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쉽지 않았다. 열네 살 린다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일은 어려웠다. 나는 그 나이의 감각을 잊어버렸다. 소녀였던 시절, 빨리 어른이 되면 좋을 것 같았고, 드라마나 소설 속 주인공처럼 멋진 사랑을 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서 사랑을 기대했고 사랑을 완성하고 싶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 사랑을 원하는 마음, 그 하나는 닮았을지도 모른다. 열네 살에서 열다섯이 되는 시기는 돌봄이 필요하다. 동시에 누군가를 돌보기에 충분한 나이다. 에밀리 프리들런드의 『늑대의 역사』에서 린다가 원한 건 돌봄이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마음의 돌봄 말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확인할 수 없는 감정에 대해 말할 수 있는 대상이 필요했다.

 

춥고 어두운 숲의 오두막에서 린다는 부모와 함께 산다. 학교에서는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집 주변의 호수에서 카누를 타거나 네 마리의 개와 달리기를 한다. 린다는 어렸을 때 모여서 생활했던 공동체를 기억한다. 어떤 계기로 그것이 실패를 돌아가고 이렇게 오두막에서 살게 되었는지 린다의 부모는 설명해주지 않았다. 시골의 한적한 변두리에서 사춘기 소녀 린다에게 세상은 고요하고 시시했을 것 같다. 그래서 새로 부임한 그리어슨 선생님에게 호감을 느꼈고 호수 반대편 근사한 통나무집에 이사를 온 가족을 몰래 지켜봤을 것이다. 이전과는 다른 무언가가 자신의 몸에서 발생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던 거다. 그리어슨 선생님이 릴리 대신 자신에게 더 관심을 가졌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자신의 매력을 잘 아는 릴리는 그걸 이용할 줄 아는 아이였고 린다는 그런 릴리가 부러우면서도 질투를 느꼈다. 결국은 스캔들로 그리어슨 선생님은 학교를 떠났다.

 

우리 셋 사이에는 열한 살의 나이차가 있었다. 우리는 네 살, 열다섯 살, 스물여섯 살이었다. (…) 항상 출타 중인 천문학자 남편이 서른일곱 살이라는 사실을 기억 속에서 떠올리자 이제는 겁이 날 지경이었다. (116쪽)

도시가 아닌 시골에서의 단조로운 일상에서 벗어날 수 없는 린다에게 패트라와 폴 모자와의 만남은 즐거운 변화였다. 학교가 끝나고 네 살짜리 아이와 놀아주면서 용돈을 벌 수 있다니, 정말 운이 좋았다. 우주와 별을 연구하는 천문학자인 남편 레오는 집에 없었고 아내 패트라는 남편의 원고를 수정하느라 바빴다. 폴과 린다는 제법 잘 통했고 서로를 좋아했다. 하루하루 폴과의 놀이는 즐거웠다. 하지만 그리어슨 선생님에 대한 관심과 릴리를 향한 묘한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하나의 사건이 발생한다. 린다의 인생을 흔드는 일, 시간이 지나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폴의 가족과 함께 나들이를 떠났다. 마음은 들떴고 그들과 함께 지내는 시간은 행복했다. 폴이 기운이 없었던 것만 빼면 말이다.

 

