기

에 알맞은 바람이므로, 구름의 후렴은 음악이다 마지막 소

절이 첫 소절로 흐르는 허밍, 허밍

 

 사라진 호수 저편

 팔랑, 수면을 깨뜨리는 나비 한 점도 좋을 오후  - <다정한 호칭, p. 94>

 

 봄에서 여름으로 흐르는 시간을 막을 수 없다. 생이란 막을 수 없는 시간 같은 것일까. 어찌하려 하지만, 어찌할 수 없는 것. 감당할 수 없다고 피하고 싶지만 결국엔 나만이 감당해야 하는 게 삶이고 생이다. 그리하여 허연은 생은 선택된 적이 없다고, 생무덤이다라고 말한다.

 

 <사라져가는 것들을 위한 나라는 없다>

 

 생에서 포기는 어떤 좌표도 읽지 않겠다는 결의다.

생은 선택된 적이 없다. 복제된 F1 완두콩들이 생에

들어온다. 엉겹결에 생에 들어서고, 생의 한가운데

놓인다. 생은 시달리거나 포기하거나 둘 중 하나다.

깨달음이 있는 것 같지만 생판 그게 어디 쉬운 일인

가. 늘 피를 보면서도 결국 생에서는 X축과 Y축이 와

글거린다. 이래저래 도망치는 놈은 도망치느라 생으

로 숨어들고, 살아보겠다는 놈들도 생으로 걸어 들어

간다. 무기력하게 좌표 평면으로 걸어 들어간다. 한

가지 매력이 있다면 생에서는 사라져가는 걸 동정하

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라져가는 것들을 위한 나라는

다행스럽게 없다. 지금 이 생이 무덤이다. 생은 우리

들의 무덤이다. 생무덤이다. <내가 원하는 천사, P. 76>

 

 그러니 삶은 때때로 비루하고, 때때로 울울하다. 울고 싶지만 울지 못하는 날들이 있을 것이고, 그 울음을 쌓아두고 막아두려는 의지와의 싸움이 반복되는 일은 습관처럼 되버리고 말았다. 김경후의 이런 시는 누군가를 울게 할지도 모른다. 아니, 울어도 괜찮다고 말한다.

 

 <코르크>

 

 울음을 참는 자의 성대는 커다랗다

 똬리 튼 뱀만큼 커다랗다

 찌그러져 일렁대는

 목 그늘을 보지 못하는 그만이

 울지 않았다고 웃음을 띠고 있다

 

 울음을 참는 자의 성대는 커다랗다

 똬리를 틀고 겨울잠 자는 뱀만큼 커다랗다

 이대로 커진다면

 곧 성대 위로 이오니아식 기둥을

 세울 수도 있으리라

 

 그는 자신에게 ‘안녕?

 인사도 참고 있는 게 틀림없다

 미소와 웃음의 종류가 그의 인생의 메뉴

 

 울음을 참는 자의 성대는 커다랗다

 오래 참는 것이

 크게 울어버린 것이라고

 말을 건넬 수 있을까 그건

 갈라진 뱀의 혀를 깁는 것보다 위험한 일

 무엇을 그는 버려야

 그를 견디지 않을 수 있을까

 

 울음을 참는 자의 성대는 커다랗다

 꼬챙이에 찔려 죽은 줄도 모르고

 겨울잠 자는 뱀의 꿈처럼 커다랗다

 그뿐이다

 울음을 참지 않았다고 외치는

 울음을 참는 자의 성대는 커다랄 뿐이다 <열두 겹의 자정, P. 4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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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겹의 자정 문학동네 시인선 19
김경후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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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때로 짧은 시가 소설보다 긴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한다. 하나의 단어가, 하나의 구절이 가슴에 싹을 틔우고 자라기 시작한다. 그렇기 때문에 시는 강한 여운을 남긴다. 어떤 끌림에 잡은 한 권의 시집에서 투명한 밤, 홀로 잠들지 못하는 한 사람을 본다. 아니, 시라는 형식의 소설을 읽는다. 깨어나지 않는 잠을 자고 싶은 정도로 간절하지만 잠들지 못한다. 해서 그 시각, 밤이 들려주는 소리를, 밤이 기억하는 누군가를 담아낸 것이다.  그 밤을 알 것 같아서 누군가는 안타까울 것이고, 어디선가 그 밤을 견디고 을 누군가는 아플 것이다.

