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겹의 자정 문학동네 시인선 19
김경후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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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때로 짧은 시가 소설보다 긴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한다. 하나의 단어가, 하나의 구절이 가슴에 싹을 틔우고 자라기 시작한다. 그렇기 때문에 시는 강한 여운을 남긴다. 어떤 끌림에 잡은 한 권의 시집에서 투명한 밤, 홀로 잠들지 못하는 한 사람을 본다. 아니, 시라는 형식의 소설을 읽는다. 깨어나지 않는 잠을 자고 싶은 정도로 간절하지만 잠들지 못한다. 해서 그 시각, 밤이 들려주는 소리를, 밤이 기억하는 누군가를 담아낸 것이다.  그 밤을 알 것 같아서 누군가는 안타까울 것이고, 어디선가 그 밤을 견디고 을 누군가는 아플 것이다.

 

<북 치는 여자>

 

 너를 볼 수 없는 밤을 새고

 너를 볼 수 없는 밤이 온다

 오늘은 어둠도 돌아올 수 없는 밤

 너의 길고 푸른 속눈썹으로 만든 붓,

 그 붓으로 나는 쓴다

 

 북, 치, 는, 여, 자,

 나의 기관차, 너의 검게 탄 팔뚝 대신

 이제 빈 병 같은 봄이 온다

 벼락을 가르고 용의 피냄새 풍기는 북소리

 그 대신 낮잠만 온다

 북 치는 여자

 

 한밤의 옥상

 타들어가는 담뱃불로 너는 북가죽을 뚫었다

 우산을 쓸지 노랠 부를지 망설이는 나에게

 해 질 때마다 북을 쳐달라는 나에게

 북을 건넸다

 

 오늘은 어둠조차 돌아올 수 없는 밤

 네가 마지막으로 두드렸을 북한강 물 위에

 백지 같은

 달의 유골함 같은 너의 북 위에

 

 나는 쓴다

 너를 두드린다  (p. 14~15)

 

<그믐>

 

 나를 꽝! 닫고 나가는 너의 소리에

 잠을 깬다

 깨어날수록 난 어두워진다

 기우뚱댄다

 

 거미줄 흔들리는 소리

 눈을 감고 삼킨다

 

 오래 머물렀던 너의 이름에서

 개펄 냄새가 난다

 그것은 온통 버둥거린 자국을

 부러져 박힌 비늘과 지느러미들

 

 나를 꽝! 닫고 나가는 소리에

 내게 묻혀 던 악몽의 알들이 깨어난다

 깨어날수록 난 잠든다

 컴컴해진다

 

 닫힌 내 안에

 꽉 막힌 목구멍에

 이제 그곳에 빛나는 건

 부서진 나를 짚고 다니던 부서진 너의 하얀 지팡이

 내 안에 악몽의 깃털들만 날리는 열두 개의 자정뿐  (p. 46~47)

 

 하나의 사랑이 끝났다고 떠난 이는 말하겠지만 남은 이는 여전히 사랑이 남았으니 그 밤은 얼마나 외로울까. 아니, 사랑이 아니라도 그렇다. 모든 관계가 끊어진 자리는 늘 시리다. 한 때 친밀했던 사이, 한 때 슬픔을 나눴던 사이가 깨어지는 건 사소한 오해로 시작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너를 쓰고 너를 두드리는 내 곁에 존재하는 건 달빛도 사라진 열두 개, 열세 개, 열네 개로 이어지는 자정뿐인 것이다.

 

 <붕대>

 

 발이 푹푹 빠지는 밤,

 더이상 서로를 볼 수 없을 때

 우리는 만난다

 가슴에서 오래된 붕대 냄새가 나

 네가 머물렀던 상처엔 내가 없었지

 서로 보지 못하는 흔적들

 창문을 닫아도

 바람의 방향은 바뀌지 않는다

 

 발이 푹푹 빠지는 밤,

 서로 대답하지 않을 때

 우리는 만난다

 대합 껍질 속에 넣어둔

 내 혀의 무늬는 어떻게 변했을까

 너덜너덜해진 침묵을 기워대는 것도

 이제 그만

 침묵조차 불을 끄고

 방을 나간다

 텅 빈 어항을 껴안고 홀로 서 는 밤

 

 바닥의 붕대 위로 절뚝거린 발자국

 서로를 끝없이 기다리며 우리는 헤어진다

 다시는 밤이 오지 않는다

 이제 그만  (p. 34~35)

 

 닮은 듯 다른 상처를 서로가 껴 앉는 밤은 없다. 아무렇지 않게 방을 나가는, 서로에게서 멀어지는 한 여자와 한 남자를 그려본다. 갈기 갈기 찢긴 마음이 보이는 듯하다. 이토록 잔인한 고통으로 쓰여진 시를 남긴 그 밤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 밤의 깊이를 잴 수 을까. 아니 어떤 기기로도 측량할 수 없을 것이다. 고통으로 채워진 밤의 상처를 싸맬 붕대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김경후의 시에는 수많은 밤이 등장한다. 그 밤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간절함을 이런 시에서 본다.