린다가 다시 폴의 가족을 찾았을 때 폴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린다는 그 사실을 몰랐다. 레오와 패트라가 자신만의 종교적인 이유로 폴을 병원에 데려가지 않았다는 걸 나중에 재판에서 알았다. 폴의 죽음에 대한 재판이었다. 완벽해 보였던 가족이 해체되는 순간이었다. 린다를 향한 질문은 너무 난해했다. 폴을 대하는 젊은 부부 패트라와 레오의 행동이 어떻게 잘못인지 알 수 없었다. 그들의 추구했던 삶이 무엇인지 말이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들려주는 린다의 이야기는 한 번씩 소설의 첫 문장(폴 생각을 아예 안 하고 사는 것은 아니다.)을 불러온다. 린다는 숲의 오두막을 떠나 다른 도시에서 공부하고 생활하기도 했다. 남자친구를 사귀고 돌아가신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여하고 이제는 십대가 아닌 어른이다. 짝사랑 대신 원하는 상대와 사랑하고 과거의 추억을 떠올리며 그들의 행적을 찾기도 한다. 그러나 폴의 죽음은 사라지지 않고 지울 수 없다. 누구든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단순한 명제로 말하기엔 가혹한 일이다. 그토록 벗어나고 싶었던 숲의 오두막으로 돌아온 서른일곱의 린다의 마음도 알 수 없다. 비밀로 가득한 공동체 생활이나 모호하게 설명하는 패트라와 레오 부부의 신념처럼. 어른이 되면 다 알 것 같고 모든 게 선명할 것 같았던 기대는 사라졌다. 세상은 모르는 일 투성이다. 모든 성장소설이 아름다운 끝을 보여주지 않는 것처럼.

몸이 아픈 상태를 “맘이 좋지 않아.”라고 말한 폴을 생각하면 싱글맘과 아홉 살 아들 욘의 외롭고 쓸쓸한 일상을 그린 『아들의 밤』과 겹쳐진다. 엄마를 기다리다 겨울밤을 혼자 걷고 걷는 욘의 차가운 손을 생각한다. 적극적인 돌봄이 필요한 연약한 아이, 스스로 자신을 달래며 무서움을 이겨내고 믿음을 키울 수밖에 없던 소설 속 아이들을 생각한다. 『아들의 밤』은 성장소설로 볼 수는 없지만 욘의 느꼈을 감정은 린다의 그것과 비슷할 것 같기도 하다. 『늑대의 역사』는 누군가 필요할 때 힘든 마음과 상처를 달래줄 이가 등장하는 성장소설과 달라서 더 강한 울림을 안겨준다. 거기다 소설은 무척 아름답다. 숲이이라는 배경과 계절의 바뀌는 부분에 대한 묘사가 압권이다. 이런 문장에 반하지 않을 수 없다.

여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는 누구나 다 안다. 여름을 애타게 기다리고 또 기다리지만, 항상 뭔가 잘못되었다. 어디를 보나 허공에 빽빽한 벌레들, 나무를 샅샅이 뒤지는 새들, 가지를 축 늘어지게 하는 거대하고 무거운 나뭇잎들뿐이다. 여름을 억누르고, 망가뜨리고, 다 부숴버리고 싶어진다. 오후는 참으로 넓고도 길다. 무슨 일을 하건 그게 뭐가 중요한지 모르겠다. (180쪽)

​이 또한 『아들의 밤』에서도 만날 수 있다. 겨울이라는 계절과 눈이라는 소재를 차갑고도 따뜻하게 묘사한다. 아름다운 문장 속에서 소년의 움직임은 슬프고 애처롭다.

불빛을 받는 눈은 황색과 청동색을 띠고 있었고 움푹 패어 그림자가 드리운 곳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조금도 무서워 보이지 않았다. 주위의 숲은 고요했다. 욘은 야간 조명이 있는 곳으로 간다면 그동안 자신이 두려워해온 일을 극복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225쪽)

 

우울과 슬픔으로 채워진 성장소설로 빼놓을 수 없는 건 오정희의 『새』다. 소설에는 우미와 우일 어린 남매는 서로가 서로를 돌보고 보호한다. 외할머니, 외삼촌, 큰집, 아버지까지 어른이 있었지만 방치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아버지가 데리고 온 여자가 떠나고 아버지마저 돌아오지 않는 셋 방에서 남매는 존재했지만 존재하지 않았다. 좀 더 나은 게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그런 내일을 바랐을 아이들이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새처럼 날 수 있다고 믿은 우일의 소망이 이뤄졌기를 바란다. 죽음을 통해 새가 되었다 하더라도. 성장한다는 건 아픔을 동반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많이 아팠겠다고 어루만지는 다정한 손길, 든든한 어른이 없는 지독한 성장은 고통스럽다. 설령 그것이 소설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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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19-07-16 09: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표지 디자인이 눈을 홀리네요.