 

<북 치는 여자>

 

 너를 볼 수 없는 밤을 새고

 너를 볼 수 없는 밤이 온다

 오늘은 어둠도 돌아올 수 없는 밤

 너의 길고 푸른 속눈썹으로 만든 붓,

 그 붓으로 나는 쓴다

 

 북, 치, 는, 여, 자,

 나의 기관차, 너의 검게 탄 팔뚝 대신

 이제 빈 병 같은 봄이 온다

 벼락을 가르고 용의 피냄새 풍기는 북소리

 그 대신 낮잠만 온다

 북 치는 여자

 

 한밤의 옥상

 타들어가는 담뱃불로 너는 북가죽을 뚫었다

 우산을 쓸지 노랠 부를지 망설이는 나에게

 해 질 때마다 북을 쳐달라는 나에게

 북을 건넸다

 

 오늘은 어둠조차 돌아올 수 없는 밤

 네가 마지막으로 두드렸을 북한강 물 위에

 백지 같은

 달의 유골함 같은 너의 북 위에

 

 나는 쓴다

 너를 두드린다  (p. 14~15)

 

<그믐>

 

 나를 꽝! 닫고 나가는 너의 소리에

 잠을 깬다

 깨어날수록 난 어두워진다

 기우뚱댄다

 

 거미줄 흔들리는 소리

 눈을 감고 삼킨다

 

 오래 머물렀던 너의 이름에서

 개펄 냄새가 난다

 그것은 온통 버둥거린 자국을

 부러져 박힌 비늘과 지느러미들

 

 나를 꽝! 닫고 나가는 소리에

 내게 묻혀 던 악몽의 알들이 깨어난다

 깨어날수록 난 잠든다

 컴컴해진다

 

 닫힌 내 안에

 꽉 막힌 목구멍에

 이제 그곳에 빛나는 건

 부서진 나를 짚고 다니던 부서진 너의 하얀 지팡이

 내 안에 악몽의 깃털들만 날리는 열두 개의 자정뿐  (p. 46~47)

 

 하나의 사랑이 끝났다고 떠난 이는 말하겠지만 남은 이는 여전히 사랑이 남았으니 그 밤은 얼마나 외로울까. 아니, 사랑이 아니라도 그렇다. 모든 관계가 끊어진 자리는 늘 시리다. 한 때 친밀했던 사이, 한 때 슬픔을 나눴던 사이가 깨어지는 건 사소한 오해로 시작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너를 쓰고 너를 두드리는 내 곁에 존재하는 건 달빛도 사라진 열두 개, 열세 개, 열네 개로 이어지는 자정뿐인 것이다.

 

 <붕대>

 

 발이 푹푹 빠지는 밤,

 더이상 서로를 볼 수 없을 때

 우리는 만난다

 가슴에서 오래된 붕대 냄새가 나

 네가 머물렀던 상처엔 내가 없었지

 서로 보지 못하는 흔적들

 창문을 닫아도

 바람의 방향은 바뀌지 않는다

 

 발이 푹푹 빠지는 밤,

 서로 대답하지 않을 때

 우리는 만난다

 대합 껍질 속에 넣어둔

 내 혀의 무늬는 어떻게 변했을까

 너덜너덜해진 침묵을 기워대는 것도

 이제 그만

 침묵조차 불을 끄고

 방을 나간다

 텅 빈 어항을 껴안고 홀로 서 는 밤

 

 바닥의 붕대 위로 절뚝거린 발자국

 서로를 끝없이 기다리며 우리는 헤어진다

 다시는 밤이 오지 않는다

 이제 그만  (p. 34~35)

 

 닮은 듯 다른 상처를 서로가 껴 앉는 밤은 없다. 아무렇지 않게 방을 나가는, 서로에게서 멀어지는 한 여자와 한 남자를 그려본다. 갈기 갈기 찢긴 마음이 보이는 듯하다. 이토록 잔인한 고통으로 쓰여진 시를 남긴 그 밤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 밤의 깊이를 잴 수 을까. 아니 어떤 기기로도 측량할 수 없을 것이다. 고통으로 채워진 밤의 상처를 싸맬 붕대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김경후의 시에는 수많은 밤이 등장한다. 그 밤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간절함을 이런 시에서 본다.

 

<잘 듣는 약>

 

 이번 약은 잘 들을 겁니다

 의사 말을 듣고

 믿고 싶은 그 말을 믿고 나는 묻는다

 얼마나 잘 듣지 않았나

 이불 속에 드러누운 나의 마음은

 컴컴한 창밖 얼어붙은 얼굴을 들이미는 나의 고함조차

 

 내가 어도 나는 빈 방

 없어도 나는 나의 빈 방

 

 누구를 기다리는가

 골목 구석에 쑤셔박은 내 밤들

 털 빠진 등허리를 말고 자던 내가 버린 고양이들

 듣지 않았지 나는

 

 내가 지내온 빈 밤의 소리들

 내가 지워버린 빈 밤의 소리들

 

 듣지 않고 딛고 가야 할 소리만을 믿었던 나는

 나는 텅텅 빈 소리

 그것들을 잘 다지고 잘 부수지만 잘 듣지는 않은 병

 

 앞으로도 나는 듣지 않을

 빈 방의 나의 소리들

 이 약은 잘 듣고 겠지 (p. 62~63)

 

 <안개 악몽>

 

 저 너머 뱀 비늘 냄새 (안개, 안개인가) 지금까지 내게 그

런 게 너였니, 나를 물어뜯은 까마귀 (아니, 아니야) 그래.