 

<잘 듣는 약>

 

 이번 약은 잘 들을 겁니다

 의사 말을 듣고

 믿고 싶은 그 말을 믿고 나는 묻는다

 얼마나 잘 듣지 않았나

 이불 속에 드러누운 나의 마음은

 컴컴한 창밖 얼어붙은 얼굴을 들이미는 나의 고함조차

 

 내가 어도 나는 빈 방

 없어도 나는 나의 빈 방

 

 누구를 기다리는가

 골목 구석에 쑤셔박은 내 밤들

 털 빠진 등허리를 말고 자던 내가 버린 고양이들

 듣지 않았지 나는

 

 내가 지내온 빈 밤의 소리들

 내가 지워버린 빈 밤의 소리들

 

 듣지 않고 딛고 가야 할 소리만을 믿었던 나는

 나는 텅텅 빈 소리

 그것들을 잘 다지고 잘 부수지만 잘 듣지는 않은 병

 

 앞으로도 나는 듣지 않을

 빈 방의 나의 소리들

 이 약은 잘 듣고 겠지 (p. 62~63)

 

 <안개 악몽>

 

 저 너머 뱀 비늘 냄새 (안개, 안개인가) 지금까지 내게 그

런 게 너였니, 나를 물어뜯은 까마귀 (아니, 아니야) 그래.

내가 물어뜯은 까마귀 (그건 더 아니야) 그래, 그 기억의 어

금니 자국도, 안개나 되어버려 (그러지 마) 아니, 너는, 갈

기갈기 찢긴, 비명들의 은유일 뿐 (왜 나한테) 아니, 너는,

 무쇠 장화에 외올 베옷 입은 안개, 네겐 그래도 돼 (안 돼

안 돼) 썩은 계단을 뛰어올라가, 나의 안개, 올라가라니까

(그러지마, 아니야) 네게만 그럴 거야, 올가미와 창살이

는, 나의 안개 (안 돼) 네겐, 그래도 돼, 핏물 젖은 나의 안

개 (안개, 안개) (p. 97)

 

 약으로 치유할 수 는 밤이길 바라지만 밤은 낮처럼 환하고 고요하다. 밤을 방해하는 소리들로 잠들지 못한다. 밤조차 잠들지 못하도록 울부짖는 소리들로 잠들었던 밤은 악몽으로 채워진다. 겹겹이 쌓인 밤들이 하나의 계절을 보내고, 계절이 바뀌는 시간을 노래한다. 밤마다 누군가의 흔적들을 새기고 지운다. 시는 밤처럼 어둡고 검다. 김경후의 시집을 읽고 하나의 이야기를 만드는 건 내 의지다.

 

  <환절기>

 

 1

 첫 빗방울을 맞기 직전의 땡볕돌 냄새가 나는 시, 불타는

역청탄 같은 노래, 그랬으면 좋겠지만, 그게 아니라, 올해

내가 유일하게 칭찬받은 사람은 술집 여주인, 손님, 많이 마

셨는데 안 취한 거 같네, 그게 아닌데, 그게 아니지만 이것

도 아닌, 뜨겁지 못한 그게 시가 되는, 취하지도 못하는 시

 

 2

 머리에 대못이 박힌 채 껍질이 벗겨지는 뱀장어 눈알, 그

빛과 감촉처럼 사랑하기를, 발광하며 감전되기를, 질주하

는 죽음의 타이어 자국이 영혼에 새겨져도, 이빨로 타이어

를 물어뜯어서라도, 저주할 만큼 사랑하기를, 그게 아니더

라도 그러기 바라기를

 

 오래된 건지 버려진 건지 모를 옷과 가방들, 사실은 그게

아니라, 세탁기에 해어진 너의 명함과 동전지갑, 그건 더욱

더 아닌, 너의 밤색 머리카락과 새치까지, 그러지 않아도 되

는데 그게 아니어도 이미 그런, 나는, 비어 는 수족관의

오래된 물때만 손가락으로 비비고

 

 3

 빗물에 검어지는 돌들, 나는 돌보다 검어질 수 을까, 아

니 그게 아니라, 오늘의 암흑이 내일의 암흑보다 깊기를, 지

금은 그게 아니라 얼른 뛰어서 집에 가야지, 그게 아니어도,

밤새도록 내가 토해낸 밤들은 언제나 나보다 크고 밝다, 시

인의 종이, 검은 글자들을 지우면 함께 지워지는 검은 달빛,

아니 검은 구름들 (p. 52~53)

 

 이런 시도 다. 벼락 속 내리치는 빗발 /그렇게 /오랫동안 /우산이 필요한 영혼은 이제 내게 없다  (p. 23 <장마> 전문) 다음 생애 /어도 /없어도 /지금 다 지워져도 //나는 /너의 문자 /너의 모국에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p. 77 <문자> 전문)

 

 시인은 너의 부재는 나의 부재이며 너는 나라고 말한다. 빈 밤, 투명한 밤을 홀로 깨어 만든 모든 노래는 너를 위한 노래였던 것이다. 처절하게 울부짖는 목소리 대신 밤을 꿰매어 만든 시라서 읽는 동안 당신은 어떤 애절한 노래를 들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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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사르 2012-06-05 17: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 정도 읽다가 도저히 못 참고 주문을 클릭합니다. 자목련님, 어쩜 이렇게 멋진 시와 그리고 어쩜 이렇게 시에 걸맞는 해석을 해놓으셨는지요.
김경후..예전에 읽은 허수경의 빨간표지 시집 만큼 강렬한 시네요. 이분, 반하겠는데요.

자목련 2012-06-06 09:46   좋아요 0 | URL
어떤 밤을 떠올리게 하는 시가 많아서, 아프기도 했던 시집이었어요.
시를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 어떤 강렬함과 그 어떤 떨림이 있다면 충분하지 않을까 해요.
달사르님은 어떻게 읽으실까,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