자목련 2019-07-16 18:24   좋아요 1 | URL
네, 독특한 표지에요. 내용도 그러하고요^^
 

 

주말에 갑자기 보일러가 가동하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 설정을 바꿔도 아랑곳하지 않고 돌아갔다. 내가 뭔가를 잘못 만졌는지도 모르겠다. 어찌할 바를 몰라서 관리사무소에 문의를 했더니 친절하게도 직원분이 방문을 해주셨다. 예약이 걸려 있다면서 그것을 다 해제시켰다고 하셨다. 별문제가 없는 듯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잠든 새벽에 어떤 소리에 깨었다. 갑자기 윙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보일러가 일을 하는 것이다. 조절기를 꺼버리고 잠을 잤다. 월요일에 서비스센터에 방문 신청 접수를 하니 담당기사님이 전화를 하셨다. 그러면서 보일러의 문제점에 대해 간단한 설명을 부탁했다. 나는 기사님의 질문에 의도를 파악했으나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약속된 시간이 지나 방문한 기사님은 점검을 하셨고 내가 궁금한 것에 답을 해주셨는데 결론은 오래된 보일러라서 그렇단다. 덧붙여 앞으로 벌어질 수도 있는 상황에 대한 설명까지 해주셨다. 지금은 괜찮지만 언제 어떤 문제가 발생해도 이상하지 않다고 말이다. 그리고 여름이니 중앙조절기만 켜두고 다른 방은 꺼두어도 좋을 것 같다고 하셨다. 그 말에 수긍을 하면서도 왠지 불안한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보일러가 제멋대로 일을 하려고 할지도 모르고 오래되었으니 부품은 없고 새로운 보일러를 만나야 하는 일이 생길 것이다. 꽤 큰 비용이 발생한다는 것에 대한 걱정 말이다.

 

오랜 시간 제 할 일을 다 했으니 수고했다고 멋지게 이별할 수 있으면 좋으려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예고 시스템이라 생각하고 준비를 한다 해도 그 기간이 얼마나 될지 모른다. 모든 일이 갑자기 일어난다는 걸 잘 안다. 걱정한다고 걱정이 사라지지 않다는 걸 알고 불안한 마음을 키울 필요가 없다는 걸 안다. 그래도 당황스럽고 속상하다. 이런 나를 위로하는 건 매콤한 비빔면과 몇 권의 책뿐이다. 최근에 돋보이는 활약의 소설가는 장류진이 아닐까 싶은데 테마소설집의 참여로 더욱 확실하게 인정한다. 시인 김현의 소설도 있어 흥미롭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소설과 김진영과 아니 에르노의 산문집도 평이 좋아서 기대가 된다.

 

 

 

 

 

 

 

 

 

하루가 다르게 기온이 상승한다. 바람은 좀처럼 다가오지 않는다. 여름이 성장하는 날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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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구의 사랑 오늘의 젊은 작가 21
김세희 지음 / 민음사 / 2019년 6월
평점 :
품절


“어떤 연애는 우정 같고, 어떤 우정은 연애 같다.” 최은영의 단편 「쇼코의 미소」에 나오는 글이다. 김세희의 첫 장편소설 『항구의 사랑』을 읽고 나는 저 문장이 생각났다. 뭐라 설명할 수 없고 확정 짓을 수 없는 감정에 대해서 말이다. 아니, 그건 사랑이었다. 시간이 지나 그 감정을 가만히 떠올려봐도 그 순간 그 느낌은 단 한 사람을 향하는 사랑하는 감정이었을 게 맞다. 학창시절 우리에겐 어디든 함께 붙어 다니던 단짝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가 다른 친구와 이야기를 하면 괜히 화가 났다. 왜 그랬을까? 그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두루두루 다 친하게 지낼 수도 있었는데 꼭 나만을 위한 친구가 있기를 바랐다. 그 바람의 바탕에 존재하는 감정을 당시에는 잘 몰랐다. 돌아보니 사랑이었다. 동성 간의 우정, 사랑, 그리고 고백하지 못한 그 마음, 모두 사랑이었다.