내가 물어뜯은 까마귀 (그건 더 아니야) 그래, 그 기억의 어

금니 자국도, 안개나 되어버려 (그러지 마) 아니, 너는, 갈

기갈기 찢긴, 비명들의 은유일 뿐 (왜 나한테) 아니, 너는,

 무쇠 장화에 외올 베옷 입은 안개, 네겐 그래도 돼 (안 돼

안 돼) 썩은 계단을 뛰어올라가, 나의 안개, 올라가라니까

(그러지마, 아니야) 네게만 그럴 거야, 올가미와 창살이

는, 나의 안개 (안 돼) 네겐, 그래도 돼, 핏물 젖은 나의 안

개 (안개, 안개) (p. 97)

 

 약으로 치유할 수 는 밤이길 바라지만 밤은 낮처럼 환하고 고요하다. 밤을 방해하는 소리들로 잠들지 못한다. 밤조차 잠들지 못하도록 울부짖는 소리들로 잠들었던 밤은 악몽으로 채워진다. 겹겹이 쌓인 밤들이 하나의 계절을 보내고, 계절이 바뀌는 시간을 노래한다. 밤마다 누군가의 흔적들을 새기고 지운다. 시는 밤처럼 어둡고 검다. 김경후의 시집을 읽고 하나의 이야기를 만드는 건 내 의지다.

 

  <환절기>

 

 1

 첫 빗방울을 맞기 직전의 땡볕돌 냄새가 나는 시, 불타는

역청탄 같은 노래, 그랬으면 좋겠지만, 그게 아니라, 올해

내가 유일하게 칭찬받은 사람은 술집 여주인, 손님, 많이 마

셨는데 안 취한 거 같네, 그게 아닌데, 그게 아니지만 이것

도 아닌, 뜨겁지 못한 그게 시가 되는, 취하지도 못하는 시

 

 2

 머리에 대못이 박힌 채 껍질이 벗겨지는 뱀장어 눈알, 그

빛과 감촉처럼 사랑하기를, 발광하며 감전되기를, 질주하

는 죽음의 타이어 자국이 영혼에 새겨져도, 이빨로 타이어

를 물어뜯어서라도, 저주할 만큼 사랑하기를, 그게 아니더

라도 그러기 바라기를

 

 오래된 건지 버려진 건지 모를 옷과 가방들, 사실은 그게

아니라, 세탁기에 해어진 너의 명함과 동전지갑, 그건 더욱

더 아닌, 너의 밤색 머리카락과 새치까지, 그러지 않아도 되

는데 그게 아니어도 이미 그런, 나는, 비어 는 수족관의

오래된 물때만 손가락으로 비비고

 

 3

 빗물에 검어지는 돌들, 나는 돌보다 검어질 수 을까, 아

니 그게 아니라, 오늘의 암흑이 내일의 암흑보다 깊기를, 지

금은 그게 아니라 얼른 뛰어서 집에 가야지, 그게 아니어도,

밤새도록 내가 토해낸 밤들은 언제나 나보다 크고 밝다, 시

인의 종이, 검은 글자들을 지우면 함께 지워지는 검은 달빛,

아니 검은 구름들 (p. 52~53)

 

 이런 시도 다. 벼락 속 내리치는 빗발 /그렇게 /오랫동안 /우산이 필요한 영혼은 이제 내게 없다  (p. 23 <장마> 전문) 다음 생애 /어도 /없어도 /지금 다 지워져도 //나는 /너의 문자 /너의 모국에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p. 77 <문자> 전문)

 

 시인은 너의 부재는 나의 부재이며 너는 나라고 말한다. 빈 밤, 투명한 밤을 홀로 깨어 만든 모든 노래는 너를 위한 노래였던 것이다. 처절하게 울부짖는 목소리 대신 밤을 꿰매어 만든 시라서 읽는 동안 당신은 어떤 애절한 노래를 들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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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사르 2012-06-05 17: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 정도 읽다가 도저히 못 참고 주문을 클릭합니다. 자목련님, 어쩜 이렇게 멋진 시와 그리고 어쩜 이렇게 시에 걸맞는 해석을 해놓으셨는지요.
김경후..예전에 읽은 허수경의 빨간표지 시집 만큼 강렬한 시네요. 이분, 반하겠는데요.

자목련 2012-06-06 09:46   좋아요 0 | URL
어떤 밤을 떠올리게 하는 시가 많아서, 아프기도 했던 시집이었어요.
시를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 어떤 강렬함과 그 어떤 떨림이 있다면 충분하지 않을까 해요.
달사르님은 어떻게 읽으실까,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