하루 종일 같은 교실에서 생활했는데도 헤어짐이 아쉬웠고, 나중에 같은 대학에 가고 같이 살자고 약속했다. 수업이 지겨울 때면 쪽지를 써서 건넸고 좋아하는 남학생 이야기를 하면서 부끄러움을 감추지 않았다. 로맨스 소설을 돌려보고 남학생 교실을 지나 음악실로 향할 때는 괜히 더 걸음걸이에 신경이 쓰였다. ​이런 모든 일상이 이 소설에 있었다. 목포라는 항구 도시에서 고등학교를 다닌 화자 ‘나’가 들려주는 그 시절에는 분명 내가 있었고, 그리운 이들이 이었다. 그래서 한 편으로는 쉽게 몰입되면서도 한 편으로는 흥미가 떨어지기도 했다.

반에는 그런 아이가 있었다. 언니나 오빠가 같은 아이, ​너무 예뻐서 모두에게 사랑을 받는 아이, 학교생활엔 관심이 없고 연예인에 빠져 선생님에게 찍힌 아이. 내가 기억하는 교실에도 소설 속 ‘인희’나 ‘민선 선배’가 있었다. 현재의 10대의 교실에도 있을 것이다. 어떤 시절에만 발생하는 감정이 있고 김세희는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끌어와 정교하게 보여준다. 소설에서 연극부 동아리에서 만난 ‘민선 선배’와 ‘나’의 관계는 특별하다. 서로가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이기에 한순간도 그 사실을 잊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둘을 보는 친구 규인의 시선은 달랐다. 선배와 나 사이를 인정받고 싶었지만 규인과의 사이는 틀어지고 말았다. 영원할 거라 믿었던 민선과의 관계는 끝났고 그 시절의 사랑은 서툰 감정이나 미완의 사랑으로 치부되었다. 하지만 과연 그런 것일까?

나는 내가 그녀를 영원히 사랑할 수도 있고,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미래에 그녀를 잊고 다른 남자를 만날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다. 둘 사이에는 아무런 모순이 없었다. (98쪽)

 

오랫동안 나는 내가 그녀를 사랑한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제 더 이상 그 감정을 내가 선택한 거라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내가 감정을 소유했던 게 아니라 감정이 나를 소유했던 것만 같다. (103쪽)

​대학에서 만난 친구들과의 일상은 지난 시절과의 이별을 원했다. ‘나’에겐 남자 친구가 생겼고 그 시절 여자를 좋아하고 사랑했다는 일은 비밀로 남아야 했다. 그래서 자꾸 연락을 하고 학교 앞으로 찾아온 인희가 반갑지 않았다. 인희의 변하지 않은 옷차림과 태도가 불편할 뿐이다. ‘나’는 왜 있는 그대로의 인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못했을까. 여자가 여자를 사랑하고, 남자가 남자를 사랑하는 건 비난이나 책망을 받아야 할 일이 아닌데 말이다.

​김세희의 『항구의 사랑』은 누군가에겐 한 번도 꺼내지 못한 비밀이나 고백에 대한 이야기가 될지도 모른다. 그것이 상처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작가의 애틋한 마음이 전해진다. 그저 사랑일 뿐인데, 여전히 사랑이라 말하지 못하고 주저하는 이들과 동성 연인을 친구라 말하며 아파하는 이들에게 그 마음이 온전히 닿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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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죽은 사건
구라치 준 지음, 김윤수 옮김 / 작가정신 / 2019년 6월
평점 :
절판


책의 표지 속 머리에서 흘러내린 피만 봐도 섬뜩하다. 그런데 제목을 보면 또 이상하다. 『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죽은 사건』이라니. 설마 진짜라는 말인가. 어떻게 두부 모서리가 살인 도구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이름만 같은 ‘두부’라는 건가? 우리가 다 아는 그 ‘두부’가 아니라 신종 두부가 있어 사람을 죽인 사건이 발생한 걸까? 읽기도 전에 이렇게 다양한 상상을 할 수 있는 책이라는 점에서 우선 합격점을 주고 싶다. 아, 내용은 그런 영 아니냐고? 아니다, 정말 재밌는 미스터리 소설이다. 구라치 준의 소설을 처음 읽은 게 미안할 정도였다고 하면 과장일까? 여하튼 그렇다.

 

책에는 모두 여섯 개의 이야기가 있다. 「사내 편애」만 제외하고 모두 살인 사건이 발생하고 범인을 잡는 과정이 등장한다. 그런데 이 작가 좀 대단하다. 어떻게 살인을 다루면서 공포나 두려움이 아니라 기발한 재미를 안겨줄 수 있을까? 「ABC 살인」은 묻지 마 살인을 소재로 ‘사람을 죽이고 싶다’란 잔혹한 문장으로 시작한다. 유산을 탕진하고 생활이 어려운 주인공은 자신과 같이 유산을 받은 동생을 죽이기로 결심한다. 최근 일어난 A 지역에서 A 이름이 죽는 살인 사건의 연장선으로 위장하여 계획은 세운다. 그런데 누군가 자신과 같은 생각을 했는지 자신의 행동을 앞지른 범죄가 발생한다. 단순한 구성으로 독자를 몰입하게 만든다면 놀라게 만드는 기발한 단편이다.

 

사실, 이 책에서 가장 재미있게 읽은 건 「사내 편애」다. 처음엔 ‘사내 연애’로 읽고 오피스 살인 사건을 예상했다. 이 단편은 정말 재밌다. 인공지능의 시대에 일어날 법한 에피소드라 할 수 있다. 사람이 아닌 인공 지능 컴퓨터가 인사 관리를 한다는 설정이 그렇다. 상사에게 잘 보일 필요도 없고 맡은 업무만 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 같은데 인공 지능 컴퓨터가 문제였다. 어떤 오류 때문인지 한 사람만 편애를 하는 것이다. 그러니 직장 동료는 그 사람에게 잘 보이려 애를 쓴다. 이런 상상을 할 수 있는 작가니까 두부 모서리를 살인 도구로 사용할 수 있는 건 아닐까.

 

파티시에 전문학교에 다니는 여학생의 살인 현장에 놓인 파와 케이크로 살인 사건을 추리하는 「파와 케이크의 살인 현장」에서는 범인을 잡는 게 중요하지 않다. 여학생이 아르바이트를 하던 곳에서 만난 스토커가 범인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아라비아와 살해 동기까지 말이다. 이 소설에서는 ‘파’의 의미가 중요하다. 이런 설정은 추리의 가장 기본적인 의심에 대해 말하는 것만 같다. 끊임없이 질문하고 의심을 해야만 사건을 해결할 수 있으니 독자도 함께 의심하라고 말이다. 「밤을 보는 고양이」에서도 마찬가지다. 바쁜 도시의 직장에서 벗어나 할머니 댁으로 휴가를 온 주인공은 할머니와 같이 지내는 고양이의 행동을 이상하게 여긴다. 밤마다 잠을 자지 않고 한곳을 바라보는 것이다. 과연 고양이가 무엇을 바라보는 것일까?

 

기발한 제목의 표제작 「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죽은 사건」은 현재가 아닌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이 배경이다. 기밀 작전이라 할 수 있는 특수과학 연구소에서 발생한 살인사 건이다. 괴팍한 외모의 박사가 연구하는 공간 전위 장치에 동원된 병사가 죽었다. 피해자가 혼자 밀실에서 죽은 것이다. 현장에는 두부만 발견했고 용의자는 아무도 없다. 용의자의 알리바이나 살인 동기를 수사해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오직 현장에만 의지할 수 있다. 모든 행동에는 어떤 의미가 있듯 현장도 그러한 경우다. 이 단편은 사건의 이해를 위한 그림이 있어 추리를 도울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전쟁이 끝날 무렵 일본의 광기를 묘사했다는 게 인상적이었다.

책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한 「네코마루 선배의 출장」도 흥미롭다. 주인공은 신소재 개발에 관한 업무로 철통 보안의 연구소에 출장을 온다. 그곳에서 엉뚱하게 인형탈을 쓴 네코마루 선배를 만난다. 아르바이트를 하러 왔다는 선배, 철저한 경비체계를 생각하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연구소 실장 살인사건과 사건을 해결하는 네코마루 선배의 활약.

뻔하지 않은 설정과 예상하지 못한 일상의 유머까지 곁들인 멋진 소설집이다. 바야흐로 추리와 미스터리 소설의 계절에 이보다 더 재밌게 독자를 유혹하는 책이 있을까? 이 여름, 뭔가 톡 쏘는 시원한 즐거움을 원한다면 구라치 준의 소설이 제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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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9-07-03 1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이 책 소개와 리뷰가 많이 나오네요.
제목을 다 기억하는 건 아닌데, 두부가 들어가서 기억을 하는 것 같아요.
자목련님, 저녁 맛있게 드시고 좋은 하루 보내세요.^^

자목련 2019-07-04 18:52   좋아요 1 | URL
말씀처럼 제목 때문에 많은 관심을 받는 것 같기도 해요. 즐겁게 읽은 단편집이었어요.
 

 

나의 인간관계는 매우 협소하다.그러나 깊고 넓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이제는 불편한 관계를 이어갈 만큼 감정의 여유도 없고 체력도 따라주지 않는다. 1년에 한 번, 아니면 두 번 만나는 친구, 만나지는 못해도 거의 서로의 일상을 돋보기처럼 보는 친구가 몇 있다. 어느 시절에는 사람을 좋아하고 적극적으로 다가가기도 했다. 그런 나를 아는 친구가 엊그제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너 말도 많이 하는 애였는데, 그치? 우리 처음 만났을 때 나한테 정말 그랬는데.” 아쉬움이 담긴 말투였다. 어쩌다 그런 나는 사라졌을까. 그렇다고 지금의 내가 싫다는 건 아니다. 이형만 변하는 게 아니라 내부의 어떤 것들도 수시로 변하는 게 인생인까.

 

그건 그렇고 그저께엔 친구를 만났다. 맛있는 걸 해주겠다면 바리바리 짐을 싸 들고 왔다. 카페를 운영하는 친구라 뭐든 잘 한다. 매일 주방에서 일하는 그녀에게 미안했지만 나는 그저 맛있게 먹기만 했다. 카페에서 직접 기르는 민트를 시작으로 라임도 챙겨오고 마트에서 낙지까지 사온 정성을 어찌다 말할 수 있을까. 무지 매운 낙지볶음을 먹고 후식으로 친구가 만든 칵테일을 마셨다. 우리는 소소하지만 대단한 일상을 서로에게 전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친구가 우리 아파트에서 찍은 길고양이 사진을 보면서 친구가 기르는 고양이 이야기를 했고 그녀의 남자친구가 궁금해하는 내 독서 목록도 알려주었다. 친구는 나를 만날 때 항상 선물을 가져오는데 그녀가 선물이라는 걸 도통 믿지 않는다. 이번엔 예쁜 선글라스를 사 왔다. 자주 써야 할 텐데. 모르겠다.

 

 

 

 

 

 

 

친구는 내가 언젠가 글에 썼던 나의 별명 ‘빨간 원피스’를 지어준 당사자다 여름이면 그 원피스가 생각나곤 한다. 그 시절의 나를 생각하는 일, 나이가 들었다는 증거다. 아무튼 우리가 공유한 시간과 공간은 살아서 이렇게 미소를 짓게 만든다.

 

장마가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이곳은 맑음이다. 6월이 참 빠르게 지나간 것 같다. 아직 6월이 끝난 건 아니지만. 장맛비가 내리는 밤을 기다린다. 하루 정도는 그냥 아무 생각없이 쏟아지는 하염 없이 바라보고 싶다. 그런 밤에 이런 책을 곁에 두어도 좋겠지. 읽지 않더라도 눈길이 닿는 곳에 있다면 마음의 습기가 사라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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